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아빠랑 고양이들 거기 있어요?”
은별이가 씻는 동안 저는 로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브라이언 킴이 나타난 이후 로저는 루나커피와 마찬가지로 자기 집 실내에 보호 장치를 걸어놨어요. 수상쩍은 이들이 임의로 좌표를 열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우산을 씌워놓은 거예요. 플럼버에서 쓰는 방식인데요, 아무래도 실내 공간을 오픈해놓으면 사생활을 침해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 구래…. 필립이 하루빰 여이서 잔다고 애들이랑….
“뭐, 뭐야. 로저! 술 마셨어요?”
- 웅, 한잔했네. 기분도 꿀꿀하고 해서.
“무슨 일 있으세요?”
- 나는 아주 재미없는 사람일세, 루나.
횡설수설하는 게 아무래도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할 것 같아 대충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끊고 나니 찜찜한 게 있었어요.
“설마, 아빠랑 술 마시는 건 아니겠지?”
아무렴, 로저가 술독에 빠졌어도 고양이한테 술을 먹이지는 않겠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어요.
“들어와.”
은별이에요. 어릴 때처럼 베개를 안고 왔네요. 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 아이를 쳐다봤어요. 은별이는 내 앞에 서더니 발그레한 얼굴로 웃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방에 들어온 건지 따져 묻고 싶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입씨름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는 화가 나 있었어요.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저도 몰라요. 아무래도 란슬렛이 또 습격을 받았나 봐요.
예나 지금이나 눈치는 빤한 아이라서 은별이는 이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어요. 그리고 베개를 제 머리 위로 휙 던졌어요. 그러고는 다소곳하게 서서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에 저는 마음이 좀 안 좋아졌어요. 그 얼굴은 어릴 적 은별이와 별로 달라진 데가 없었거든요. 제 눈치를 보는 게 측은하기도 하고,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안아주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콜록…!”
놀란 나머지 마른침이 목에 걸리고 말았어요. 녀석이 느닷없이 티셔츠를 훌렁 벗어 던지지 않겠어요? 그, 그것도 모자라 제 앞에서 청바지를! 내리고! 있어요!
“정, 정은별…!”
저는 하도 기가 막혀서 눈만 희번덕거리고 있었어요. 팬티만 걸친 은별이가 제 어깨를 턱 잡았어요. 그리고 한쪽 무릎을 제 가랑이 사이에 올려놓더니 그대로 몸을 눕혔어요. 저는 순식간에 은별이 아래에 깔리고 말았어요.
“정은별, 너…!”
새까만 눈동자가 저를 내려다봤어요. 그새 촉촉해진 눈망울에 제 놀란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어요. 순간 불타는 드래곤이 제 머릿속에서 탈출해 온몸을 헤집고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그 녀석이 빙의를 했나 봐요. 드래곤에 말이에요. 녀석이 제 몸에서 은별이 몸으로 건너간 것 같았어요. 굉장히 뜨거웠거든요. 그러니까 은별이, 몸이요. 몸…의 일부. 그게,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은별아…!”
“형.”
신음에 가까운 어조였어요. 금세라도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은별이가 제 눈과 코와 입을 훑었어요. 마치 쓰다듬는 것 같은 눈길이었어요. 눈길만으로 간지럼을 느낄 수도 있는 걸까요?
“나 이제 알았어.”
“뭐, 뭘…?”
“아까 형이 한 말. 무슨 뜻인지.”
“내가 무슨 말을…?”
“운명이 의무와 같은 거라서, 오로지 그것 때문에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거, 아냐.”
저는 입을 다물고 말았어요. 제가 은별이 마음을 떠보려고 했던 속내를, 들킨 걸까요? 저도 모르게 저는 은별이에게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을까요?
“누구나 형을 좋아해. 그런데 나만이 자격증을 가진 거잖아. 그러니 내게는 그 운명이라는 게 절대적일 수밖에 없어. 네임이 아니면 내가 형을 가질 마음조차 먹을 수 있었겠어?”
“가, 가지다니… 너 어디서 그런 말을….”
“나 형한테 한참 모자라고, 형이 기대하던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는 거 잘 알아. 그런 내게 형의 이름이 있어. 나 그것만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형을 욕심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난 매일 행복했어. 이해할 수 있겠어?”
허…. 저 감동했나요? 421살인 주제에 고작 갓 스물 된 꼬마한테 기대하던 이상의 말을 들어서, 좋은 걸까요?
다 차치하고, 그런 마음일 줄은 몰랐어요. 자격증이라니, 얼토당토않네요.
“은별아….”
“형도 믿어주면 안 돼?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우린 운명이잖아. 운명은 그런 거 아냐?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거.”
세상에, 은별이는 저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저는 은별이가 의무적으로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은별이에 대한 제 마음을 깨닫고 난 후로 저는 그 생각이 불쾌해졌어요. 아무런 감정도 없었을지 모르는데 오로지 네임 때문에 저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는 생각 말이에요.
그래서, 오해가 풀렸냐고요? 그래서 좋으냐고요?
“사랑해, 루나.”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제 심장이 펄펄 끓기 시작했어요.
인정할게요. 저는 은별이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너무나 열렬히 말이에요.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어요. 제게도 최소한의 체면이란 게 있잖아요?
