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01화 (101/103)

<101화>

루나의 어머니 캐롤린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늘씬한 체격에 하얀 피부, 은발과 은회색 눈동자를 지녔으며 성격은 온화했다. 필립은 그녀를 본 순간 반해버렸다. 두 사람이 만난 건 지구인 기준으로 고등학생쯤 되는 나이였다.

출발은 좋았다. 덤벙거리고 떠들썩한 필립을 차분한 성격의 캐롤린이 보듬어주곤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립은 캐롤린의 몸에 새겨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왜 그 사람과 만나지 않고 나와 만나는 거야?”

캐롤린은 이름의 주인이 반인반수라서 집안 반대가 심하다고 대답했다. 그녀 자신도 그 반대를 거스를 용기가 없다고 했다. 필립은 이미 캐롤린을 마음 깊이 사랑했기에 그녀가 용감하지 못해 다행이라고 여겼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렇게 행복할 줄 알았다.

“캐롤린은 결혼한 후에야 그 이름의 주인을 너무나 깊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대. 아들을 낳고 병이 들어서도 그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나 봐.”

결국 필립과 캐롤린의 이야기는 루나가 생각한 내용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필립은 캐롤린을 짝사랑했고, 캐롤린은 죽을 때까지 운명의 남자를 그리워했다. 필립은 밖으로 나돌며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올 때마다 그는 기대했다고 한다. 캐롤린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를 말이다.

그러나 매번 그가 마주한 것은 캐롤린의 공허한 눈동자뿐이었다. 병에 걸렸을 때조차 그녀는 필립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필립의 모친인 바바라도 사랑했다. 정작 남편인 필립만이 그녀에게 기름의 물 같은 존재였다.

이야기를 듣고 난 루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괜한 말을 했나 싶었지만 언제든 루나가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필립이 이 이야기를 내게 해준 이유는 오로지 루나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필립 자신의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네이밍의 상대와 절대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루나를 보내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 그래. 알았어.

“괜찮은 거지?”

- 말해줘서 고맙다.

“사랑해, 형.”

- 그래.

전화를 끊기가 싫었지만 안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은별아!”

전화를 끊기도 전에 누군가 나를 불렀다. 강 팀장이었다. 나는 지금 세트장 밖에서 통화 중이다. 세트장은 건물마다 호수로 표시되어있는데 오 감독이 오늘 사용하는 건물은 B8호였다.

강 팀장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와.”

“네.”

이 직업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하더니, 오늘도 부랴부랴 달려와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렸다. 들어가 보니 좀 전까지 열연하던 배우들은 돌아간 모양인지 스텝들만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명이 꺼진 세트장은 흡사 폐허처럼 보였다. 오 감독의 자리는 비어있었고, 안면이 있는 조감독이 이 대표와 담소 중이었다.

나와 강 팀장이 다가가자 조감독이 귀에 꽂은 이어폰에 손을 대고 뭐라 중얼거렸다. 곧이어 선글라스와 검은 모자를 쓴 오 감독이 나타났다. 그가 의자에 앉으며 앞쪽을 가리켰다.

“가서 서 봐.”

나는 어정쩡한 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켜졌다. 빛이 얼마나 센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사람들의 모습이 조명 속에 묻혀버렸다. 오직 나만이 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오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연습하고 있는 대사 아무거나 쳐봐.”

옆에 있던 이 대표가 햄릿의 대사를 해보라고 했다. 햄릿이라면 통째로 외웠기 때문에 좔좔 읊을 수 있었다.

내 대사를 듣던 오 감독이 외쳤다.

“그만!”

글렀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약간의 소음과 함께 사람들의 그림자가 카메라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모두 카메라를 쳐다보며 한 마디씩 떠들었다.

“잘 먹히네요.”

“360도 안 받는 각도가 없는데요.”

“눈 좀 부릅떠봐.”

마지막 말은 오 감독의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게 내게 한 말인 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이 대표가 손을 번쩍 들고 내게로 뛰어왔다. 그가 흥분한 얼굴로 자그맣게, 그리고 굉장히 빠르게 떠들었다.

“은별아. 감독님 다음 작품은 액션 느와르야. 제목은 「공중도시」.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그런 거 알지? 장르는 SF 액션이지만 스토리는 절절한 로맨스인 게 핵심이야. 네가 거기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봐. 지금 넌 화가 나 있고 굉장히 비참해. 그런 느낌으로 눈을 이렇게 부릅떠 봐.”

이 대표가 초코칩만한 눈을 까뒤집는 바람에 나는 풉 웃고 말았다. 이 대표가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며 ‘부릅, 부릅’을 외쳤다. 그렇게 한 번 실패한 후 표정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로맨스란 말이지? 누군가 루나를 노린다고 생각하면 절로 인상이 써진다.

구겨진 내 얼굴을 본 이 대표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됐다는 말이 없어서 계속 눈에 힘을 줬더니 순식간에 피곤해졌다. 그래서 은근슬쩍 멍하니 있었더니 엉뚱한 주문이 차례대로 날아왔다.

“뒤로 돌아서 고개만 이쪽으로 돌려 봐. 불량배가 툭 쳤다고 생각하고.”

“턱을 쳐들고 깔보는 얼굴을 해봐.”

“입 좀 크게 벌려볼래? 치아 다 보이게.”

“앞머리 좀 완전히 까볼래? 이마 선 좀 보자.”

“배꼽 좀 보여줄래?”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과장 조금 보태서 이거 생선이나 고기 상태를 살피는 시장 분위기와 흡사하지 않나? 기분 언짢아지려는데 오 감독이 박수를 짝 치며 일어났다.

