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왜?”
저도 모르게 은별이를 부르고 말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새벽 어스름 빛이 어쩐지 생소해보여서였을까요? 제가 은별이를 안아주는 게 아니라 은별이가 저를 안아주는 게 아직도 적응이 안 되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은별이의 찬란한 미래가 너무나 빨리 다가올 것 같아서였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은별아….”
재차 부르자 은별이가 궁금한 듯 저를 내려다봤어요. 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어요.
“아냐. 그냥 불러봤어. 우리 은별이가 너무 빨리 자란 것 같아서.”
그러자 은별이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어요.
“무슨 잠꼬대를 하는 거야.”
“그래. 어서 가봐. 너무 무리하지 말고.”
“형.”
“응?”
“사랑해.”
“어어…. 형도 은별이 사랑해.”
은별이는 좀 전과 변함없이 저를 쳐다봤지만 눈빛에는 열기가 깃들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저는 잘 안답니다.
“엇…!”
번개처럼 입을 맞추고는 은별이가 휙 돌아섰어요. 제가 꾸짖을까 봐 그러는지 복도 끝까지 가서야 돌아보며 손을 흔드네요.
“다녀올게.”
그 아이가 사라진 복도에 저는 한참 서 있었어요.
몽땅 다 틀렸어요.
은별이가 예상보다 빨리 홀로서기 할 것 같아서, 저는 안심이 되었답니다. 은별이의 반짝이는 미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어제 로저가 알려준 사실이 있었어요.
“루나. 도킹에 100퍼센트 성공할 수 있는 애스터코드를 알아냈네.”
그건 그가 한 실험이 성공했다는 의미만은 아니었어요.
로저는 어떤 함수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어요. 그 함수로 플럼버의 생명체를 불러내는 일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힘든 결과를 만들어내곤 했거든요. 예를 들어, 유니콘을 불러낼 수는 있는데 그 아이를 다시 보내려면 약간의 요행을 기다려야 한다는 거였어요. 애스터코드를 장착한 벌새를 돌려보냈지만 그 노래를 벌새가 불러줄지는 오로지 벌새의 마음이니까요. 게다가 벌새는 너무나 간단하게 좌표를 드나드는 바람에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어요. 그 때문에 유니콘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노마 대표를 밟았던 것 같다는 게 로저의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전 누군가가 로저가 보낸 코드에 화답해왔어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놀라지 마세요. 바로 조르주랍니다.
로저는 즉시 회원들을 소집했고, 오랜만에 에릭도 모임에 참석했어요. 소식을 들은 회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조르주는 도킹에 성공해 가족들과 상봉했대요. 그가 우리를 잊지 않고 항공국에 건의해 교신을 보내준 거였어요. 정말이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어요. 그는 목숨을 걸고 절벽 좌표에 뛰어들어 운 좋게 성공했지만, 우리에게까지 그 방법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어요. 대신 로저가 조합한 코드가 안정적이니 교신을 주고받으며 정확한 좌표를 알아내자고 했어요.
이제 로저가 발견한 애스터코드로 정확한 위치에 좌표를 열면, 플럼버의 항공국에서 교신을 보내 우리를 올바른 항로로 이끌어줄 거예요. 한 마디로 날만 잡으면 되는 상황인 거죠.
한 번에 다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해서 아치볼트와 엘리아가 제일 먼저 도킹하기로 했어요.
“자네는 언제쯤 마음의 준비가 끝날 것 같은가?”
로저의 질문이었어요.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모르겠어요.”
“루나. 브라이언의 말을 듣고도 망설이는 건가?”
“언젠가는 가야죠. 하지만 이제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 미리 겁먹을 필요도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위험이 코앞에 들이닥칠 때까지 버티겠다는 거야?”
바로 그 말이었기에 저는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야옹, 새벽 댓바람부터 왜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서 청승이냐?”
그래요. 그러네요. 저는 어느새 복도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었어요. 특별히 건설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아빠. 사는 게 왜 이렇게 뜻대로 안 될까요?”