오늘 은별이를 방에 들인 건 순전히 심통이 나서였어요. 아이 취급을 하며 예전처럼 데리고 잘 생각이었어요. 너와 나의 확연한 차이점을 알려줄 참이었죠. 비열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이에는 제가 운명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 말고도 함정이 존재하니까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장애물이죠. 그런데도 뭘 더 해야 할까요?
은별이의 입술이 제 코끝에 닿았어요. 이 아이는 어쩌면 이리도 예쁜 입술을 갖고 있을까요? 아마 은별이가 배우로 데뷔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입술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은별아. 비켜.”
탐스러운 속눈썹이 흔들렸어요. 그늘진 눈동자에 섭섭함인지 의혹인지 모를 감정이 내비쳤어요.
“형.”
“형은 네 생각이랑 달라. 우린, 안 돼.”
“왜…?”
“우린 둘 다 남자잖아.”
그 말에는 입술이 조금 뒤틀렸어요. 웃음 반 비웃음 반이네요.
“아직도 누나 같은 여자가 이상형이야?”
누나 같은 여자라니, 문득 무슨 말인가 했을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말이지만 저는 아닌 척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래. 그리고 잊었나 본데, 형은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없잖아.”
놀라는 기색은 없었어요. 은별이도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이제 너도 어른이고, 이변이 없는 한 얼마 안 있어 근사한 커리어를 갖게 될 거잖아. 형은 더 이상 네 걱정 안 해.”
그러자 은별이가 몸을 일으켰어요. 한동안 저를 내려다보던 은별이가 몸을 돌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고 앉았어요.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등이 넓네요.
제 시선이 이내 왼쪽 어깨에 가 닿았어요. 루나 블랑슈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그곳 말이에요. 그 이름은 제 시선이 닿자마자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반짝였어요. 기분 탓일까요? 동시에 제 오른쪽 어깨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어요. 통증이라고 했지만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는 정도의 압력과 비슷했어요.
원래 네이밍이 된 사람들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몸이 연결된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해요.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느꼈던 감각이에요. 그렇다면 이건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 아닌가요? 우리의 미래에는 이별이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저는 몸을 일으켜 은별이 옆에 앉았어요.
“아까 준 카드, 그 계좌에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들어있어.”
며칠 전 저는 제가 가진 재산의 거의 전부를 현금화해서 은별이 계좌에 입금했어요. 증여세도 제대로 납부했으니 완벽하게 은별이 재산이에요. 은별이가 돈을 탐내는 애도 아니고 앞으로 자기 능력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잘 알지만, 어차피 플럼버로 가져갈 수 있는 돈도 아니니 이해할 거예요.
은별이가 저를 돌아봤어요. 저는 그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어요.
“조르주가, 플럼버에 있어.”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은별이의 눈빛이 형편없이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때 농장 근처 절벽에서 도킹에 성공했대. 그리고 우리를 잊지 않고 교신을 보내왔어. 로저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고. 그러니… 이제 은별이 너도….”
어쩔 수 없이 저는 은별이를 돌아봤어요. 눈이 마주치자 제 마음은 예상한 것보다 더 쓰라렸어요. 은별이는 제가 없어도 잘 살아갈 거예요. 훌륭한 배우가 되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겠죠. 멋진 연인도 생길 거고요. 언젠가는 루나 블랑슈의 존재 따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예요.
“씩씩하게 잘 살아.”
“곧, 가는 거야?”
“아마도.”
“월식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돼?”
“그렇다나 봐.”
은별이는 더 묻지 않았어요. 그리 슬퍼하는 얼굴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는 안심이 되었을까요?
“알았어.”
“알았다고…?”
“내 걱정은 마. 잘해나갈게.”
“어? 어…. 그래.”
기가 막히네요. 지금 저, 섭섭해하고 있나요? 은별이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고 정작 은별이가 선선하게 나오니 서운한 걸까요? 은별이가 울고불고 가지 말라고 떼라도 쓰기를 바랐던 걸까요? 은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것쯤 잘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도 이건 지나치게 담백하네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미적거리고만 있었어요. 로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은별이가 슬퍼할 거라 믿고 시간만 끌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가버리는 건데.
“형은?”
“나… 뭐?”
“정은별 너무 보고 싶어 하지 말고 잘 살라고. 그럴 수 있지?”
저는 시선을 돌렸어요. 더 이상 은별이에게 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저는 어른이니까요.
“그래…. 나야 뭐,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가는 건데 당연히….”
은별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는 웃고 있네요. 무슨 뜻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리딩을 슬쩍 해보면… 안 되겠죠. 그래봤자 소용도 없고 말이에요.
은별이가 저를 돌아봤어요. 찌를 듯한 눈이었어요.
저는 그 눈을 바라보다가 셔츠를 벗었어요. 그리고는 오른쪽 어깨를 내보였어요. 곧이어 은별이의 손길이 느껴졌어요. 아마 그 글씨는 로딩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을 거예요. 아이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네임을 훑었어요. 이윽고 숨결이 다가오더니 입술이 그곳에 닿았어요.
“날 부르고 있어.”
그래요. 맞는 말이었어요. 그 이름은 은별이를 부르고 있었어요. 은별이가 가진 이름도 저를 부르고 있었어요. 저는 은별이의 눈을 보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알았어요. 지금 키스하지 않으면 서로의 이름이 불타는 드래곤에게 먹힌다는 걸 말이에요. 은별이 입술이 제게 닿자마자 저는 그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