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73화 (73/103)

<73화>

“야옹, 다 왔다.”

단골 동물병원에 도착하자 막 문을 열고 있던 간호사가 인사를 건넸다. 우리 때문에 문을 연 것 같다며 루나는 무척 미안해했다. 의사 쌤은 즉시 라라를 진찰해주었다.

“임신 중독증이네요.”

라라는 입덧도 심하고 혈압도 높은 편이고 단백뇨도 있단다. 단백뇨는 사람으로 치면 당뇨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우울증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게 뚱땡이, 진작 살 좀 뺐어야…. 오마나!”

냉소적으로 투덜거리던 루나가 기겁했다. 아직 케이지 안에 있는 미오가 날카롭게 야옹거린 것이다. 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깜짝 놀랐잖아! 미오, 왜 그래?”

나는 미오를 꺼내 안아 들었다.

“걱정돼서 이러는 거지.”

의사 쌤도 내 말에 동조했다.

“이렇게 금슬 좋은 고양이 부부도 드물 것 같네요.”

알콩달콩한 두 고양이 사이엔 관심 없다는 듯 루나가 새침한 어조로 물었다.

“라라는 어떻게 해야 하죠?”

“임신 중이니 함부로 약을 투여할 수도 없고, 입원을 시키시면 어떻겠어요?”

“입원요?”

“네. 저희가 종일 돌보면서 위험한 상황이 되면 곧바로 조치하고 알려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감염 여부도 수시로 체크할 수 있고, 영양을 고려한 식단을 짜서 식사를 제공하고, 간단한 운동도 시키고요.”

“그거 좋겠네요. 은별이 네 생각은 어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집에서는 다 바쁘니까 라라만 돌볼 수도 없을 거고,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런데 요 녀석들이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데요.”

루나가 의사 쌤에게 물었다.

“괜찮으시면 둘 다 맡기시면 어때요?”

결국 고양이 부부는 함께 입원 절차를 밟게 되었다.

“저희가 잘 돌보겠지만 댁에서도 가끔 와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고요.”

의사 쌤의 말에 내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매일 들를게요.”

부부는 2인실이라 불리는 유리방에 입실했다.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중앙에 각종 고양이 시설이 마련된 로비가 있어서 다른 고양이들과 교류도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라라와 미오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병원을 나왔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필립이 앞장서 걸었다. 그의 긴 꼬리를 쳐다보며 이번에도 나는 은근슬쩍 루나의 손을 잡았다. 루나 역시 이번에도 별 저지 없이 내 손을 맞잡았다.

“미오랑 라라는 진짜 사랑꾼이야, 그치?”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쪽을 슬쩍 보고는 앙증맞은 입술을 오므렸다.

“형, 아직도 라라가 싫어?”

“싫은 게 아냐.”

“그럼?”

“지금도 봐. 라라가 아기 낳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미오는 앞길이 구만리인데 홀아비 되는 거잖아.”

루나의 말을 들은 건지 필립이 돌아보며 가릉거렸다.

사태는 심각하지만 나는 루나의 표정과 태도가 좀 웃겼다. 그러나 루나가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서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외계인이라 그런가, 이럴 때 보면 루나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존재 같았다. 20년에 한 살씩 먹는다더니 과연 지난 2년간 내 몸과 마음이 쉴 새 없이 자라는 동안 루나는 변한 게 전혀 없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고 말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말 하지 마. 라라가 정말 잘못되면 어떡하려고.”

“말이 그렇단 말이야.”

“이제 라라한테 틱틱거리지 말고 잘 대해줘.”

루나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반박하지는 않았다.

“날씨 좋다! 형! 우리 내일은 다 같이 공원에라도 놀러 가자.”

“그럴까?”

“예-!”

교차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배달 차량 뒤에서 물품을 점검하고 있던 옆집 슈퍼 아줌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이구! 은별이가 그새 더 컸네!”

“안녕하세요.”

“어떻게 볼 때마다 크나. 우리 막내 녀석이 엄청 부러워하던데.”

슈퍼 막내아들은 아직 코흘리개였다. 자식이, 내가 너만 할 땐 언감생심 이런 ‘으른 남자’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저 150cm만 넘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지. 크크.

“우리 은별이는 기획사에서 스카우트 제안도 받았답니다.”

내 눈이 휘둥그레져서 루나를 ‘내려다’ 보았다. 아니 왜 그런 말을! 나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원래 잡고 있던 루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데 뭐지? 똑같이 꽉 잡아 오는 게 반대로 알아들은 듯?

“그래그래. 기획사 대표님이 우리 은별이가 얼굴 천재라고, 아야야. 알았어. 드라마에 출연하게 해준다고 말이죠.”

“정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처음에는 고구마 같았는데 애가 점점 인물이 나더라고!”

아줌마는 자기 일처럼 흥분했고 루나는 더더더 잘난 척을 했다. 어유, 쪽팔리게 왜 이러는 거야. 결국 나는 종알거리는 루나를 억지로 잡아끌고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 은별이는- 야야, 잠깐잠깐. 농구선수 한다고 거절했지 뭐예요!”

“아유, 아깝네! 드라마에 나오면 좋은데. 내가 말이지-”

슈퍼 아줌마는 자기 일처럼 들떠서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 떠들었다.

