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무슨 생각 말씀입니까?”
로저가 싸늘한 얼굴로 물었어요. 우리는 다소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었어요. 로저와 내가 나란히, 맞은편에는 손님이 앉았어요. 필립이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렸어요.
워튼 씨가 체포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어요. 그 일 때문에 우리는 울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은별이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이라 다행이에요. 요즘 은별이 얼굴에도 부쩍 수심이 가득해졌거든요. 오늘 겨우 깁스를 풀었으니 팔이 회복되면 좀 나아지려나요.
그나저나 이 손님, 그동안 우리가 뿔테안경이라 부르던 사람이에요.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 키와 체격도 중간. 세모꼴 얼굴에 코는 길고 광대가 솟은 편인데 안경의 도수가 하도 높아서 눈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웠어요. 전체적인 인상은, 평범한 공무원처럼 보였어요.
우리는 기분이 무척 상했어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주변을 맴돌며 엿보고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불쾌하고 소름 끼쳤어요.
오늘 그는 거의 1년 만에 나타나 커피를 주문하고는 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어요. 그러다 손님이 뜸해지자 카운터로 와 대뜸 제게 말을 건넸어요.
“잠깐 얘기 좀 나누시죠. 다 함께.”
저는 미간을 바짝 좁히고 물었어요.
“다, 함께?”
“로저 드뷔 씨와 에릭 블레어, 아치볼트 셀던, 엘리아 폭스 씨요.”
저는 말문이 막혀 반문조차 하지 못했어요. 우리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실종된 조르주와 체포된 워튼 씨의 이름은 뺐다는 게 더 기막혔어요.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말이니까요.
저는 그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로저를 불렀어요. 로저까지 도착하자 브라이언이 자신의 명함을 내보였어요.
브라이언 킴 Manager
Alien Laboratory Korea branch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함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어요. 브라이언이 커피 한 모금을 후룩거리고는 말했어요.
“다른 분들은요?”
“그쪽이 소집하면 눈썹 휘날리며 모여들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 아닙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요.”
로저의 대답에 브라이언은 보일 듯 말듯 웃었어요.
“저희에게 협조해주시면 여러분들을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로저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어요.
“저희는 보호가 필요한 어린애가 아닙니다만.”
“아뇨. 여러분들은 어린애들보다 더 보호가 필요합니다.”
“무슨 헛소립니까?”
“외계인 연구소는 인류를 위한 기관입니다.”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네요.
이제 와 이러는 이유가 뭔지 몹시 궁금해졌어요. 로저도 마찬가지였는지 추궁하듯 물었어요.
“무슨 뜻입니까?”
“인류를 위한다는 말에는 언제나 개인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저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제 말에 브라이언이 저를 쳐다봤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어요.
“그럴 리가요.”
이번에는 로저가 물었어요.
“그래서 무슨 협조를 원하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지구인들은 외계인의 뛰어난 능력을 닮고 싶어 합니다. 수십 년간 연구한 결과 당신들은 우리와 외모뿐 아니라 신체 기관 등도 흡사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구의 인간들도 당신들을 얼마든지 닮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귀를 의심했어요.
“잠깐만요. 지금 수십 년이라고 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다른 경로로 지구에 왔더군요. 이 커피숍이 가장 최근에 나타났는데, 그 후로 모임 장소를 이곳으로 정하셨고요.”
“점점 더 불쾌해지려고 하니 빨리 말씀하시죠.”
로저의 말이었어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격앙된 것이 그도 몹시 화가 나 있음을 알 수 있었어요. 그에 비해 브라이언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요.
“저희는 호의를 가지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구인의 대부분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정한 센터에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그 간격이 지구인보다 다소 짧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로저와 저는 기가 막혀서 서로를 쳐다봤어요. 로저가 말했어요.
“우리를, 실험대상으로 삼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위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약속드리죠.”
“그걸 어떻게 믿죠?”
브라이언이 저를 쳐다봤어요. 순간 그가 과연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어요. 어쩌면 이렇게 표정이 없을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에게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쁜 짓을 저지를 의도가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요청을 드릴 필요도 없었겠죠.”
저는 비웃음을 참기 어려웠어요.
“그건 또 다른 협박으로 들리는데요.”
“부디 인류애를 발휘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류애라니, 무슨 뜻으로 자꾸 그 말을 하시는 건데요?”
제가 흥분하자 로저가 제 팔을 잡았어요. 그리고 대신 질문했어요.
“당신들이 좌표를 교란한 겁니까?”
“우리는 그저 실험을 해봤을 뿐입니다.”
“조르주는 어디 있죠?”
그 말에는 브라이언도 즉답하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로저와 저를 빤히 쳐다봤어요. 그건 무슨 뜻일까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도 찾고 있습니다.”
“찾고 있다고요?”
저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어요.
“조르주가 사라진 것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는 여러분들의 향방을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법에 호소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잡고, 이런 식으로 사생활 침해를 자행하셔도 되는 건가요?”
