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80화 (80/103)

<80화>

루나 블랑슈는 원래 친화력이 좋은 편이랍니다.

할머니는 제가 수선스럽지 않으면서 물 흐르듯 분위기를 탈 줄 알고,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동시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하는 언변술을 가졌다고 하셨어요. 저의 그런 점을 할머니는 무척 좋아하셨죠. 친구들이나 손님들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로저는 저에게 무척 솔직하다고 말하고는 해요. 그게 제 매력이라고 했어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지만 저 스스로도 그게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지되었으면 했죠.

그런데 요즘 저는 제 고유의 본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야옹, 왜 혼자 고독을 씹고 있냐?”

“아빠. 종일 어딜 쏘다니다 들어오시는 거예요?”

필립은 제가 앉아있는 벤치로 폴짝 뛰어올랐어요. 저는 지금 뒷마당 정자에 있어요. 바람이 그새 선선하네요. 은별이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겨울이 온 것 같아요. 아직 계절은 가을인데 말이죠.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 미오랑 블링 돌보느라 종일 보모가 따로 없다고.”

미오야말로 캐붕이라고 하나, 라라를 떠나보낸 후 성격이 달라졌어요.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우리 미오가 바로 우울증 환자가 되었답니다. 짐작한 일이기는 했어요. 라라와 금슬이 너무 좋았으니까요.

슬퍼하는 미오를 지켜보는 우리도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미오를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어요. 특히 형제들이 미오를 잘 보듬어줬답니다. 무엇보다 블링과 라미 때문에라도 미오는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스스로 안간힘을 썼어요. 아버지랍시고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하지 뭐예요. 다행히도 그렇게 위기는 넘길 수 있었어요.

아! 라미는 블링의 동생, 그러니까 라라가 남기곤 간 새끼랍니다. 새하얀 털에 연한 회색 줄무늬가 있는 암컷이에요. 아주 귀엽고 착한 아이라서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요. 특히 블링이 무척 귀여워한답니다. 라미가 태어나기 전 블링은 자기밖에 모르는 개구쟁이였는데, 이제는 듬직한 오빠로서 늘 라미의 수호천사 노릇을 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배리가 누굴 만나는 것 같아.”

“뭐…. 배리는 이제 그럴 만한 나이죠.”

“그럴 만한 나이가 지났지.”

필립 말이 맞아요. 이제 우리 집에 남은 제 이복동생은 미오와 배리 뿐이에요. 나나와 뭉크는 2년 전에 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각자 남의 집 며느리와 데릴사위가 되었어요.

나나는 혼자 사는 할머니네 집 얼룩 고양이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할머니가 대전으로 이사 가시는 바람에 같이 보내게 됐어요. 나나가 낳은 아이들이 벌써 넷이나 된답니다. 뭉크도 비슷한 이유로 떠나보냈어요. 지금 뭉크는 세 아이의 아버지랍니다.

두 아이가 출가할 때 우리는 가족회의를 했어요. 만약 플럼버로 돌아가게 되면 출가한 아이들을 데려가야 하는가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죠. 두 아이는 함께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나 수년 후에 새끼들이 태어나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지겠죠. 결국 마땅한 결론을 내지 못했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건가 봐요. 마땅한 결론을 내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 말이에요.

아무튼 지금 우리 집에 출가하지 않은 고양이는 배리뿐이에요. 배리와 미오는 유달리 사이가 좋답니다. 그래서인지 미오의 슬픔이 배리에게까지 상처가 된 것 같았어요. 때문에 제 짝을 쉽게 만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 아이가 드디어 사귀는 고양이가 생겼다니 좋은 일이에요. 물론 좋은 일이지만…. 제 마음은 조금 쓸쓸하네요.

“하나둘 제 곁을 떠나는 기분이에요.”

“무슨 말이야. 여전히 우리 집은 북적거리는 편이야.”

“아빠는 제 곁에 오래 계실 거죠?”

“야옹, 네가 웬일이냐?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더니만.”

“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취소예요.”

“야옹.”

아주 그냥 일관성 있게 가벼운 아빠예요.

“달은 늘 변함이 없네요.”

“어떤 달? 지구의 달은 매일 변해.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는 저게 진짜야.”

“저에게 달은 늘 플럼버의 달이에요.”

“야옹, 낮에 여학생 부대가 다녀간 후부터 네 얼굴색이 똥색이 됐다.”

헐! 또 당했어요. 필립의 주특기, 느닷없는 훅 말이에요.

“무, 무슨 말이에요. 은별이 좋다고 와준 아이들인데 기쁘고 고맙죠.”

“너 예전에 은별이랑 붙어 다니던 개나리라는 여자애 볼 때도 얼굴이 똥색이었어.”

“말도 안 되는 말을! 또 무슨 억지를 쓰는 거예요! 그때 은별이는 중학생이었어요”

“그니까, 그 애가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강남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은별이랑 헤어진다고 울고불고하던 날 생각나냐?”

당연히 생각나죠. 그날 저는 루나커피로 아이들을 초대해 나리의 송별회를 해줬어요. 나리가 좋아하던 딸기 크림 케이크에 초도 꽂아주었죠. 그때 나리가 은별이를 얼싸안고 고백 비슷한 걸 했답니다.

