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90화 (90/103)

<90화>

“형. 나, 갈 길을 정했어.”

저녁 피크타임이 지났을 때 은별이가 말을 건네 왔어요. 알바생도 있는 시간이라 저는 은별이와 둘이 사무실에 마주 앉았어요.

“뭔데?”

“언젠가 형이 내가 드라마에 나오면 좋겠다고 한 적 있었는데, 생각나?”

“그럼.”

은별이가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동안 이런 표정을 지으면 나름 어른스러워하려는 티가 역력했는데 이젠 제법 진정성이 엿보이네요.

그나저나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요?

“나 해보려고.”

“뭘?”

“배우.”

“오!”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어요.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언제부터였을까요? 저는 은별이가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제가 너무 흥분했을까요? 은별이가 저를 물끄러미 보네요. 눈에 기대와 질문이 가득 들어있어요. 저는 얼른 대답했어요.

“난, 난 좋아. 좋지. 완전 찬성이야.”

제 말에 은별이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포옥 쉬었어요.

“다행이다!”

“전혀 관심 없어 보였는데, 이제 하고 싶어졌어?”

“응. 하고 싶어졌어.”

“갑자기 왜?”

“형이 좋아하니까.”

“뭐?”

이건 좀, 위험하네요.

“은별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형이 좋아하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정말이야. 말했잖아. 농구도 형 때문에 한 거라고.”

이를 어쩌죠? 이건 분명 개선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요? 그런데 뭘 어떻게 개선하죠? 근심 어린 제 얼굴을 살피면서 은별이가 씩씩하게 말했어요.

“형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런데 아냐.”

“뭐가…?”

“이거 틀린 일 아니라고.”

“틀렸다기보다, 은별이 너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걸 기준으로 삼으면….”

“형이 좋아하는 걸 기준으로 삼아야 나는 의욕이 생겨. 나에게는 형이 동기부여라고.”

할 말이 없네요. 뭔가 틀린 것 같지만 딱히 틀린 것도 아닌, 아무튼 설교하기도 애매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요. 사실 좀 기뻤어요. 이제 훌쩍 자란 은별이가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저에 대한 마음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어요. 이기적일까요?

하지만 제 기분이 좋고 나쁘고가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은별이 인생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무작정 이건 아니라고, 배우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은별이 적성에 잘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좋아. 하지만 해보고 적성에 영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만둬. 언제든 그만두고 다른 걸 해도 돼. 그래도 넌 아직 어린 나이니까 얼마든지 기회가 있어. 알겠지?”

그 말에는 이 녀석이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어요.

다음 날 오후, 이 대표가 루나커피로 왔어요.

저는 이 대표가 내놓은 계약서를 검토했는데 옆에 앉은 은별이가 공란으로 되어있는 부분마다 질문을 던졌어요.

“계약금 얼마 주실 건데요?”

제법 당차네요. 하긴, 원래부터 은별이는 당찼죠. 그래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돈 얘기부터 물어보다니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계약금은 없고, 연봉으로 줄게.”

“연봉? 얼만데요?”

이 대표가 제시한 금액은 이제 대학에 들어갈 학생에게는 상당히 많은 돈이었어요. 그가 공란에 금액을 적어 넣었어요. 그걸 보고도 은별이의 질문세례는 계속 이어졌어요.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면 출연료가 있다던데요. 그것도 따로 주시나요?”

“주지. 그런데 우리 은별이, 돈에 관심이 아주 많구나.”

“그럼요.”

저도 궁금해서 슬쩍 물어봤어요.

“이유가 뭔지 형도 궁금한데.”

“요즘 멋진 남자는 돈도 잘 벌어야 하잖아.”

“그게 다야?”

“꼭 사고 싶은 것도 있고.”

“응? 그게 뭔데. 형이 사줄게.”

그 말에 은별이는 미간은 잔뜩 좁히고 고개를 살살 저었어요. 우리 대화를 듣기만 하던 이 대표가 끼어들었어요.

“저는 은별이가 돈에 관심 있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런가요? 그건 왜죠?”

“돈을 알아야 세상을 안다는 게 내 의견입니다.”

