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파티 준비가 한창일 때 은별이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 형. 대표님이랑 매니저 형이랑 N시에 왔어. 감독님한테 인사드릴 좋은 기회라고 해서.
“감독님?”
- 오승철 감독 알지?
“알지! 우리 그 사람 영화 봤는데.”
스릴러 액션물이었는데 극장이 아니라 집에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 봤던 영화예요. 사실 우리는 영화관에 자주 가지 않는답니다. 가게 일 때문에 짬도 안 나고, 뭣보다 파자마 입고 소파에 앉아 편안히 보는 습관이 들어서 그 안락함을 포기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은별이는 어땠을까 궁금해지네요. 영화관에 가서 보고 싶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은별이가 뭘 좋아하는지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뭘 하자고 하면 다 좋다고 하는 녀석이라서 그냥 저랑 취향이 맞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아침 10시 반쯤에 여기 도착했거든. 시간 넉넉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겨우 한 씬 다 찍었다는 거야. 그래서 이제 막 감독님한테 인사드린 참이거든.
“그 유명한 감독님한테 네가 인사를 드렸다고?”
말인즉, 이 대표의 대학 선배라서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다는데 은별이 얘기를 들은 오승철 감독이 한번 데려와 보라고 했대요. 잘하면 대한민국 최고 감독의 영화에 은별이가 출연할 수도 있겠어요!
“그거 대단한 거 아니니?”
- 뭐가 되어야 대단한 거지. 그냥 얼굴도장만 찍는 거라는데, 5시까지 기다려보고 안될 것 같으면 그냥 가려고.
“아니 왜?”
- 왜라니, 오늘 나 생일이야.
“하지만 그냥 생일이잖아. 매년 돌아오는 게 생일이고. 만약 내가 준비해 놓은 거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형은 괜찮아. 마음 편하게 있다 와도 돼.”
한동안 대답이 없네요.
“은별아?”
- 형.
“응?”
- 나 오늘 그냥 생일 아니고, 성인 되는 날이야.
“응? 아아, 그래. 그렇지만 형 생각에는 그런 기회 흔치 않을 것 같아서….”
- 7년 동안 기다린 날이야.
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어요. 7년간 기다린 날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어쨌거나 은별이가 한번 고집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더 설득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알았어. 그래도 너무 무리해서 일찍 오려고 하지는 마. 알겠지?”
- 늦어도 9시까지는 갈게.
“알겠으니까, 서둘지 마.”
전화를 끊고 저는 한동안 새까만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후우-”
“야옹, 왜 한숨이야. 복 나가게.”
“아무래도 은별이가 금방 스타가 될 것 같아요.”
“그래? 그것참 대견하네. 밤고구마 같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런데 너는 왜 죽을상이야? 낭군께서 스타 되면 좋아라 해야지.”
“우리들은 어째서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는 걸까요?”
“야옹?”
“우리들도, 저 별들도, 어째서 이 플럼버의 달처럼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는 걸까요?”
“야옹, 그 말을 들으니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었다는 게 기억나는구나.”
“사람은 나이를 먹고, 세월은 흐르고, 그게 당연한 건데 왜 가보지 않고는 그 기분을 미리 알지 못하는 걸까요?”
“야옹.”
“뭐라는 거예요?”
“배리가 임신했다.”
“알았어요.”
“야옹.”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던 일을 계속했어요. 아, 저는 지금 미트 파이를 만들고 있답니다. 고소한 파이 반죽에 양념한 소고기로 속을 채웠어요. 은별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예요. 오븐에 집어넣고 나면 잡채를 할 거예요. 잡채도 은별이가 좋아하는….
아니, 잠깐. 뭐라고요?
“지금 뭐, 뭐라고 했어요? 누가 임신을 해요?”
“배리가.”
“배, 배리가 임신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배리는 남자아이잖아요.”
“그게, 네가 걱정할까 봐 말을 못 했는데 몇 주 전에 배리가 오메가로 발현했어.”
“네에?”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인가요? 멀쩡한 배리가 오메가로 발현이라니…!
“왜 그걸 지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가 알면 또 배리를 새장에 가둘 것 같아서.”
“내가 왜요?”
“야옹, 그야 모르지. 가끔 네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지환이네 샴고양이가 애기 아빠예요?”
“그럴걸? 되게 맛있는 이름이었는데.”
“모카요, 모카.”
“야옹, 맞아. 그런데 웬 음식을 이렇게 많이 만드는 거냐?”
사실 이렇게 많이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은별이를 기다리다 보니 하나둘 가짓수가 늘어났답니다. 필립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식탁과 아일랜드 바 위에 남은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음식이 쌓였네요.
“야옹, 메뉴도 뒤죽박죽인 게 뷔페식당 차려도 되겠다. 손님 초대도 안 한다며.”
“그게…. 딴 생각하다가 그만. 로저한테도 나눠주고 이웃들한테도 돌리죠 뭐.”
“그런데 주인공은 왜 아직이야?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는데.”
“유명한 감독이 보자고 해서 이 대표랑 N시에 가 있대요.”
“야옹, 녀석이. 네 말마따나 금방 스타 될 각이다.”
미트 파이를 오븐에 넣고, 잡채까지 볶고 나니 더 할 게 없네요.