“나 잊어버리면 안 돼. 나 은별이 너 좋아해, 알지?”

그때 은별이는….

“나 좋아하지 마. 다쳐.”

훗, 웃으면 안 되지만 웃어버렸어요. 드라마에 나온 대사잖아요.

“너 그때 그 말 듣고 엄청 좋아했잖아.”

“뭐라고요? 그때 은별이가 한 대답을 듣고 웃은 사람이 저 하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아빠도 웃었잖아요.”

“그냥 웃은 거랑 다르다고. 아주 그냥 얼굴에 화색이 돌더만.”

“아니라니까요. 왜 억지를 쓰고 그래요?”

“야옹.”

“여기서 뭐 해, 안 추워?”

“흐억!”

깜짝이야! 은별이가 바로 옆에 서 있었어요.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다 들었을까요? 싱글거리는 얼굴이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필립 말을 알아들으니 말조심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제법 어른스러운 척하는 저 얼굴이라니, 이제 저보다 키도 훨씬 커가지고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니까요.

“어…?”

은별이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것을 촥 펼쳤어요. 작은 모포네요. 그걸 제 어깨에 둘러주네요. 칫….

“야옹. 은별이가 정말 많이 컸네. 남자 티가 물씬….”

“시끄러워요.”

은별이가 추리닝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제 옆에 앉았어요. 다리까지 꼬는 게 제법이에요.

“야옹, 그럼 너흰 달밤에 데이트해라. 난 눈치 쩌는 인간이니까 피해주마.”

쳇, 곧 죽어도 인간이래. 야옹이네요.

“필립, 안녕히 주무세요.”

“야옹-”

필립이 외벽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어요. 저는 좀 민망해서 은별이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왜 나왔어? 안 피곤해?”

“뭐 했다고 피곤해.”

“학교 다니느라 피곤하지. 가게 일도 거들잖아.”

“형.”

“응…?”

“나 임혜리 안 좋아해.”

저도 모르게 은별이를 돌아봤어요. 은별이가 저를 빤히 보고 있었어요.

“무, 무슨…. 친구…잖아. 좋아하니까… 그, 뭐냐, 친구지. 그, 그리고 내가 뭐라고 했어?”

웃음을 참는 것처럼 은별이의 입술이 조금 비틀렸어요.

“걔 오늘 처음 봤거든. 그리고 임혜리는 나보다 형한테 더 관심이 많던데.”

“됐어. 낮에도 여학생 여섯 명이 찾아와서는 정은별 팬이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은별이는 이제 노골적으로 웃었어요. 저는 좀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말해버리고 말았어요.

“자식이, 좀 컸다고 지금 형 앞에서 카리스마 부리니?”

“누가, 내가?”

“누가 형 앞에서 다리 꼬고 앉으래?”

“왜 갑자기 분위기 조선 시대야?”

“시끄러.”

저는 샐쭉해져서 고개를 돌렸고 은별이는 계속 키들거렸어요.

“형이 질투하니까 엄청 좋네.”

“뭔 소리야! 형이 뭘 질투해?”

녀석이…. 갑자기 정색하고 저를 돌아봤어요.

“왜, 왜…?”

“형도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말해주는 게 예의인 것 같아.”

“뭘…?”

“내 눈에 예쁜 사람은 형밖에 없어.”

제, 제, 제가 뭘 잘못 들었나요? 아마 그 순간 제 눈은 보름달만 했을 거예요.

“너… 너…?”

“다른 사람들 눈에도 형이 예쁘긴 하겠지만 그건 소용없어. 알지?”

“뭐, 뭘 알아?”

“형은 내 거고, 나는 형 거라는 거.”

“헐!”

“헐은 무슨.”

이 엉큼한 녀석을, 어떡하죠? 아무튼 그냥 두면 안 되죠!

“너 이리 와.”

“컥!”

저는 좀 이성을 잃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두 손이 은별이 목을 잡고 흔들고 있었어요. 정신 차렸다고 해서 놔줄 마음은 없네요.

“너 이 녀석, 그게 무슨 말이야? 엉?”

“컥, 혀엉….”

“그 눈은 뭐야? 가운데로 모으지 말고 제대로 떠!”

“숨 막….”

은별이 혀를 빼무는 걸 보고 나서야 저는 목을 놓아줬어요.

“컥컥, 죽을 뻔했잖아.”

“자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딜 감히 기어오르려고.”

“아직도 연상녀가 취향인 건 아니지?”

“뭐라고?”

“엄마 같고 누나 같은 여자가 취향이었다며. 지금은 아니지?”

“왜,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

허? 이 자식이. 저는 괜스레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어요. 은별이 이 자식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싱글거리기만 하네요. 아, 기분 더러워.

“이제 형은 정은별이 취향이잖아.”

제가 귓구멍을 너무 오래 안 팠던가요? 제가 제대로 말귀를 알아먹은 건 아닐 거예요. 은별이가 이렇게까지 막돼먹은 아이는 아니거든요.

“정은별,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거야?”

어느새 은별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어요. 저도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그게, 침착성을 되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농담처럼 화를 낼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뿐이에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요. 아니, 언제부터 알았을까요? 아니, 저는 지금 뭣 때문에 들킨 기분일까요?

“은별이 너…?”

“루나 블랑슈는 정은별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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