“아하.”

그 말도 일리는 있었어요.

“그런데 은별이는 아직 학생이고 내년에 신입생이 되면 바쁠 텐데, 학업에 지장은 없을까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아주 지장을 안 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과에 진학한다면 문제가 좀 달라요. 그게 다 학업의 연장이니까요.”

옳은 말이라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하지만 은별이더러 한번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라고 했는데요. 영화과에 진학하면 다른 일을 시작하기가 어렵잖아요.”

그 말에 묘하게도 이 대표와 은별이가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봤어요.

“어이구, 사장님. 이 바닥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벌써 그 정도 마음으로 시작하면 죽도 밥도 안 될 겁니다.”

“왜요?”

반문하는 저를 이 대표가 입을 쩍 벌리고 쳐다봤어요. 얼굴이 창백하네요. 그 대신 은별이가 말했어요.

“형, 난 안 그만둬.”

“응…?”

은별이의 단호한 말에 이 대표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어요.

“그래그래. 은별이는 역시 심지가 굳어. 그렇죠, 사장님?”

저는 이 대표를 흘긋 보고는 은별이에게 물었어요.

“적성에 안 맞아도?”

“적성에 안 맞을 리 없어. 그리고 안 맞는다 해도 절대 안 그만둬. 적성을 개조해서라도 꼭 성공할 거야.”

이 대표는 박수를 짝짝 치며 좋아했지만 저는 좀 걱정이 되었어요. 아까 말한 이유로 말이죠.

아무튼 계약은 성사됐어요. 제가 검토를 마치고 사인을 끝낸 서류를 밀어놓자 은별이도 사인했어요. 사인이 없다며 뜬금없이 메모지를 가져와 여러 번 연습하는 돌발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요.

저는 기념으로 레드벨벳 케이크에 초를 꽂아 가져왔어요. 이 대표는 기념사진을 백 장쯤 찍은 후 케이크를 공략했어요. 즐거운 티타임이었어요. 우리는 이 대표가 말해주는 ‘그 바닥’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어요. 무척 재미있었답니다!

은별이가 배우가 되다니, 가슴이 벅차네요. 솔직히 저는 농구선수보다 배우가 백배는 좋아요. 아무래도 제 취미가 드라마 시청이니까요. 물론 영화도 좋고요.

아무래도 은별이가 영화에 출연할 때를 대비해 빔프로젝터를 마련해야겠어요. TV도 초대형으로 바꾸고 말이죠.

*

그로부터 한 달이 훌쩍 흘렀네요.

11월인데 우리 집 마당에 목련이 피었답니다. 오늘 은별이 수능 잘 보라고 대지의 여신이 축복을 내린 걸까요?

“뭐 하고 있어?”

“아, 은별이 일찍 일어났네. 그렇잖아도 깨우려고 했는데.”

저는 주방에서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은별이는 공부할 때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아요. 수능 당일 점심으로는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적당한 양만 준비하는 게 좋다고 해서 도시락에는 잡곡밥과 아욱국, 동그랑땡, 시금치나물로 조금씩만 담았어요.

“뭘 이렇게 여러 가지 했어? 밥이랑 된장국이면 되는데.”

은별이가 동그랑땡을 하나 집어먹더니 엄지를 들어 보이네요.

“맛있어. 형 한식대첩 나가도 되겠어.”

“후후, 진짜?”

“과식하면 안 되는데.”

“아침은 눌은밥 했어. 어서 먹고 가야겠다.”

시험 보는 날은 아직 때도 아닌 동장군이 괜스레 어슬렁거린다죠. 오늘도 뜬금없이 춥네요. 어제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볼에 스치는 바람이 시려요.

우리는 미니밴을 타고 푸르스름한 도로를 달렸어요. 수능 고사장은 멀지 않아서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요. 조금 일찍 도착한 감이 있지만 늦는 것보다는 낫겠죠.

각종 현수막이 내걸린 교문 앞에는 응원 나온 학생들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었어요. 일찍 도착한 차량이 제법 많아요. 학부형이고 학생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참 묘한 광경이지만, 열심히 검색해본 덕분에 이미 적응이 되었답니다.