“자!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는 속으로 욕을 씹었다. 씨발, 아픈 필립과 슬퍼하는 루나를 두고 허둥지둥 달려왔더니 한참 기다리게 하고 별 바보 같은 짓을 다 시켜놓고 겨우 밥이나 먹자고? 확 때려치우고 루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오로지 방긋거리며 좋아하는 저 천진난만한 이 대표 때문에 꾹 참았다. 가끔 그의 얼굴 위로 잘생긴 유니콘 한 마리가 스치고는 했던 것이다.

10명이나 되는 스텝들과 우르르 몰려간 곳은 스튜디오 내 식당이었다. 하늘은 벌써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인생이란 이상한 것이다. 루나가 내일 당장 떠나버릴 수도 있는데 이 소중한 시간에 나는 낯선 사람들과 밥이나 씹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없으면 이 짓거리가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저 1분 1초라도 그의 곁에 더 있는 게 장땡 아닌가?

“은별이는 무슨 음식 좋아하니?”

오 감독의 질문이었다. 조금 뜻밖이라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김치찌개요.”

“그래? 요즘 애들은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 거 좋아하던데.”

“우리 형이 김치찌개 잘 끓이거든요.”

이번에는 이 대표가 놀라 물었다.

“루나 사장님이 김치찌개를 끓여주셔?”

“그럼요. 뭐든 다 잘해요, 우리 형은.”

오 감독이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선글라스를 벗은 오 감독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보다 훨씬 선해 보이는 눈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해서 그렇지 젊은 시절에는 미남이었을 것 같았다.

“이 대표가 말한 루나커피 사장님 말이니?”

갑자기 경계심이 발동해 나는 조금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대표가 미인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나는 좀 괘씸해져서 이 대표를 슬쩍 꼬나보았다. 쓸데없는 수다를 떨고 그래요?

“지금 우리 회사에서 제작 참여하고 있는 드라마에 섭외하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요. 그저 루나커피에만 진심이신 분이더라고요.”

다행히 오 감독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곧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따위로 식탁이 차려졌고, 사람들은 왁자하게 떠들어대며 식사했다. 물론 나는 떠들지 않았다. 마음이 온통 루나커피에 가 있어서 다들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 귀담아듣지도 못했다. 그저 밥만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기승전도 없이 내 맞은편에 앉은 오 감독이 툭 말을 던졌다.

“「공중도시」 주인공은 정은별이다.”

나는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입에 든 밥을 꿀꺽 삼키고 되물었다.

“저, 말씀입니까?”

오 감독이 피식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김치찌개를 한 국자 푹 떠서 내 밥에 얹어주었다.

“오늘은 밥 먹고 가봐. 내일 회사로 와라.”

이 대표와 강 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둘은 작은 몸짓으로 하이파이브를 쳐대며 방정을 떨었다. 내 귀에는 밥 먹고 ‘가보라’는 말만 들렸다. 나는 빛의 속도로 밥을 삼켰다.

***

“형…?”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나는 이 대표의 차에서 내렸다.

서둘러 집으로 들어섰는데, 플럼버의 달빛은 휘영했지만 그 외에는 불빛이라곤 없었다. 루나는 어두운 것을 싫어해서 집 안을 늘 환하게 해놓곤 했다. 야간에도 마당의 조그만 가로등을 켜두는데 오늘은 그마저 꺼져 있었다.

순간 겁이 더럭 났다. 설마 필립이 잘못된 건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추스르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곧장 루나의 방으로 가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형, 나 은별이. 들어갈게.”

루나의 방도 컴컴했다. 욕실 쪽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은 확연하게 공포로 바뀌었다. 나는 방을 나와 복도를 뛰었다. 필립이 누워있던 손님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루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필립과 고양이들은 그 방에 그대로 있었다. 다행히 필립이 고개를 들었다.

“야옹?”

“필립, 괜찮아요?”

“은별이니?”

“네.”

“난 괜찮아.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루나는요?”

“방에 없어?”

“네, 없어요. 불도 죄다 꺼져있어서 집안이 깜깜해요.”

“이상하네. 혹시 가게에 내려갔나?”

“아…!”

휴무일이라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내려가 볼게요!”

나는 숨도 안 쉬고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나는 텅 빈 가게에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 커다란 좌표가 떠 있었다. 좌표에는 고풍스럽지만 스산해 보이는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얼핏 런던처럼 보였다.

루나는 내 쪽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조용히 다가갔다. 놀래줄 생각이었는데 좌표 화면이 루나커피로 바뀌더니 내 모습이 보였다. 루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은별아.”

“엇, 들켰네.”

“일찍 왔네.”

나는 그 앞에 앉았다. 순간 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테이블 위에 잔이 놓여있었는데, 루나의 앞이 아니라 맞은편 자리에만 하나 있었다.

“누가 왔었어?”

“응? 아… 로, 로저.”

“로저가,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어어. 넌, 일은 잘됐어?”

말머리를 급히 돌리는 게 영 수상쩍었다. 로저라면 왜 당황하는 거지? 물론 로저에 대한 내 경쟁심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둘이 얘기 나누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게다가 이미 깊은 관계를 맺은 우리 사이에 새삼 루나가 로저를 의식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필립의 일로 의기소침해 있을 루나를 그딴 일로 피곤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밤 나는 뭐가 됐든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형. 나 오 감독 영화에 주인공으로 발탁됐어.”

“오! 정말이야? 그렇게 빨리? 믿을 수가 없네. 하긴, 누가 봐도 너는 주인공이지. 정말 잘됐다. 축하해!”

그는 정말로 순수하게 좋아했다. 그런데 눈부신 그 웃음을 보면서도 왜인지 내 마음은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