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02화 (102/103)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102화>

제 방에서 한도 끝도 없을 것처럼 슬픔에 잠겨있을 때였어요. 수상쩍은 소음이 들렸어요. 꼭 루나커피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 같았죠.

가게 앞으로 좌표를 띄워보려는데 휴대폰이 울렸어요. 전화를 한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어요.

“희상이?”

- 사장님. 집에 계시죠? 저 문 좀 열어주세요.

저는 서둘러 가게로 내려가 문을 열었어요. 희상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가게에 들어왔어요. 모직 코트에 부츠, 승마 모자에 근사한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이 몰라볼 정도로 세련되었지만 얼굴은 울상이었어요.

“희상 씨. 런던에 있는 거 아니었어?”

“지금 왔어요.”

“혼자? 에릭은?”

제 질문이 무슨 끔찍한 말이라도 된다는 듯 희상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어요.

“어떡해요, 사장님. 전 어쩌면 좋아요?”

“왜 그래?”

“에릭이, 납치됐어요.”

“뭐?”

그동안 몹시 참았는지 희상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눈물이 연신 차올랐고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졌어요. 손도 얼음장이었어요.

저는 우선 희상이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를 테이블 앞에 앉힌 다음 뜨거운 홍차를 가져다줬어요.

“자, 차근차근 말해 봐. 에릭이 납치되다니, 그럼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지 왜 여기로 달려온 거야? 그리고 전화가 있는데 왜 안 했어?”

“감시당하고 있어요.”

“뭐…?”

다행히 더운 차 몇 모금에 조금 진정됐는지 평소의 침착한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은 희상이가 그간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설명해줬어요.

에릭은 아침마다 아파트 근처의 사무실에 도보로 출근하는데, 그날도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대요. 희상이는 학교까지 버스를 타야 해서 버스가 올 때까지 에릭이 함께 기다려주곤 한대요.

그날도 에릭은 희상이가 버스에 타는 것을 지켜보고 돌아섰어요. 그런데 그의 뒤로 낯선 남자가 다가오는 게 희상이 눈에 띄었어요. 그냥 지나치려니 했는데 그 남자가 하얀 손수건을 꺼내더니 에릭의 입을 꽉 막고는 끌고 갔다는 거예요. 희상이는 비상벨을 눌러 버스를 세웠고 서둘러 내렸지만, 에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지 뭐예요.

“어떻게 생긴 남잔데?”

“그냥, 평범한 런던 남자처럼 생겼어요. 키는 저랑 비슷하고 갈색 머리에 매부리코…. 덩치가 있기는 하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아침이라며. 출근하고 등교하는 시간이니까 누군가 봤을 것 아냐. 거기도 CCTV가 있을 거고.”

희상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어요.

“당연히 경찰서로 달려갔죠.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경찰서가 있었어요. 신고 접수하고 정황을 다 얘기했어요. 안심하고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만 하루가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다시 가봤는데 접수가 안 됐다는 거예요. 다시 신고를 접수하려니까 제 신원을 보증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데, 낌새가 영 이상했어요. 그래서 사장님이랑 로저 아저씨한테 전화했어요.”

“뭐? 난 받은 적 없는데. 로저도 아무 말 없었어.”

“그랬을 거예요. 전화가 걸리지를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희 집에 걸어봤어요. 집에도 걸리지 않았어요. 동생한테 메일을 쓴 것도 반송됐어요. 그제야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평소에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그냥 넘겼는데, 오래전부터 우리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기분이 가끔 들었거든요. 무심코 돌아보면 누군가가 화들짝 숨는, 그런 움직임 있잖아요. 그게 그제야 생각나는 거예요.”

희상이는 학교에서 친구에게 휴대폰을 빌려 저와 통화를 시도해봤대요. 벨이 울리고 제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다음은 먹통이었대요. 가족에게도 같은 시도를 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고 해요.

결국 희상이는 어떻게든 저와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공항으로 향했대요.

“런던에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이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사장님이나 로저 아저씨가 도와줘야 할 일인 것 같았어요. 로저는 태평양도 순식간에 건너시니까….”

그 부분에서 희상이는 하던 말을 멈추고 제 눈치를 살폈어요.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희상이는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충요. 하지만 에릭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요.”

“왜 물어보지 않았어?”

“물어보면, 에릭이 떠날 것 같았어요.”

희상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요.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점점 불안했어요. 어쩐지 에릭은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았거든요. 어느 날 교수님이 아프셔서 강의가 취소되는 바람에 에릭 사무실에 들렀는데 로저와 워튼 씨가 계시는 거예요. 저를 보고 세 분 모두 당황하시더라고요. 심지어 워튼 씨는 실내가운 차림이었어요. 같이 식사하시면 안 되냐고 했더니 돌아다닐 수 없다면서 사무실을 나가셨고, 그게 끝이었어요. 가운 차림으로 말이에요. 그런 비슷한 일을 몇 번 더 겪고 나니 저도 짐작이란 걸 하게 됐어요. 아, 저분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여행을 하시는 게 아니구나.”

그러면서도 에릭한테 물어보지 않았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애태웠을 희상이의 속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아무튼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면서 공항에 도착한 희상이는 겨우 공석이 난 비행기 티켓을 살 수 있었대요. 그제야 희상이가 왜 이렇게 차려입었는지 알았어요. 일종의 변장이었던 거예요.

“로저에게 알려야겠다.”

제 전화를 받은 로저는 한달음에 루나커피로 달려왔어요. 저는 희상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고, 이야기를 다 들은 로저는 어떻게든 에릭의 행방을 알아내겠다고 했어요. 겨우 희상이의 안색이 밝아지는 것 같았어요.

