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03화 (103/103)

<103화>

루나와 두 번째 밤을 보냈다.

내 품에 안겨 잠든 그의 모습은 여전히 내게는 상상의 산물 같았다. 나는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밤은 너무 짧고 새벽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4시가 조금 안 되어 나는 루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촬영지의 숙소가 리조트라서 도착하는 대로 샤워와 메이크업을 하면 된다고 했기에, 나는 내 방으로 와 양치와 세수만 한 다음 편한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소지품이 든 배낭을 메고 방을 나와 건너편 손님방을 열어보았다. 가릉거리며 코 고는 소리가 나기에 안심하고 문을 닫았다. 요즘 필립은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늘 지키고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당으로 내려오니 하늘은 불안할 정도로 파랬다. 차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었다. 그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대문을 나온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새벽이라 차도 없고 행인도 없었다. 덕분에 로저의 집까지 8분 만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한동안 기다리니 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자 트렁크 팬티와 러닝 차림의 로저가 부석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냐?”

“잠깐 들어갈게요.”

로저는 고슴도치처럼 위로 뻗친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소파에 앉았다. 나는 제법 깍듯한 태도로 사과의 말을 건네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새벽부터 쳐들어와서 죄송해요.”

로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란 녀석이 그렇지 뭐.”

“뭔가 제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로저는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흘긋 보고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알려주었다. 에릭이 납치되었고, 감시당하던 희상이 형이 어렵사리 한국으로 와 지금 이층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 브라이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브라이언 킴을 찾아간 로저는 그의 멱살을 잡고 에릭을 납치한 배후를 말하라고 다그쳤다. 브라이언은 유럽의 외계인연구소 본사는 한국지사보다 열 배는 강력한 권력기관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을 후원하는 것은 여러 나라의 정부나 다국적 기업이라고 했다. 한국지사는 그저 만일의 사태를 위해 개설해놓은 관리부서일 뿐이며, 따라서 브라이언에게는 본사의 일에 간여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에릭이 외계인연구소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알아낸 거네요.”

“그래. 그리고 어제 조르주와의 교신에 또 성공했다. 잘하면 그가 도울 수 있다고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조르주는 정부와 항공국의 도움을 받아 에릭의 위치를 알아내겠다고 했다. 위치를 알아내면 좌표를 열어 그 자리에서 에릭을 플럼버로 보내는 것이 로저와 조르주의 계획이었다.

“그럼 희상이 형은요?”

로저는 침울한 얼굴로 이층을 힐긋 보았다.

“희상이도 우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 극복해야겠지. 지금으로서는 에릭을 구할 방법은 그게 최선이니까.”

그쪽 커플도 그런 상황인 건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나 역시 울적해졌다.

“그리고…. 아치볼트와 엘리아가 조만간 도킹을 시도하기로 했어. 만약 성공한다면 워튼 씨도 곧 가게 될 거야. 나 역시 마음을 굳혀야 할 거고. 그러면 결국 루나만이 남게 되는 건데….”

이제 로저는 루나를 배필로 얻고자 하는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는 친구로서 정말로 루나와 필립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아저씨.”

“응?”

나는 결연한 얼굴로 로저를 바라보았다. 눈에 힘을 좀 줘야 울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루나가 안 간다고 했어요?”

로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한테는 간다고 했어요.”

로저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는 루나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두렵기도 하겠지만 나는 루나가 단순히 무서워서 망설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가 망설이는 건 필립 때문일 것이다. 필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여기에 남는다는 것에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로저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도 사람이니까, 어째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거겠지.”

“꼭 데려가주세요.”

“응…?”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고 꼭 데려가 달라고요. 이번엔 저도 여행 가방 따위에 숨지 않을 테니까요.”

“루나를, 보내주겠다고?”

“그래야 하잖아요. 루나가 위험해지는 꼴은 죽어도 못 봐요. 차라리 제가 힘든 게 나아요.”

“하지만 너희 둘….”

“우리, 운명이 알려준 대로 진짜 연인이 됐지만 일단 살아남아야 사랑도 하는 거잖아요. 루나가 에릭처럼 험한 일 당하거나 하면 저는 미쳐버릴 거예요.”

로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인사도 못 하고 가버릴 수도 있어. 에릭을 찾아서 보내고 나면 나머지도 곧장 도킹을 시도할 생각이야. 우리가 플럼버와 교신에 성공한 걸 눈치채면 저들이 더 급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높거든.”

예상보다 더 빨리 이별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은 내 가슴을 후벼 팠지만 나는 티 내지 않으려고 웃었다.

“알았어요.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요. 그때까지 내가 이런 말 한 거 루나한테는 비밀이에요.”

“은별아.”

