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96화 (96/103)

<96화>

돌이켜보면 저는 처음부터 정은별이라는 아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아이의 까만 눈동자에는 처음부터 저것이 있었어요. 금방이라도 활활 태워버릴 것 같은 열정 말이에요.

검은 호수의 그 밤 제 앞에 뚝 떨어진 조그만 아이.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 열정은 저 아이를 채우는 거의 모든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저런 걸 생존본능이나 생명력이라고 말하지만 전 그것과는 다르다고 감히 말하겠어요.

생존본능이란 생존과 삶이라는 목적을 두고 다른 요소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저 아이가 가진 저 열정은 오히려 생존과 삶을 도구로 삼고 있거든요. 은별이는 그 열정의 근원을 위해 살아왔고, 그것을 위해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며, 또한 그것을 위해서라면 정은별이라는 생명체마저도 한순간 포기할 수 있을 거예요. 저 아이가 원하는 단 한 가지는 그 열정을 쏟아내게 하는 근원이자 목표물이니까요.

처음부터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아챘기에 저는 몹시 두려웠어요.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여겨졌죠. 제게 사랑이란, 동등한 입장의 사람들이 즐거운 욕망을 품고 함께 감정을 나누는 것이었으니까요. 저렇게 목숨 걸고 달려드는 사랑은 저라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왔어요. 아시다시피 루나 블랑슈는 평화주의자랍니다. 평화란 어떤 경우에도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는 게 제 인생 철학이랄까요.

그건 은별이가 어린 나이에 제 앞에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게다가 이제 저는 슬슬 인정하는 중이랍니다. 은별이에게서 7년 전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 오히려 쉽지 않다는 것을요. 그렇다고 이제는 은별이를 정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처음부터 저는 저 아이가 걱정됐어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오는 저 아이의 모습이 가끔씩 꿈에서도 어른거려 밤잠을 설친 적도 있답니다.

하지만 저는 믿었어요. 은별이의 열정적인 성격은 타고난 것이고, 당시 상황 때문에 저를 대상으로 삼았을 뿐 훗날 애정을 쏟을 만한 다른 것을 발견하면 저를 향한 감정은 자연스레 사라질 거라고 말이에요. 어릴 때는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감정을 품게 되잖아요? 그러니 독립적인 인격체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지리라 확신했던 거예요.

불과 수주 전까지도 저는 그렇게 믿었어요. 은별이가 운동을 좋아할 때는 그게 운동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고, 배우가 된다고 한 후로는 그 일이 대신해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 열정을 집착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네임이 만들어낸 그릇된 집착 말이에요. 아이는 자신을 구원해준 루나 블랑슈를 삶의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묘한 일이 생겼어요. 말 한마디 때문에 그 오랜 확신이 와르르 무너진 거예요.

“혜리가, 그렇게 예뻐?”

은별이 주위에 예쁜 여학생들이 들끓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어요. 은별이가 열정을 쏟을 대상이 어쩌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또래 이성에게 애정을 품는 일은 은별이만 한 나이에는 당연할 뿐 아니라 건강한 일이 아니겠어요?

아니, 다시 말할게요.

은별이 주위에 예쁜 여학생이 들끓는 것은, 루나 블랑슈의 입장에서 반가운 일이어야 해요. 은별이를 아끼고 은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보호자로서 행복을 느꼈던 형님 같은 존재 루나 블랑슈, 그 입장에서는 말이에요.

저는 그 많은 여학생 중 적어도 한 아이는 은별이 눈에 들 거라 여겼어요. 그거야말로 좋은 일이에요. 그래서, 루나 블랑슈는 어땠을까요? 좋은 일이니 기뻤을까요? 형으로서 안심했을까요? 아니면, 좋은 아이를 만나야 할 텐데, 형답게 걱정했을까요?

천만에요.

저는 불안했어요. 심기가 불편했어요. 이상하게 화도 났어요. 밤에 잠도 오지 않았죠. 급기야 혜리가 은별이 팔짱을 끼고 루나커피에 들어왔을 때는 저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혼란스러웠죠.

왜지? 왜 나는 은별이가 여학생과 교제할까 봐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걸까?

은별이가 제 마음속에 있는 질문을 대신 해주지 않았다면 제 입에서 똑같은 질문이 나왔을 거예요.

“혜리가, 그렇게 예뻐?”

지금에 와서야 저는 알았어요. 아니, 진작부터 알았지만 애써 부인했던 거라는 걸 이제는 인정하겠어요. 어이없게도 저는 은별이가 저에게 집착하는 상태에 완전히 적응해버리고 만 거예요.

그것에 적응한 순간, 저도 모르게 출발선상에 서 있었어요. 정은별을 향한 출발선.

“으응….”

이건 제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소리일까요? 아니면 그냥 은별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소리라고 우기는 게 좋을까요? 저는 성인군자도 아니면서 뻔뻔하지도 못하답니다. 확실한 위선자도 못 되지요. 그러니 그냥 인정할 수밖에요. 이건 명백히 제 목구멍에서 나온 소리예요. 정말이지 부끄럽네요.

“으응… 응….”