“희상 군은 당분간 나와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네. 호텔 같은 곳은 위험할 테니. 가급적이면 집에도 알리지 않았으면 하네.”

희상이는 그러겠다고 말하고는 로저를 따라 나섰어요.

두 사람이 나가자 루나커피에는 정적이 흘렀어요. 평소의 저는 이 정적도 좋아했는데, 그날 밤은 너무나 쓸쓸했어요. 누군가 우리를 상자에 집어넣고 압축기가 달린 뚜껑을 덮어 서서히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은별이가 돌아와 희상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어요. 벌써 스타 감독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니, 대단하지 뭐예요! 기뻤어요. 기쁜데….

눈물이 나네요. 은별이와 저 사이에는 억 겹의 시공간이 놓여있어요.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엄마도 이랬을까요? 운명의 이름을 부르며 병들어갔을까요? 아빠를 아프게 하고 어린 내가 아빠를 미워하게 만든 엄마가 이제는 너무나 원망스럽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엄마의 갈망은 제 가슴까지 쓰리게 만들었어요.

여러모로 저는 엄마를 닮았는데, 저도 엄마 같은 팔자를 타고난 걸까요? 은별이를 여기에 두고 수십 광년의 차원을 넘어 평생을 그리워만 하다가 고통 속에 죽어갈까요?

아마 그럴 거예요. 인생이란, 때로 끝을 알면서도 가야만 하는 암굴 같은 것이니까요.

***

불안한 시간이 또 흘렀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다행스럽다고 할까요, 은별이는 정신없이 바빠서 루나커피에 일어난 사건들을 전혀 알지 못해요.

은별이의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고, 촬영날짜가 잡혔어요. 엄청난 개런티를 받고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잠시나마 제 우울한 기분이 훨훨 날아갔어요. 이 대표가 팬카페를 신설했는데 벌써 회원이 10만 명에 달한답니다.

오승철 감독이 워낙 스타 감독이다 보니 햇병아리 신인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는 소식은 연예계 핫 이슈가 되었다고 해요. 그래도 이 대표는 당분간 신비주의 전략이라면서 은별이를 방송 매체에 내보내지 않고 있답니다. 다만 인터넷에는 간간이 사진과 소식을 올리면서 관심을 끌고 있어요. 알고는 있었지만 수완이 무척 좋은 사람이에요.

은별이의 모습을 인터넷으로 보는 기분은 좀 이상했어요. 다음 주에는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고 해요. 그걸 보는 기분이 어떨지 아직은 상상도 가지 않네요.

그나저나 첫 신부터 지방촬영이 잡혀있다고 해요. 보통 지방과 야외 촬영을 먼저 하고 마지막에 스튜디오 촬영을 한대요. 바다와 산이 있는 도시인 Y시가 첫 촬영지라고 했어요. 7박 일정으로, 새벽 일찍 출발하기로 되어있었어요.

은별이가 출발하기 전날 저녁, 로저를 불러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희상이도 부르고 싶었지만 은별이에게까지 에릭의 실종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요한 일 앞둔 애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 필립은 상태가 좋아졌어요. 제법 움직이기도 하고 밥도 곧잘 먹는답니다. 일시적인 기력 쇠약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 밤 은별이가 제 방에 왔어요.

“형. 나, 줄 거 있어.”

“뭔데?”

은별이는 쑥스러운 듯 혀로 입술을 핥으며 제 눈치를 봤어요. 그리고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어요. 그 상자를 보자마자 저는 그게 뭔지 알았어요.

은별이가 상자를 열어 제게 내밀었어요. 은빛으로 빛나는 커플링 두 개가 꽂혀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감격해서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리고 말았어요.

“내 영원한 짝이 되어줘.”

개런티가 어마어마하다며 싱글벙글하던 은별이 얼굴이 떠올랐어요. 이런 짓을 하려고 그렇게 좋아했나 봐요. 저야말로 채신없이 너무 좋아하면 안 되는데 저절로 눈물이 고였어요. 눈물방울이 흘러내리자 걷잡을 수 없었어요. 어느새 저는 은별이 품에 안겨 흐느끼고 있었어요. 은별이가 저를 안으며 속삭였어요.

“사랑해, 형. 나만의 루나 블랑슈.”

“어쩌자고….”

“응…?”

저는 이성을 잃고 말았어요. 은별이 가슴을 두들기며 강짜를 놓기 시작했어요.

“어쩌자고 이래?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해? 응?”

제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은별이가 제 손목을 잡았어요. 그리고 반지 하나를 손가락에 끼운 다음 자기 손가락을 제게 내밀었어요. 저는 떨리는 손으로 나머지 반지를 은별이 손가락에 끼워줬어요. 은별이가 이제 됐다는 듯이 큰 한숨을 내쉬며 저를 끌어안았어요.

“형이 어디에 있든, 있어주기만 하면 돼. 난 형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있을 거야.”

“바보야.”

“알아. 난 루나 바보잖아.”

“바보.”

저는 더 이상 울지 않았어요. 대신 은별이의 뺨을 감싸 안고 입을 맞췄어요. 따스한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어요. 우리는 당연하게 서로를 원했어요. 연인이란 그런 거군요. 안고 싶고 안기고 싶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 말이에요. 평생 은별이만 안고 있으면 좋겠어요.

은별이의 더운 숨을 삼키면서 저는 마음먹었어요.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미리 이별하지 않겠다고요. 떠나야 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은별이를 사랑하겠다고 말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