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76화 (76/103)

<76화>

인생이라는 소설에는 장르가 정해지지 않는 걸까요?

요즘 로저 드뷔라는 사람의 인생 장르는 에세이 정도에서 느와르로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준이를 떠나보낸 후 로저는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어하고 있어요. 사실 힘들어한다는 표현이 약하게 느껴질 정도지요.

“로저. 저녁에 칼국수 할 건데 와서 같이 드세요.”

- 아아, 고맙지만….

“바지락이랑 왕새우 넣고 해물 칼국수 하려고요. 국수도 직접 밀어서 할 거예요. 로저, 그거 엄청 좋아하시죠?”

- 고맙지만 루나, 오늘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먹은 걸로 치겠네. 고마워.

“로, 로, 로….”

전화가 끊겼네요.

“후유….”

“안 오신대?”

설거지하던 은별이가 물었어요.

손님이 다소 뜸한 시간의 루나커피랍니다. 한가한 시간에는 부족한 재료를 준비하기 때문에 원두도 이 시간에 볶아서 갈아둡니다. 가게에 향긋한 커피 향이 가득해졌어요. 갓 볶은 원두 향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어떻게든 로저를 꼬셔서 데려오려 했는데 영 먹히지 않네요. 이런 식으로 미끼를 던져 로저를 꾀어내려다 실패하는 일이 며칠간 계속되고 있어요.

“저녁에 마무리할 일 좋아하네. 요즘 글도 안 쓰는 것 같던데.”

“야옹, 무려 해물 칼국수를 거절했단 말이냐?”

“그러니까요. 로저는 해산물이랑 국수 요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쫄쫄 굶고 술만 마시나 봐.”

은별이가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다정한 녀석. 말은 틱틱거려도 저는 은별이가 얼마나 자상한 아이인지 잘 안답니다. 로저를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걱정은 저보다 더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그나저나 이 아저씨를 어떻게 하지?”

갈피를 못 잡는다고 해야 할까요, 프리드리히 니체 뺨치게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로저였는데 요 며칠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거나 점심때가 지나서야 일어나곤 한답니다. 그전까지 그는 단 하루도 오전 6시를 넘겨 일어나거나 자정을 넘겨 잠드는 일이 없었어요.

술을 퍼마신다고요? 그건 특히나 로저가 극혐하는 일 중 하나였어요. 그는 애주가라서 매일 와인을 마시지만, 흥청망청 퍼마시다 취하는 게 아니라 좋은 음식과 함께 즐기는 쪽이죠.

그런데 요즘은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반나절 동안 술을 퍼마시다가 필립에게 들킨 게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저녁 6시에 포차가 문을 열면 그리로 출근해 새벽 2시 문 닫을 때 퇴근한대요. 그 바람에 열 개 모이면 한 번씩 공짜로 준다는 쿠폰으로 ‘고급’ 모듬 안주를 벌써 세 번이나 챙겨 드셨다고 하네요.

로저가 그 정도로 괴로워할 줄은, 우리는 물론이고 로저 자신도 미처 몰랐을 거예요. 아치볼트의 말마따나 정이 단단히 들었던 모양이에요.

저도 그렇지만 은별이가 로저 걱정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답니다. 은별이는 자기가 준이를 떠넘겨서 결과적으로 로저를 힘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전화 왔어.”

카운터의 전화가 울렸어요.

“일상의 달콤함을 드리는 루나커피입니다. 네? 출판사요? 로저 드뷔 씨가 여기에 있느냐고요?”

- 네에. 느닷없이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작가님께서 루나커피 얘기를 자주 하셔서 혹시나 해서요. 마감 날짜가 보름도 더 지났는데 연락이 되지 않네요. 메일도 확인을 안 하셔서 댁에 찾아가봤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요.

“저런! 요즘 로저한테 안 좋은 일이 있기는 하지만…. 아뇨, 건강 문제는 아니에요. 아니, 아주 아닌 건 아닌가? 술을 그렇게 퍼마시면 건강도, 아니아니, 늘 퍼마시는 건 아니고요, 요 며칠 매일 퍼마시기는 하지만요. 아무튼 제가 출판사로 전화하라고 말씀 전할게요. 네네. 감사, 아니 죄송, 아니 안녕히 계세요.”

“출판사야?”

은별이가 걱정스럽게 물었어요.

“응. 오죽 연락이 안 되면 우리한테 전화를 했겠니. 이 양반이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이거 다 하고 내가 가볼게.”

제 생각에도 지금 로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은별이뿐인 것 같았어요. 준이가 떠난 후로 루나커피에도 잘 오지 않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저가 저나 필립에게는 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는 뜻 아니겠어요?

“은별이, 공부는?”

은별이가 어깨를 으쓱해보였어요.

“체고 갈 정도는 하고 있어. 잠깐 로저한테 다녀온다고 성적 안 떨어져.”

은별이 성적은 학교에서 딱 중간이랍니다. 진득하게 앉아 공부하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농구 선수가 꿈이라니 우등생의 성적까지는 욕심낼 필요 없는 거죠. 물론 잘하면 좋기는 하지만 아무렴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른답니다.

“좋아. 로저 잘 위로해주고, 가능하면 여기로 모시고 와. 같이 저녁 먹게.”

“알았어.”

“야옹, 나도-”

저는 재빨리 필립의 꼬리를 잡았어요.

“아빠는 여기 있어요. 오늘은 은별이랑 로저 단둘이 얘기 나누게요.”

“야옹?”

“준이는 은별이 동생이잖아요. 은별이 때문에 로저가 준이를 맡았고요. 그러니 은별이와 풀어야 할 부분도 있을 거예요.”