“자, 다 왔다. 내리자.”

“형.”

“응?”

은별이가 눈을 빛내며 저를 빤히 쳐다봤어요.

“그것만 해주면 나 수능 되게 잘 볼 것 같은데.”

“뭔데?”

“해줄 거야?”

“당연히 해주지. 수능 잘 본다는데 뭔들 못해. 저 앞에서 춤을 추라고 해도 춘다, 까짓.”

제 말에 까만 눈이 새벽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촉촉하게 빛났어요. 대체 뭘 해달라는 걸까요? 어쩐지 기대가 되어 저는 은별이 눈빛을 살폈어요.

“…한 번만 해줘.”

“뭐를, 해줘?”

저는 귀를 쫑긋 세웠어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듣지 못했거든요.

“키스.”

제 눈이 동그랑땡만해졌을 거예요. 아니 그보다 더 컸으려나?

“야, 정은별.”

“알았어. 미안. 그럼 그냥 시험 망칠게.”

이거 뭔가요? 협박이죠? 시무룩해져서는 곁눈질을 하는 것이 그거 안 해주면 시험을 망치겠다는 얼굴이네요.

“어쩔 수 없지. 키스 한 번 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닌데, 춤도 추겠다면서 이건 안 해준다니 형한테는 내 수능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게. 나올 거 없어. 나 갈게. 안녕.”

“정은별, 너 진짜 이럴래?”

“한 번 해주면 안 돼?”

허…. 이런 빤빤한 녀석 좀 보게.

“조, 좋아. 대신 그냥 뽀뽀야.”

은별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저를 봤어요.

“그럼 최대한 꾸욱 눌러줘.”

“점점….”

은별이가 얼굴을 쏙 내미는 바람에 저는 움찔 떨고 말았어요. 아이가 제 눈과 입술을 간질이듯이 바라봤어요. 저는 얼른 입술에 입을 맞춰줬어요. 은별이의 미간에 자잘한 주름이 잔뜩 잡혔어요. 저는 눈을 한번 흘기고는 다시 입술을 꾹 눌러줬어요. 그때였어요.

“읏….”

은별이의 손이 제 목을 턱 잡았어요. 은별이가 고개를 기울였어요. 이건, 완벽하게 키스하는 각이라서 저는 정말이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답니다.

저는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춰주고는 재빨리 입술을 뗐어요. 은별이가 자기 입술을 살살 핥으며 저를 빤히 쳐다봤어요.

“왜 그런 눈으로 봐? 뭘 어쩌게.”

은별이는 이내 시무룩한 얼굴을 했어요.

“다녀올게….”

“왜 그래? 뽀뽀해줬잖아. 시험 잘 보고 올 거지?”

“칫….”

“뭐야?”

“알았어. 잘 볼게.”

저는 은별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쥐고는 한 번 더 입을 쪽 맞춰줬어요. 그제야 은별이도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었어요. 저는 은별이의 콧등과 이마에도 입을 맞춰주고는 마지막으로 눈을 맞췄어요.

“자! 내리자.”

“형은 안 내려도 돼.”

“싫어. 나도 다른 학부형처럼 저 앞에서 기도할래.”

“어유. 그런 짓을 왜 해? 형이 그런 짓 하면 눈에 너무 띈다고.”

그 말도 일리가 있어서 저는 교문 앞까지 은별이를 바래다주기만 했어요. 바람이 차기에 롱패딩을 잘 여며주고 머플러로 입까지 가려줬어요.

“떨지 말고, 알았지?”

“떨기는 누가.”

“그래. 우리 은별이는 이런 걸로 떨지 않지.”

“다녀올게!”

씩씩하게 인사하고 은별이는 돌아섰어요. 교문 안으로 들어가 학생들 사이에 휩싸이기 전에 은별이가 한 번 더 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어요. 저도 손을 흔들어줬어요. 그리고 은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봤죠.

날씨가 스산해서일까요? 아니면 은별이의 뒷모습을 오랜만에 봐서일까요. 왠지 좀 쓸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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