“너처럼 삶이 뜻대로 되는 녀석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해?”
“제가요?”
“그럼. 금방 은별이 나가는 거 보니까 상남자가 다 되었더라. 네가 배우자 복은 타고났다는….”
“아빠!”
“야옹, 깜짝이야.”
“난 진짜 심각한데 말장난이 하고 싶어요?”
“알았어. 그럼 심각한 질문 하마. 아침 반찬은 뭐야?”
“빌어먹을.”
“심각해봤자야. 버틸 때까지 버티면 돼. 은별이를 두고 어딜 가려고.”
“아빠는 아직도 같은 생각이에요? 여기 남겠다고요?”
“은별이가 살아봤자 앞으로 7, 80년 아니냐.”
“아….”
잊고 있던 건 아니지만 새삼 생소하게 들렸어요. 은별이가, 저 별 같은 아이가 내 삶에서 사라지는 날이 오다니. 아니, 그보다… 저렇게 빨리 자란 만큼 빨리 늙어가겠죠. 저는 지금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도 않은 채 아이가 노인이 되고 눈을 감는 것까지 지켜봐야 할 거예요. 그건 혼자였던 삶보다 더 쓸쓸할 것 같았어요.
“여기서 80년을 버티자고요? 그게 될까요?”
“왜 안 돼?”
그러게, 안 될 게 뭐람. 필립의 건강도 회복되는 것 같았고, 저만 마음 굳게 먹으면 되는 거였어요.
저는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주먹을 꽉 쥐어 보였어요.
“아빠 말이 맞아요. 안 될 거 없어요. 그렇게 해요!”
“야옹, 모처럼 우리가 편 먹는 거냐?”
“편 같은 소리 하시네. 가요, 계란말이 해드릴게요.”
“야옹-”
***
정말이지 눈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지구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네요. 어느덧 은별이가 졸업을 해요. 아! 은별이는 한국대학 연극영화과에 합격했어요. 희상이가 다니던 학교인데 루나커피에서도 가깝답니다.
이런 말을 제 입으로 하기는 뭣하지만, 졸업식에 참석했더니 뜻밖에도 학생들이 저를 알아보고 엄청나게 반겨줬어요. 제 품에는 순식간에 열 개도 넘는 꽃다발이 안겨 있었답니다. 모두 학생들이 준 거였죠. 그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라서 적잖이 당황했지 뭐예요. 은별이는 제 보디가드라도 되는 듯이 험악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쫓기 바빴어요.
겨우 한적한 곳을 발견한 우리는 식이 끝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기념 셀카를 찍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어요.
“안녕하세요.”
그 아이는 최지환이었어요. 저는 별로 반갑지 않았지만 애써 웃으며 인사를 건넸어요.
“아, 지환이구나. 잘 있었니? 졸업 축하한다.”
녀석이 부루퉁하게 고개만 까딱이기에 저는 속으로 욕을 씹었죠. 어유, 건방진 녀석. 이걸 그냥 확.
“이제 마지막이니까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왠지 지환이답지 않게 미적거리더니 대뜸 말했어요.
“전 항상 은별이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저와 은별이는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어요. 은별이가 멍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어요.
“뭐?”
“루나 사장님하고도요. 제가 루나 사장님 사진을 찍은 건, 좋아해서였어요. 그리고 어린 마음에 친구들한테 자랑했는데 그게 일파만파 퍼진 거였고, 또 애들이 너도나도 사진 달라고 아우성치니까 우쭐한 마음도 있었고요. 그냥 그 정도였어요. 그런데 은별이가 대뜸 시비를 거니까 제 딴엔 기분이 굉장히 상했다고요.”
저는 좀 놀라서 선뜻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겨우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어요.
“지환아.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하지 그랬니?”
“말했는데. 그리고 눈치도 많이 줬고.”
은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야! 똑바로 말해. 네가 언제 말을 하고 눈치를 줘? 너 내 얼굴 밤고구마, 밀가루 범벅으로 만들어놨잖아. 그래놓고 친해지고 싶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이제 소용없지만 아무튼 그랬어. 농구부 때도 나는 나름대로 네 공이 잘 나아가게끔 도와주려고 했어.”