“아, 형! 왜 그래요?”

“왜? 사실을 말하는 건데.”

“그런 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뭐라고 하는데?”

“팔불출.”

“뭐야?”

“야옹.”

필립은 내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꼴사납다는 듯이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사라져버렸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한 말이지만 비유가 너무 절묘해서였다.

“남편이나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해요.”

“아항.”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루나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돌아보았다. 싱글거리는 내 엉덩이를 그가 무릎으로 찼다.

“이 녀석이, 뭐라고?”

“아야!”

야무지게 얻어맞은 나는 서둘러 가게로 들어왔다.

“헐, 꼭 루나커피 매니저 같지 않아?”

로저를 보고 한 말이었다. 연락도 안 했는데 자동으로 와서 가게를 운영 중이었다. 알바생들은 정말로 그를 점장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루나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우리 동물병원 다녀오느라 오픈이 늦었는데.”

“문에 붙여놓은 메모 봤네. 그래서 내가 알아서 오픈하고 장사 시작했지.”

“고마워요. 그런데 준이는요?”

“위에서 고양이들과 놀고 있을 거야.”

로저는 의논할 일이 생겨서 왔다고 했다.

토요일이라 점심시간에 알바생이 오는 날이었고, 여유가 생긴 우리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준이는 고양이들과 블록 부수기를 하면서 놀고 있었다.

로저가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뜻밖의 손님이 왔다.

“뭐야?”

로저가 놀라 외쳤다. 주방에 들어선 사람은 엘리아와 아치볼트였다. 황당하게도 둘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로저가 물었다.

“화해한 건가?”

아치볼트가 활발하지만 어딘지 바보스럽게 말했다.

“한국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그 속담이 얼마나 절묘한지 알았다고 할까요.”

엘리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요.”

루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 결론에 감정이입이 전혀 안 되는데요.”

“루나. 우리가 드라마도 아닌데 감정이입까지는 할 필요 없어.”

아치볼트의 말이었다. 루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거야 그렇지만요.”

“결혼식에 와줄 건가?”

“뉴욕에요? 루나커피에서 너무 먼 곳은 불안해서요.”

“루나커피도 이동하면 안 되나?”

엘리아의 말이었는데 그건 로저가 말렸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나, 엘리아. 염탐당하는 와중에 루나커피가 통째로 왔다 갔다 하는 건 좀 불안해. 자네들도 비행기로 이동하도록 해.”

“우리도 워튼 씨처럼 감쪽같이 신분 세탁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쉿! 조용히.”

로저가 주의를 주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필립이 빈 의자로 뛰어올랐다.

“야옹, 어떻게 화해한 거야?”

아직 미성년자인 나를 의식해서인지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엘리아와 아치볼트가 화해한 것은 침대 안에서인 것 같았다. 둘은 몸 정이 애증을 이겼다고 말하다가 루나가 던진 방울토마토를 각각 이마와 코에 맞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로저, 의논할 말이 뭐죠?”

화제를 돌리려는 게 분명한 루나의 질문에 로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낮에 네 이모가 왔다.”

“네?”

나는 재빨리 날짜를 따져보았다. 확실히 이모가 석방될 때가 되기는 했다.

“이모가, 로저를 찾아왔다고요?”

“경찰서에서 전화가 와서 내가 집으로 오라고 했어.”

이모는 형편없는 몰골을 해가지고 로저의 집에 왔다고 한다. 원래 덩치가 좀 큰 편이었는데, 이제 비쩍 말랐고 노인처럼 턱을 떤다고 했다. 감옥살이가 고생스럽기는 했던 모양이다.

“또 협박하던가요?”

내 질문에 로저가 고개를 저었다.

“준이만 데려가게 해달라고 하더라.”

루나가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얼마 전에도 전화해서 은별이와 로저한테 으름장을 놨잖아요.”

“나도 처음에는 연극인가 했는데 아니더라고. 말로 강짜 놓는 게 습관인 사람이었어. 설사 지금 상태로는 나쁜 마음을 먹는다 해도 저지를 여건도 못 되는 것 같고. 아무튼 제 자식 보고 싶어 하는 건 진심이었어.”

가차 없이 리딩을 하고 다니는 로저의 말이니 믿을 만했다.

로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문득 문 쪽을 보았다. 어느새 와있었는지 준이가 멍한 얼굴로 문간에 서 있었다.

“준아.”

모두 준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손을 내밀자 준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엄마 만나서 좋았어?”

내 질문에 준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큼지막한 눈에 두려운 빛이 어렸다. 모두 준이를 주시하는 가운데 엘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 엄마잖아요. 돌려보내야죠. 로저가 아이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도박쟁이에 사기 미수범, 납치범의 아내라지만 부모는 부모였다. 자기 자식을 데려가겠다는데 말릴 권리는 없었다. 게다가 나와는 사정이 달랐다. 이모와 이모부는 나한테 했던 것처럼 범죄라 할 정도로 준이를 때리지는 않았다. 준이가 자꾸 울면 엉덩이나 등짝을 때리는 정도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 준이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형아. 준이, 아저씨랑 살면 안 돼?”

그 말에 단번에 촉촉해진 눈으로 루나가 로저를 돌아보았다.

“로저는요? 준이, 보내고 싶으세요?”

모두의 시선이 로저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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