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루나 블랑슈와 정은별.
나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그게 전부인데, 루나커피에서 한 발짝만 나와도 온갖 명칭이 다 들러붙는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도….
“미성년자는 못 들어와.”
빌어먹을 미성년자다. 포장마차 주인아저씨가 입구를 막아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비좁은 가게 안에는 단 한 사람만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기 삼촌이 있어서 그래요.”
주인아저씨는 내가 가리킨 쪽을 돌아보았다. 단 한 명의 손님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저 외국 양반이 네 삼촌이라고?”
“아니, 그렇게 부른다고요.”
“그럼 의자에 앉으면 안 돼. 깨워서 얼른 모시고 나가.”
“알겠습니다.”
이제 막 문을 열었는데 이렇게 떡이 되다니 대체 얼마나 부지런히 마신 거야.
아닌 게 아니라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이 세 개나 있었다. 자릿값인 모양인지 안주는 다양하게 시켜놨는데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로저 아저씨.”
어깨를 흔들어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기에 등짝을 쳐보았다.
“아저씨! 좀 일어나요!”
“으응….”
로저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엄청난 술 냄새가 풍겼다. 게슴츠레한 눈을 깜빡이며 그가 어눌한 투로 중얼거렸다.
“어어… 이게 누구야. 은별이구나.”
“어서 일어나요.”
“왜, 너도 앉아. 한잔하자.”
“진짜요?”
아싸, 이게 웬 떡이냐? 무심코 앉으려는데 가차 없이 주인아저씨의 호통이 날아왔다.
“학생! 빨리 나가. 잘못하면 가게 문 닫아야 해!”
“아, 넵!”
그새 로저는 테이블에 도로 코를 박았다. 젠장, 할 수 없지. 나는 각오 삼아 손바닥을 한번 비빈 다음 로저의 팔을 잡아 어깨에 척 떠멨다. 아 씨, 그렇잖아도 밉상인데 무지 무거웠다.
“우리 은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커가지고 아즈씨를 부축하고 말이지…. 흐흐….”
“어유, 술 냄새 쩔거든요. 빨리 가서 양치하세요.”
“흐흐…. 이왕 클 거면 확 크지, 이럴 때 같이 한잔하면 좋잖아.”
“그러게요.”
로저는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빈자리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업어야 하나?
“할 수 없지. 사장님. 조금만 도와주실래요?”
주인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겨우 로저를 등에 업었다.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듯 가게 밖까지 안내해주었다.
“학생 혼자 괜찮겠어?”
“네. 감사합니다.”
나 역시 안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럭저럭 걸을 만했다. 그런데 고작 30미터 걷고 났더니 땀이 비 오듯 흘러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헉헉, 씨발….”
대문에서 현관까지 구만리는 되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판이었지만 엄청난 정신력으로 거실까지 돌진, 마침내 소파에 다다라 그를 집어던졌다. 그제야 로저가 크억,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아저씨!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로저가 실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은별이네.”
“일부러 자는 척했죠?”
“내가 언제 잤어?”
“젠장.”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탄산수 두 병을 꺼내가지고 돌아왔다. 하나를 로저에게 던져준 후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로저는 누운 채 음료수를 들이켜다가 절반은 쏟았는데, 그게 엄청 재미있는지 킬킬거리고 웃어댔다. 그리고는 이내 시무룩해져서는 팔을 눈두덩 위에 올려놓았다.
“망할 자식.”
나는 남은 음료를 들이켠 후 언제든 하려던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런데 아저씨. 실연당했어요?”
로저가 팔을 들고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탄산수 병을 내게 던졌다. 나는 병을 턱 잡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로저는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버릇없는 놈.”
“꼭 실연당한 사람 같아서 그래요. 준이가 그렇게 좋아요?”
“말 같지 않은 말 하려거든 가.”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울적한 얼굴을 해보였다.
“잘못했어요. 저는 그냥, 아저씨 재밌으라고.”
“퍽이나 재미도 있겠다.”
“출판사에서 루나커피로 전화가 왔어요. 아저씨가 메일도 안 보고 연락도 안 된다고. 이제 글도 안 쓸 거예요?”
“써. 쓸 거야.”
“마감인가 뭔가는 지키셔야죠.”
“나 아니라도 소설 쓰는 인간 많아.”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저씨 소설은 오로지 아저씨만 쓸 수 있잖아요.”
“준이가 내 소설을 읽고 있더라.”
“네에?”
내가 알기로 로저의 소설은 19금이었다. 읽어봤냐고? 당연히 읽었다. 이건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지만 이선호 누나의 계정으로 읽었다. 이선호가 먼저 누나 몰래 범죄(?)를 저지른 거였고 나는 그저, 음… 은닉? 아무튼 그냥 묻어간 것뿐이었다.
