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인생이란 뭘까요? 삶과 죽음이 맞물린 톱니바퀴에 불과한 걸까요?
라라의 임종 때 그 아픈 기억이 저를 조금은 성숙하게 만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필립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를 상상 이상으로 공포에 떨게 했어요.
은별이가 없었다면 저는 무슨 일이 생기기도 전에 두려움에 짓눌려 급사했을지도 몰라요. 그 아이가 어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를 안아줬어요. 괜찮다고 말해주며 제 어깨를 두들겨줬어요.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다정하게 속삭여줬어요. 덕분에 끔찍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어요.
“야옹.”
다행히 필립은 무사했어요. 기력이 쇠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병이 있는 건 아니라고 하네요. 그저 노환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노환이라니, 필립은 고작 40대인데요. 고양이로 쳐도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니에요. 아니면 플럼버와 지구의 시차 사이에 뭔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걸까요?
루나커피로 돌아와 빈방에 필립을 눕히고 모두 모였어요. 은별이와 저, 고양이들, 그리고 로저도요. 임신한 배리가 필립의 옆에 웅크리고 앉으니 블링과 라미, 미오까지 기어 올라와 필립 주위에 모여 야옹거렸어요.
“야옹, 나는 괜찮아. 그냥 늙어서 그래.”
아마도 저와 로저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은별이가 있어서 긴 말을 할 수는 없었어요. 로저도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만 끼고 서 있었어요.
마침맞게 은별이 휴대폰이 울렸어요. 이노마 대표였어요.
“형, 어쩌지? 지금 나오라는데.”
저는 반가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말했어요.
“어, 그래. 어서 가봐. 어제 일로 혼나는 건 아니겠지?”
“혼나면 혼나는 거지 뭐. 필립, 저 갈게요.”
“야옹.”
“다녀올게요, 로저.”
은별이는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갔어요. 그 아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로저가 마침내 입을 열었어요.
“플럼버로 데려가야 해.”
로저는 하루라도 빨리 필립을 플럼버로 데려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했어요. 플럼버의 의술은 지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환을 치료할 방법은 그곳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구의 의사가 짚어내지 못하는 병이 있을 가능성은 있죠.
“야옹, 난 안 간다.”
“아빠.”
로저가 답답하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짚었어요.
“필립. 여전히 은별이 때문인가?”
“야옹, 운명을 거스르면 벌 받아. 난 내 하나뿐인 인간 아들이 평생 제 배필을 그리워하다가 외롭게 사는 꼴을 볼 수 없네.”
저는 대꾸하지 못했어요. 필립이 장난처럼 하던 말이 전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거든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아빠에게도 진심이 있다는 사실을요.
로저 역시 대꾸하지 못하고 심란한 얼굴로 필립을 내려다봤어요. 잠시 후 그가 말을 꺼냈어요.
“조르주한테서 교신이 왔네. 수일 내로 아치볼트와 엘리아가 도킹하기로 했어.”
“로저. 이번에는 우리 때문에 미적거리지 말고 로저도 가세요.”
로저는 황당한 얼굴로 저를 쳐다봤어요.
“정신 나갔나? 내가 가면 루나커피는 영영 도킹하지 못할 수도 있어.”
“만약 이번에 안 간다면 우린 평생 못 가는 거예요. 그 정도 결심은 하고 있어요.”
“저들이, 혼자 남은 루나를 가만히 둘 것 같나?”
“누누이 말하지만 전 혼자가 아니에요.”
“아니! 냉정하게 말해 우리까지 가버리면 자네는 혼자 남은 플럼버인이 되는 걸세. 은별이는 지구인이야. 만약 저들이 우주발전과 인류의 미래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자네를 실험대상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아이가 그걸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아무리 은별이가 유명한 배우가 되어 명성을 떨친다 해도 그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로저는 전에 없이 흥분했고, 저는 대꾸하지 못했어요.
“야옹.”
“뭐라고?”
“세상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게 있네. 자네도 잘 알잖아.”
“아니, 난 모르겠네. 세상에는 온갖 시시한 이유로 헤어지는 커플이 무진장이야. 지금 루나와 은별이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네. 은별이도 이런 걸 원하지 않을 거야.”
저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로저. 저, 이제 어제의 루나가 아니에요.”
“뭐?”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차피 알 일이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제 입으로 직접 말해줘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오메가로 발현했어요.”
어지간히 놀랐는지 로저가 입을 쩍 벌리고 저를 쳐다봤어요. 필립과 고양이들도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저를 쳐다봤어요. 부끄럽다기보다 민망했어요.
“제게는 은별이가 필요해요. 은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야옹, 그리고 은별이는 곧 알파로 발현할 거다.”
저는 금시초문이라서 필립을 돌아봤어요.
“뭐라고요?”
“자세한 건 로저한테 물어봐.”
로저는 머리가 뽑히도록 쓸어 넘기고 있었어요.
“로저. 정말이에요?”
“내 별점이 늘 들어맞는 건 아냐.”
“야옹, 자네의 별점은 플럼버의 과학에 근거한 것 아닌가.”