“아빠.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왜?”
“만들어드리려고.”
“야옹, 이 산더미 같은 음식은 어쩌고 또 만들어?”
저는 시무룩해져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고 슬그머니 거실로 나왔어요. 당장 할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난감할 일일 줄은 미처 몰랐지 뭐예요.
소파에 앉자 투덕거리던 블링과 라미가 제 허벅지 위로 기어 올라왔어요. 미오는 이제 제법 아버지 티를 내는 건지 장난도 치지 않고 전용 방석에 조신하게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네요.
필립이 테이블 위로 폴짝 뛰어올라 바구니에 놓인 귤 한 개를 미오에게 던졌어요. 미오가 야옹거리며 앞니를 드러냈어요. 이러면 싸움이 시작되는 거예요. 물론 대부분 필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지만요.
저는 그 짓거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맥주를 홀짝였어요. 쓰네요. 제가 왜 맥주를 꺼내왔을까요? 은근히 뒷맛이 써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술인데 말이죠.
“야옹, TV 안 보냐?”
그러고 보니 TV도 켜지 않았네요. 드라마 할 시간인데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그런데 제가 뭘 생각하고 있었죠? 분명 생각에 잠겼던 것 같은데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음악조차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멍하니 한 시간도 넘게 앉아있었나 봐요.
그때였어요. 눈앞에 좌표가 떴어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 허벅지 위에서 졸고 있던 블링과 라미가 야옹거리며 소파에 파묻혔어요.
“은별아…!”
“야옹! 저 녀석 왜 또 저렇게 뛰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은별이는 육상 선수처럼 뛰고 있었어요. 사방이 텅 빈 낯선 거리였어요. 8차로나 되는 넓은 도로가 펼쳐졌고 양옆은 농지였어요. 앞쪽에는 커다란 터널이 있네요. 은별이는 그 터널을 향해 뛰는 것 같았어요. 간간이 긴 불빛을 쏘며 차들이 쏜살같이 달렸어요.
“저기가 어디죠?”
“야옹, 127.98, 497.01. 아직 N시로구나.”
“가봐야겠어요.”
“전화부터 해보지 그래?”
맞는 말이라서 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어요. 그러나 신호만 이어질 뿐 은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배터리가 나갔나 봐요. 아니면 아까 무음으로 해놨다고 했는데 그대로 놔뒀던지. 아무튼 가볼게요!”
“야옹, 조심해!”
***
“대체 왜 저렇게 앞만 보고 뛰는 거야!”
평일 밤 교외의 한적한 N시. 그곳에는 대형 영화제작사가 설립한 세트장이 있고, 주변에는 농지와 농가가 있을 뿐이에요. 산길로 좀 더 들어가면 수목원이 있어서 주말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지만 평일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거리낌 없이 순간이동을 한 것 말이에요.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어도 실외에서는 금기사항인데 말이죠. 그런데 저는 고민하지도 않고 순간이동을 했을뿐더러 죄책감도 없었어요.
“알 게 뭐야, 씹.”
제가 있고 우주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막 돼먹은 이기심이라 해도 좋아요. 은별이가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가진 능력을 써먹지 않으면서까지 윤리의식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한 마디로 저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답니다.
은별이는 오로지 자신이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만을 보며 달리는 버릇이 있잖아요. 대단한 집중력이고 그거야말로 그 아이에게 성공을 가져다줄 습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사고라도 나서 잘못되면 성공이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요?
언젠가 필립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우주에서 저만큼 고집이 센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정은별이 저를 훌쩍 뛰어넘었다고요. 완전 공감이에요. 저 녀석 같은 고집불통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눈치는 또 엄청 빨라서, 저 먼 거리에서 이미 루나커피 미니밴을 발견하고는 인간 미사일이 될 준비를 하고 있네요. 제발 서둘지 말라고 헤드라이트까지 깜빡였는데 그 뜻을 알 텐데도 결코 제 말을 듣지 않아요. 정말 미운 녀석! 다행히 도로가 텅 비었으니 망정이지 불시에 미친 차 한 대라도 전속력으로 날아오면 어쩌려고 저럴까요?
저는 안달이 나서 서둘러 갓길에 차를 세웠어요. 은별이는 이미 교차로를 건너고 있었어요. 심지어 빨간불인데 말이죠! 저건 올바른 시민으로서도 안 될 일이잖아요?
새빨개진 얼굴로 땀범벅이 되었는데도 뭐가 저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어요.
은별이의 머리 위로 지구의 달이 그 아이를 비추고 있었어요. 믿어지나요? 그 달은 플럼버의 달보다도 컸어요. 지구에 와서 저렇게 큰 달은 본 적이 없답니다. 달빛 때문일까요? 은별이의 미소가 광채를 뿌리는 것 같았어요.
“너 그렇게 좀 뛰지 말라고 형이 몇 번이나 말했…!”
오, 세상에! 이런… 어떻게, 은별이, 이 녀석! 이 미운 녀석이 제게로 곧장 돌진해서는 부서질 듯이 저를 끌어안았어요. 이 버르장머리 없는…!
이 녀석이 감히, 하늘 같은 형님한테, 지금, 입을 맞춘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에요. 이건 사고예요! 명백히 접촉사고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