녀석이 누나의 취향을 좀 훔쳐보자며 나를 끌어들인 건데, 문득 생각이 나서 로저 드뷔라는 사람의 소설도 있느냐고 물었다. 녀석은 검색해보더니 로저 드뷔는 없고 로저 래빗은 있다고 했다. 딱 보니까 로저의 소설이었다. ‘모나커피의 로망스’라는 제목도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못 썼나 딱 한 권만 읽어보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마음에 쏙 들었다. 성격으로 봐서 로저가 그런 소설을 쓸 줄은 몰랐는데 제대로 반전이랄까. 읽다가 찜찜한 점은, 혹여 루나를 상상하며 야한 장면을 쓴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간간이 눈에 띈다는 거였다.
“젖먹이한테 그 야한 소설을 읽게 하면 어떡해요?”
로저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때는 늦었다.
“너도 읽었어?”
“아, 아뇨. 다, 당연히 BL 소설이면 야할 거라고….”
로저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읽었구만.”
“또 제 생각 읽었어요?”
“그 정도는 리딩 안 해도 알아. 너 거짓말할 때 말 더듬잖아. 루나처럼.”
“젠장.”
“준이가 글을 쓰고 싶대.”
“어유, 눈곱만한 게 야설을 쓰겠다는 거예요?”
“아, 아니, 그냥 글.”
“쓸 거면 아름다운 그림책을 쓰면 좋겠어요.”
로저가 심드렁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
“너 그거 편견이야.”
“그게 왜 편견이에요? 눈곱만한 준이가 그림책을 쓰면 좋겠다는 건데.”
“준이가 눈곱만할 때 글을 쓰겠니? 성인이 되어서 쓰는 거지.”
“그럼 나중에 조수로 받아 주시든지요.”
그 말에 로저가 나를 힐긋 보았다.
“나중에…?”
“나중에 크면요. 살아있다면 만날 수 있잖아요.”
내 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로저가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난 언제든 플럼버로 갈 사람인데 그럴 일은 없지.”
“그럼 플럼버로 가시면 거기서 다른 애를 키우시든지요.”
“됐다. 그냥 좀… 당황스러운 것뿐이야. 난 평생 가족이 없었으니 누군가와 생활한 게 처음이라서.”
“평생이요? 낳아준 부모님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 난 정부 기관 프로젝트로 시험관에서 태어났거든.”
그건 뜻밖의 말이었다.
“그게 뭐예요?”
“플럼버는 가끔씩 극심한 인구 부족 사태를 겪거든. 그때마다 정부에서 그런 일을 해.”
나는 처음으로 플럼버라는 곳이 과연 천국일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회원들이 플럼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섣불리 입에 담지는 않았다.
“몰랐어요.”
“당연히 넌 모르겠지.”
“아무튼 힘내세요. 아저씨도 봤겠지만 준이는 씩씩하게 잘 있어요. 아저씨도 얼른 아저씨 생활로 돌아오셔야죠.”
“그럴 거야, 걱정 마.”
“언제부터 그럴 건데요?”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해?”
“루나가 걱정하니까요.”
로저가 잘생긴 미간을 좁히며 또 한 번 내 눈치를 살폈다.
“루나가, 정말로 내 걱정을 해?”
나는 그 표정과 질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툴툴거릴 입장은 아니라서 한 번만 참아주기로 했다.
“네. 뭐로 꼬셔야 아저씨가 루나커피로 오시려나 매일 궁리한다구요.”
그 말에 게슴츠레하던 로저의 눈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순간 나는 그를 위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까먹고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떼면 하려고 했던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저씨. 루나 좋아하지 마세요.”
그러자 웃음소리가 스러지고 로저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 얼굴은 누구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신뢰감이 팍팍 가는, 기묘하게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루나는 아저씨를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 친구처럼, 혹은 형이나 삼촌처럼요.”
나를 물끄러미 보는 로저의 눈빛에 슬픔이 어렸다.
“네가 네이밍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걸 루나도 아니?”
“그런 걸 나한테 묻는 거예요?”
“솔직히, 그 부분은 루나에게서 잘 읽히지 않더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알아요. 얼마 전에 내가 말해줬거든요.”
“너는 어떻게 알았어?”
“필립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로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립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네. 아주 잘 들려요. 그건 리딩이 안 되던가요?”
“헐…!”
안 되는 모양이었다.
“리딩이라는 거 완벽하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엉성한 기술이네요.”
나는 키들거렸지만 로저는 웃지 않았다.
“너. 날 위로하러 온 거야, 약 올리러 온 거야?”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준이 일은 죄송해요. 아저씨가 준이를 그렇게 좋아해주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고맙기도 하고요. 결과적으로 아저씨 힘들게 한 건 마찬가지가 되었지만요. 하지만….”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로저가 나를 응시했다.
“준이 때문에 모르던 걸 알게 되셨잖아요.”
“뭘?”
“아저씨는 아이를 아주 좋아하신다는 거요.”
“그게 뭐?”
나는 조금 능글맞은 얼굴로 눈을 찡긋해보였다.
“루나 말고 좋은 사람 만나서 아이를 낳으세요.”
“이놈의 자식이-”
로저가 쿠션을 던졌다. 그걸 텅 쳐내는데 엉덩이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 굳은 표정을 로저가 미심쩍게 응시했다.
“루나가, 병원에….”
우리는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시 후 우리는 단거리 경주 선수들처럼 질세라 골목을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