“루나가 오메가로 발현할 거라는 별점은 못 쳤잖은가.”
“그것참 야옹이네.”
은별이가 알파로 발현할 거라니, 정말일까요?
“발현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이제 저는 은별이 없으면 못 살아요.”
“루나.”
“죄송해요.”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어요. 로저의 마음을 잘 아니까요. 하지만 이제 로저도 마음을 정리해야만 해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로저가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어요. 그리고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어요.
“화가 난 걸까요?”
“야옹, 아마도.”
“저는 여러 번 제 마음을 말씀드렸어요.”
“네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아빠는, 정말 안 갈 생각이에요?”
“태어나면 살고 늙으면 죽고, 그게 삶인데 뭘. 너무 걱정하지 마.”
저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필립의 등을 쓰다듬었어요. 고양이들이 제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 야옹거렸어요. 아이들도 슬픈 걸까요?
“아빠. 죽지 마세요.”
“야옹.”
“죄송해요.”
“뭘?”
“아빠 구박했던 거.”
“야옹.”
“나만 남겨두고 떠나지 마세요.”
“은별이가 있잖아. 씩씩하게 살아.”
“그래서, 기어코 죽을 생각이에요?”
“야옹,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아빤 마음대로 죽을 권리 없어요.”
“야옹, 이 녀석이.”
“아빠가 엄마랑 할머니 속을 얼마나 썩였는데요. 내 속은 어떻고요. 아빤 내 허락 없이 죽으면 안 된다고요. 알았어요?”
“야옹.”
고양이들이 일제히 야옹거렸어요. 저는 슬픈 게 아니라 화가 났어요. 분명 저는 평생 아빠를 원망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것도 사랑의 일면이었던 걸까요?
저는 아빠를 좋아했어요. 어릴 때부터 아빠를 좋아했죠. 아빠는 늘 반짝거리는 사람이었고 어린 저는 그게 마냥 좋았어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빠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마음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아빠를 더 미워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필립을 품에 안아 들었어요. 필립이 야옹거리며 제 뺨과 눈물을 핥았어요. 그가 제 귓불을 핥아주며 속삭였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 루나 블랑슈. 넌 운명이 점지해준 삶을 살아. 흔들리지 말고 굳건하게 말이야. 알겠지?”
***
- 필립은 좀 어때?
“많이 좋아지셨어.”
어느새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이에요. 은별이는 N시의 스튜디오에 가 있어요. 아까 전화했을 때 이 대표가 집 앞까지 차를 끌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요. 오승철 감독이 오늘 꼭 보자고 했다나 봐요.
“혼나진 않았어?”
- 아니. 나도 혼날 줄 알았는데, 어제 일은 말도 안 꺼내시고 이따가 오디션 비슷한 거 보자고 하시네.
“그 감독님, 사람 볼 줄 아시는구나!”
제 말에 은별이가 하하 웃었어요. 그러나 이내 침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 마음이 좀 무거워. 필립이 아픈데 나는 이렇게 나돌아다니게 돼서. 형이 혼자서 힘들 텐데.
“네가 여기 붙어 있다고 도움 되는 일도 없어. 넌 네 일에 집중해. 그게 돕는 거야.”
은별이가 으응, 하고 웅얼거리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어요.
- 형.
“응?”
- 이건 비밀인데….
“뭔데?”
- 필립이 형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형이 알아야 할 것 같아.
은별이는 제게 놀라운 말을 해줬어요.
저는 말 없이 듣고만 있었어요. 사실 말문이 막혀버렸죠. 이윽고 은별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저는 딱 한 마디 밖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돼….”
- 필립이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나중에 형이 후회하는 일 없이 잘 해드렸으면 좋겠어.
전화를 끊고 저는 한동안 창가에 서서 지구의 노을을 바라봤어요. 하늘이 오묘한 색을 띠는 시간이에요.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복숭아, 페퍼민트와 코코넛 밀크를 차례대로 쏟아부은 것 같은 빛깔이었어요. 그 색이 비할 수 없이 화려해서 제 마음은 더 쓸쓸해졌어요. 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분명 저는 오래전부터 어른이었는데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세상 모든 사람이 비밀을 간직했다 해도 필립, 제 아빠만큼은 그런 게 없을 줄 알았어요. 그 속없어 보이던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그런 비밀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왔을까요? 심지어 할머니도 알지 못했어요. 아셨다면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을 저는 기억한답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엄마 편만 드셨거든요.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게 인생일까요?
제 눈물이 점점 빗줄기처럼 변해갔어요. 책상 위의 휴대폰에서 짧은 소음이 울렸어요.
[은별] 슬퍼하지 마. 사랑해.
제 눈물에 액정 속 글자가 뭉개졌어요. 액정화면에 눈물방울이 토독 떨어졌어요.
흔들리는 문자를 내려다보며 저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요. 오묘한 색들은 이내 하나로 스며들어 어느새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었어요. 그 위로 은빛 달과 저녁별이 스산하게 떠올랐어요. 그제야 저는 제가 오늘 저녁 단 한 번도 플럼버의 달을 쳐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