“거짓말!”
“은별아. 지환이 입장에서 그런 거짓말을 이제 와 뭐 하러 하겠니? 지환이가 어렵게 고백하는 거 같으니까….”
“고백은 아니에요. 그냥 이제 또 얼굴 보기는 힘들 것 같아서 오해는 풀고 떠나자, 그런 거예요.”
세상에, 이 서툰 아이를 보세요. 좋아하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이러면 누가 알겠어요? 은별이도 기막힌지 지환이 얼굴을 멍하니 보고만 있네요. 저는 할 말을 찾다가 또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어요.
“우리 지난달부터 모바일 쿠폰 발행하거든. 그거 열 장 줄게. 번호 줄래?”
지환이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어요. 그리고 은근슬쩍 휴대폰을 건네며 물었어요.
“루나커피, 가도 돼요?”
“당연하지!”
은별이가 마뜩찮은 얼굴로 말했어요.
“올 거면 와라. 요즘 내가 커피숍에 잘 없지만.”
“루나 사장님만 있으면 돼.”
“뭐 이 새끼야?”
멱살잡이를 하려는 은별이를 제가 서둘러 말렸어요.
“야야! 왜 친구 된 첫날부터 싸우고 그래.”
“누가 친구야?”
“누가 친구예요?”
둘은 합창으로 말하고는 마주 보더니 또 주먹다짐할 기세로 덤볐어요. 겨우 떼어놓자 지환이가 콧등을 긁적이며 은별이 눈치를 슬슬 봤어요.
“이왕 말한 김에 하나 더 말할게요.”
“그래. 뭐든 하고 싶은 말 하렴.”
“그날, 은별이 사고 났던 날 말이에요. 실은, 저 그 고양이 알아요.”
“그 고양이? 우리 배리 말이야?”
“네. 배리가 어딜 가려고 했는지도 알아요.”
“어딜 가려고 했는데?”
“우리 집이요.”
“뭐?”
저는 단박에 짚이는 데가 있었어요. 은별이도 그런 모양이에요.
“설마… 너네 집 고양이랑…?”
“응. 자주 오길래 근처 사는 앤 줄 알았거든.”
“헐….”
기묘한 인연이네요. 지환이 집에는 모카라는 이름의 아주 예쁜 샴고양이가 있대요. 그 고양이가 집을 나가서 만 하루 동안 안 들어와 애를 태운 적이 있었다네요. 그다음 날부터 가끔씩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발견되곤 했대요. 지환이네 가족들은 동물을 좋아해서 아무도 그 고양이를 쫓아내지 않았고, 그랬더니 아예 베란다에서 모카와 살림을 차린 분위기였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은별이가 버럭 성을 냈어요.
“이 결혼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지환이가 기막힌 듯 혀를 찼어요.
“누군 너네 집 고양이가 귀여워서 그런 줄 아냐? 너네 고양이인 줄 알았으면 그냥 쫓아내는 건데!”
둘이 또 한 판 붙을 기세여서 저는 또 싸움을 중재해야 했어요.
“얘들아! 잘 나가다가 왜 또 싸워? 애들이 좋다는데 뭘 어쩌게!”
은별이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어요. 떨떠름하게 그것을 흘겨보던 지환이가 제게 물었어요.
“사장님은 찬성이신 거죠?”
“그래야지 뭐.”
은별이가 소리를 빽 질렀어요.
“빌어먹을! 어떤 놈이야? 유부남 아냐? 바람둥이지?”
은별이의 으름장이 너무 진지해서인지 지환이가 더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어요. 은별이도 투덜거리면서 웃음을 흘렸어요.
긴 전쟁이 끝났네요. 은별이의 고교 시절도 끝났어요. 이제 은별이는 1주일만 있으면 어엿한 성인이 되어요.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헤어지겠죠.
그 시간이 너무 갑작스럽게 오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아주 조금씩, 서서히 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이번에도 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