은별이가 앞치마를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맞아. 아저씨한테 한 번은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었어.”

“아니, 사과까지는 아니고. 오해하지 마, 은별아. 네 입장에서는 그럴 것 같다는 거지.”

은별이가 빙그레 웃어주네요. 저 웃음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걸 은별이도 아는 걸까요? 제 마음이 불안하거나 갈팡질팡할 때면 은별이는 늘 저렇게 웃어준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다녀올게.”

“그래.”

저는 은별이가 가게를 나가 큰길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어요.

그나저나 준이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며칠 전에도 봤지만 한 번 더 체크해봐야겠어요. 물론 로저가 잘하고 있겠지만요.

한가해진 틈에 알바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사무실로 들어와 좌표를 띄워 봤어요.

이 시간에 준이는 어린이집에 있어요. 어디 맞은 얼굴은 아니네요. 옷차림도 말끔하고요. 친구들과 좌탁에 둘러앉아 낱말카드를 들었다 놨다 하는 걸로 보아 영어 공부를 하는 것 같았어요. 간간이 친구들과 웃기도 하는 게 며칠 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아요. 아이들은 뭐든 금방 동화되지요. 어쩌면 준이는 벌써 우리와 지냈던 시간을 잊었는지도 몰라요.

“준이는 괜찮아보이는데 로저가 문제네요.”

“야옹, 어디서 업둥이라도 안 들어오나?”

“말 같지 않은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아무튼 고지식한 사람들이 늦바람 들면 더 무섭다니까.”

“이게 늦바람이랑 무슨 상관있어요?”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네 탓이다.”

“네에?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필립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은근 기대 되냐고요? 정답. 하도 엉뚱한 말을 해대니 이제 엉뚱하지 않으면 실망스럽지 뭐예요.

“로저가 너를 짝사랑하는 마음까지 아이한테 쏟아부은 거야. 자기도 모르게 아이한테 정을 너무 많이 붙여버린 거라고.”

“그, 그게 무슨 소리죠?”

“야옹, 설마 로저가 줄곧 너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걸 아직도 모른 척할 셈이냐?”

허! 기가 막히네요. 모른 척이라니….

“모른 척이라뇨. 금시초문인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요?”

“진짜 몰랐어?”

“당연히 몰랐죠! 저랑 로저는 무려 300살 넘게 차이가 나잖아요!”

“야옹, 또 시작이다.”

“게다가 우린 둘 다 남자라고요!”

“야옹-”

저는 팔팔 뛰었어요. 물론 이건 내숭이에요.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내숭은 이럴 때 떨라고 있는 거잖아요.

저는 로저를 좋아한답니다. 친구로서 말이죠. 연애 감정으로 소중한 우정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뿐이에요.

“그래서 넌 로저한테 전혀 마음이 없다는 거지?”

“당연하죠! 로저는 좋은 친구예요.”

필립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꼬리를 살살 흔들었어요.

“야옹, 다행이네. 난 또 네가 은별이 두고 딴 마음 먹으면 곤란하지 싶어서.”

“당연히 곤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예요!”

“로저가 안 됐기는 하지만 그래도 네게는 운명이 정해준 배필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은별이 자라는 만큼 로저도 천천히 마음 정리하는 게 맞으니까.”

“아빠!”

“야옹, 나는 라라랑 미오나 보러 가야겠다.”

“차 조심하세요.”

“누굴 어린애로 아냐?”

“근데 아빠.”

“야옹?”

“아빠는 왜 운명을 그렇게까지 믿는 거예요?”

필립이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응시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왜 여태 그걸 궁금해하지 않았는지 이상했어요.

“그렇잖아요. 아빠가 운명을 믿을 사람이 아닌데. 그런 건 아빠 스타일 아니지 않아요?”

“사람은 모순의 동물이다. 뜻밖의 길에서 뜻밖의 나를 만나는 게 인생이지.”

“제법 심오하긴 한데,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잖아요.”

“야옹, 아니긴.”

필립은 야옹거리며 사무실을 나갔어요. 그가 남긴 잔상을 별 의미 없이 응시하며 후우, 한숨을 쉬었어요.

운명이 정해준 배필.

저야말로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인데 말이죠. 요즘은 그 운명이란 것이야말로 배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해요.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로 다가와 가장 큰 아픔을 던져주는 배신자 말이죠. 누군가 사랑한다는 건 좋은 일인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사랑 자체가 절망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사랑이란 남의 것을 구경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말이죠. 본인의 일이 된다면 힘들 거예요.

그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앞치마 주머니에서 벨이 울렸어요. 미오와 라라를 돌보는 동물병원이네요.

“여보세요, 우월영입니다.”

- 안녕하세요, 여기 와우바우 동물병원인데요.

“네네. 네…?”

금방 제가 한 생각은 예견 같은 것일까요? 사랑이 절망이 된다는 거 말이에요. 제발 아니길 빌어요.

“지, 지금 갈게요.”

저는 앞치마를 벗어던졌어요. 마침맞게 알바생이 가게로 들어왔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가게를 팽개친 채 뛰어나갈 뻔했어요. 알바생에게 가게를 부탁하고는 서둘러 나가자 필립은 어슬렁거리며 교차로를 건너고 있었어요. 막 신호가 바뀌려는 중이었어요.

저는 쏜살같이 교차로를 건넜어요. 그리고 필립을 안아 들고 냅다 뛰었어요.

“야옹! 왜 이래?”

“아빠, 라라가….”

“라라가 왜?”

“위독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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