“아저씨도 잘 가세요. 혹시라도 인사 못 할지 모르니까 지금 할게요.”

나는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했다. 로저가 내 뒤를 따랐다.

“은별아.”

나는 그를 돌아보지 못했다. 짜증 나게도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던 것이다. 젠장, 씨발, 욕을 씹으며 나는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었다. 로저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은별아, 잠깐만.”

“왜요?”

“한번 안아보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돌아보고 말았다. 어른거리는 시야에 그의 얼굴도 울먹이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우는 것은 나인데 말이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를 안았다. 그도 나를 안았다. 그 순간 한심하게도 울음보가 터졌다. 아무리 어른답고 멋진 사람이라는 걸 인정했다고 해도 연적은 연적인데 이 남자 품에 안겨 울어버리다니.

“씨발.”

혼잣말처럼 내뱉은 내 욕지거리에 로저는 자그맣게 웃고는 내 등을 토닥였다.

“넌 멋진 놈이야. 잊지 못할 거다.”

“아저씨도 괜찮은 사람이에요.”

“건방진 녀석.”

“이왕 쪽팔린 김에 마지막으로 부탁 좀 할게요.”

“뭐든지.”

“저 운 거 루나한테는 영원히 비밀이에요.”

로저는 후후 웃으며 나를 놓아주었다.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나는 씨익 웃어보이고는 재빨리 현관문을 열었다.

쏜살같이 대문을 빠져나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총알처럼 달렸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내 눈물을 얼리는 것 같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나는 루나커피로 돌아왔다.

마당에 자전거를 들여놓은 후 큰길로 나오자 얼마 후 이 대표의 승합차가 저 멀리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저 루나와의 이별을 미리 슬퍼하고 있었을 뿐.

***

숙소인 리조트는 시설이 좋은 편이었다. 산골이 촬영지로 잡히면 밴에서 자거나 야영을 하기도 한다는데 이 정도면 대단히 괜찮은 거라고 강 팀장이 말해주었다. 나야 몸 뉘일 곳만 있으면 야영을 하든 노숙을 하든 별 상관없었지만, 강 팀장은 내가 꽤 곱게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기분이 몹시 꿀꿀해서 그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연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만약 내가 여기에서 이 짓을 하는 동안 정말로 루나가 떠나버린다면? 그 생각을 하면 미칠 것 같았다.

샤워하고 헤어와 메이크업도 마치고 이 대표와 함께 촬영지로 떠났다. 리조트에서 20분도 안 걸리는, 바닷가 절벽 위의 산속이 첫 촬영지였다. 수백 년을 살아온 소나무 숲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대표는 승합차에 텐트까지 싣고 와 내가 간간이 휴식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두었다.

다행히도 쫓고 쫓기는 액션 신이라 대사는 거의 없고 감정 연기도 단순했다. 지금 내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기에 오히려 연기가 리얼해졌다. 괜스레 박수 세례까지 받으니 죄책감마저 들었다. 이건 연기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그리고 저 절벽에서 뛰어내려 그대로 플럼버로 도킹해버리고 싶었다.

엄청난 환호와 함께 첫날의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 스텝들은 남아서 정리를 끝내야 했지만 연기자들은 숙소로 향했다. 제작사에서 대절한 버스가 있지만 주연급 배우들은 거의 소속사의 차량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나 역시 이 대표의 차를 타고 움직였다.

산길을 반쯤 내려갔을 때였다.

“우와, 달이 엄청 크네.”

운전하던 강 팀장의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모처럼 보는 보름달이었다.

루나와의 첫날밤, 내 성인식 날에도 저런 달이 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견딜 수 없이 루나가 보고 싶었다. 그와 키스하고 그의 살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 도톰한 입술을 떠올리자 종일 물 한 모금 못 마신 사람처럼 갈증이 났다. 목이 근질거리고 뱃속도 근질거렸다.

아니, 이건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내 안에 뭔가가 있었다. 그것이 꿈틀거리며 나를 뚫고 나오려 했다. 급기야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마침내 나는 비명을 질렀고, 내 비명에 차가 비틀거리며 갓길에 멈췄다. 강 팀장과 이 대표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지만 이내 시야가 흔들려 뒤죽박죽이 되었다.

“은별아! 왜 그래?”

“뭐지? 식중독인가? 아까 점심으로 먹은 김밥 좀 상한 것 같지 않았어?”

“아니… 그보다 쟤, 왠지 좀비 될 것 같은데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병원으로 가자!”

그 와중에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로저의 목소리가 아픈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발현할 거야.

“루나….”

이 대표가 물었다.

“뭐라고?”

“형을 좀…. 우리 형….”

“형? 루나 사장님 말이야?”

“불러 줘…요. 우리 형 좀, 당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