이번에도 로저가 제 팔을 잡았어요. 저는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뿌리쳤어요.
“왜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을 죄인 취급, 아니.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거잖아요. 염탐하고 감시하고, 그리고 이렇게 당당하게 나타나 협박하고요. 참! 우리 고양이를 납치한 적도 있죠. 당신, 그거 범죄예요!”
이번에도 브라이언이 보일 듯 말듯 웃었어요.
“그럼 작은 청을 먼저 드리죠. 여러분들이 의심스러워하시니 일단 고양이들을 먼저 넘겨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뭐, 뭐라고요?”
“당신네 행성의 고양이들만 넘겨주시면 됩니다. 최근에 잡종이 태어난 걸로 아는데 그건….”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따져 물었어요.
“무슨 권리로 우리 고양이들을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뭔데 내 동…!”
로저가 서둘러 제 입을 막았어요.
“쉿, 루나.”
손님들이 힐금거리고 있었어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티가 역력했어요.
“흥분하지 말게.”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며 저는 발치를 어슬렁거리는 필립에게 들어가라고 눈짓을 했어요. 그동안 로저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어요.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집 고양이들은 저희에게 그냥 고양이가 아닙니다. 지구인들의 기준보다도 더 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 부분은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그건 몰랐다는 티를 내려는 걸까요? 별걸 다 파악하고 있는데 그걸 모른다니 믿기지 않았어요.
“우리에게도 스스로를 보호할 만한 장치가 필요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으니까요.”
“리딩이 안 되십니까?”
로저의 눈썹이 쓰윽 올라갔어요.
“거기까지 알고 계시니 저도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당신, 잠금장치가 되어있는데. 플럼버에서 왔소?”
“아닙니다. 당신들 행성의 이름이 플럼버입니까?”
우리 별 이름을 몰랐던 걸까요? 당연히 알 만한 걸 모른다니 그게 더 신기하네요. 로저가 물었어요.
“워튼 씨는 어떻게 됩니까? 그가 체포된 것도 당신들과 상관있는 겁니까?”
“내일 오전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가족?”
“최근에 새 가족이 생기셨던데요. 노부인과 그분이 기르는 커다란 개 말입니다.”
엄청난 정보력에 좌절감까지 드네요. 우리는 그동안 덫에 갇힌 채 바보처럼 희희낙락했던 거였어요. 갑자기 그동안 지구에서의 삶 전체가 꼭두각시의 것처럼 느껴졌어요.
“거듭 말하지만, 저희가 이렇게 정중하게 말씀드리는 건 여러분들을 배려한다는 의미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 멘트를 남겼어요.
“결심이 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그가 가게를 나갈 때까지 우리는 그저 쳐다보고 앉아있었어요. 나약하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몸이 형편없이 떨려왔어요.
“이건 분명 협박이잖아요.”
로저가 제 손등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어요.
“루나.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했는데, 실은 최근에 간섭이 거의 없는 좌표 구간을 알아냈네.”
“정말이에요, 로저?”
“애스터코드를 조합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구간인데, 내 생각이 맞는다면 조르주도 이 구간을 알아낸 게 아닌가 싶어. 프랑스 국경 근처거든.”
“그래요…?”
제 마음은 반갑지만은 않았어요. 이번에도 영락없이 저는 은별이 생각을 하고 있네요.
“좋은 일이네요. 그런데 로저. 당분간 이 일은 은별이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로저는 난감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어요.
“루나. 더 이상 미루면 안 돼. 이제 겨우 코드 하나 발견한 것뿐이지만 준비가 되는 대로 시도해야 하네. 자네가 위험해지는 걸 은별이도 원하지 않아. 아니, 은별이가 그 누구보다 가장 원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알아요. 하지만….”
저도 두렵답니다. 무엇보다 고양이들을 언급하니 제 이성이 마비되는 느낌이었어요. 흩어져 있는 나나와 뭉크도 데려가야만 해요. 여기에 남겨두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그들이 나나와 뭉크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런데 은별이, 은별이는 어쩌죠? 은별이는….
“부쩍 자랐지만 아직 미성년자예요.”
“넉 달만 있으면 성인이야. 대학에 들어갈 거고. 독립할 나이라고. 그때쯤에 맞춰서 우리도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거야.”
“정말요…?”
“준비가, 늦어지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에요. 다만….”
“좋아. 자네 바람대로 마음의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니 안심하게. 아무리 빨라도 반년 내로는 못 끝내니까.”
그나마 다행이네요. 제가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요? 로저의 싸늘한 시선이 날아왔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마음의 준비. 그걸 할 시간은 필요하니까요. 반년. 반년이면 되겠죠. 그 정도면 마음의 준비, 될 거예요.
“자네가 은근히 철이 없는 건 잘 알지만, 이 정도로 철부지인가….”
“뭐라고 하셨어요, 로저?”
“아닐세.”
그때 제 눈앞에 좌표가 떴어요. 사람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체육관이에요. 훈련 중인 농구부가 보이네요.
그런데…. 은별이가 팔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저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어요.
“은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