우리 머리 위에 엄청나게 큰 달이 떠 있었어요. 루나커피의 달처럼 크고 둥근 달이에요. 사방의 농지, 텅 빈 도로, 그리고 그 위의 달. 그게 세상의 전부였어요. 태초의 세상처럼 보이는 그 풍경 위로 은별이가 달려오고 있었어요. 오로지 저를 향해,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이에요.

그 순간 미지의 누군가가 저 예쁜 아이를 제 품에서 앗아가 버릴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두 팔을 벌리고 그 아이에게 달려갔어요. 그런데 세 발짝을 떼기도 전에 은별이가 쏜살같이 달려와 제 품에 안겼어요. 은별이를 안고 나서야 저는 안심할 수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뿐이었어요.

이 녀석이 그렇게 갑자기, 키스를 해올 거라고, 꿈엔들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죠. 왜 저는 밀쳐내지 못한 걸까요?

세상이 멈췄어요. 불을 삼킨 것 같은 혀가 제 모든 것을 감아왔어요. 머릿속까지 감겨버린 기분이었어요. 그대로 제가 은별이에게 흡수되어 버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죠.

그 와중에도 은별이 몸이 불덩이 같아서 겁이 났어요. 웃기는 표현이지만, 그 순간 우리는 뜨거운 브라우니와 차가운 아이스크림 같았어요. 그 아이는 너무 뜨겁고 저는 꽁꽁 얼어있었으니까요. 불과 얼음은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요. 저는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무기력하게 빨려 들어갔어요.

어쩌면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예감했는지도 몰라요. 은별이의 성장통과도 같은 이 순간을, 저는 함께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걸 거부할 힘도 권리도 제게는 없다는 생각도요. 싫든 좋든 우리는 네임으로 묶인 존재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저는 정말 그런 논리적인 생각으로 은별이를 밀쳐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이게 과연 의무감일까요? 아니면 설마 저는, 밀쳐내고 싶지 않은 걸까요? 이 꼬마를, 저는 언제부터 마음에 두기 시작했을까요?

필립이 말한 적 있어요. 한국 속담에는 가랑비에 치마 젖는다는 말이 있다고. 그런 걸까요? 한결같은 은별이의 열망이 제 견고한 마음을 적셔버린 걸까요? 아니, 처음부터 제 마음이 정말 견고하기는 했을까요? 제가 이 아이에게서 벗어나려고 그토록 애쓴 것도, 부러 냉랭하게 철벽을 친 이유도, 마음이 견고해서였을까요? 모르겠어요.

도대체 이 꼬마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요? 오로지 네임 때문일까요? 느닷없이 저는 은별이의 진심이 궁금해졌어요. 그동안 단 한 번도 은별이의 진심이 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그걸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은별이는 네임 때문에 저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거라고 말이에요. 네임만 아니면 저는 은별이의 좋은 형으로 남을 수 있었을 거라고요.

저는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랐을까요? 그것 역시 모르겠어요. 정말이지 저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어요. 421살이나 먹었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아는 게 없을까요?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어요.

421살이나 먹었는데 키스가 처음이에요.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었을 정도로 저는 은별이의 키스에 말려들었어요. 은별이는 작정한 것처럼 파고들었고 저는 그 힘에 압도되어 어느새 은별이에게 매달려있었어요. 믿어지시나요? 제 팔이 은별이 목을 감아 안았어요. 그것도 아주 세게 말이에요. 어느 순간 우리는 키스를 ‘나누고’ 있었어요.

저는 지금 좋은가요? 정녕 좋은 걸까요? 그래요, 미칠 것처럼 좋았어요.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고 손발이 곱아드는 것 같았어요. 은별이는 저를 으스러지도록 안고는 자꾸만 어딘가로 밀어 넣었어요. 저는 제 뒤에 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기에 차 안에 올라앉게 된 순간까지 이 아이가 왜 자꾸 밀어붙이는지 알지 못했어요. 잠깐이지만 제 뒤에 절벽이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자칫 손을 놓아버리면 그대로 떨어져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은별이를 한껏 끌어안았어요.

그때 차 한 대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어요. 그 와중에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미쳤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데 얼어 죽을 경적은 왜 울리는 거야?

저는 그 빌어먹을 차 때문에 키스가 끝난 게 섭섭했던 걸까요? 정답.

경적 소리를 신호로 세상이 깨어났어요. 이런 걸 두고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나요? 화들짝 놀라서는 제가 먼저 입술을 뗐어요. 놀라 휘둥그레졌을 제 눈을 은별이는 가만히 들여다봤어요. 그리고 속삭였죠.

“사랑해.”

은별이는 원래부터 예쁜 아이였어요. 이제 잘생긴 청년이 다 되었죠. 그런데 그것 말고도 은별이에게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어요.

그제야 저는 깨달았어요. 이 눈빛 때문이에요. 은별이는 처음부터 이 눈빛을 갖고 있었어요. 저를 응시할 때면 장막이 걷히는 듯 까만 눈동자에 별빛 같은 광채가 서렸어요. 세상 모든 사랑이 그 눈동자에 갇혀있는 것 같았죠.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 기대와 실망, 정열과 좌절, 무엇보다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혼돈의 빛.

그런 눈빛으로 은별이가 저를 가만히 응시할 때면, 언젠가부터 저는….

“사랑해, 루나.”

설렜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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