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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48화 (125/256)

48화

장선욱의 주도하에 설계된 구속 장치는 다목적용이었다. 수혁을 자해해서 보호하는 동시에 정신계통 능력자에게 조종당하지 않도록 했다.

구속 장치는 수혁을 통제하기 위해 텔레파시가 아닌 외따로 가이드 시스템이 따로 필요한 사소한 이유 중 하나였다.

눈치가 빠른 임성준은 수혁을 더는 귀찮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수혁을 돌아봤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이 임성준의 뒤통수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봤기 때문이었다. 오감이 발달한 에스퍼 군인으로서 시선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수혁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알아서 사리라는 신호를 임성준에게 팍팍 보내던 중이었다.

“웬일이야? 제시간에 다 모였네!”

격납고 입구에 시끄러운 새끼가 나타났다.

“임 중위야 늘 시간 엄수고, 장세인 대위도 안 늦었군. 놀라운 건 역시 우리 강수혁 소령이랄까?”

해가 중천에 오르지도 않은 이른 아침부터 약이라도 했는지 최정이 상큼발랄하고 자빠졌다.

눈치가 있어서 쥐죽은 듯이 조용한 임성준 대신에 수혁의 시선은 좀 더 불쾌한 최정 쪽으로 이동했다. 시선을 마주하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낯짝이 금방 찌그러졌다.

“이야, 눈깔 한번 살벌하네. 일주일 동안 너무 잘 쉬었나 봐, 강 소령.”

“…….”

묵묵히 쳐다만 봤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오로지 최정을 쳐다만 봤다.

이쪽의 심기를 잘 알아차린 최정이 금방 시선을 임성준 쪽으로 돌렸다. 임성준이 고개를 살짝살짝 저었다.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최정이 목을 가다듬더니 브리핑용 투사기를 작동시켰다. 격납고 천장 곳곳에 설치된 레이저 영사기가 공중에 3D 영상을 만들었다. 오늘 날짜에 훈련 목표라고 쓰인 입체 글자가 360도로 빙빙 돌았다.

“오늘은 특작부 최강 전력인 귀군들의 컨디션과 가동 리미트를 점검하는 정기 테스트이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 질문 있나?”

나머지 두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늘 하던 훈련 및 테스트라 과정 설명도 필요 없다. 저럴 거면 투사기는 왜 켰나 싶을 정도다.

수혁은 다른 두 사람과 달랐다.

“나는 왜 불렀지?”

이런 귀찮은 절차 따위 졸업한 지 10년도 넘었다. 애초에 수혁의 한계를 측정할 만한 장치조차 없다.

“일단 이유를 들어 보지. 하지만 이유가 내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오늘부로 이 격납고는 사라진다.”

딱딱한 어조로 경고하자 최정이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보다 어린 부하 놈이 찍찍 내뱉는 반말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강 소령 때문에 부른 거 아니야. 강 소령은 엄밀히 말해 훈련 보조야.”

“보조? 내가? 누구를?”

그때 격납고 인근에서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기척이 났다.

군용 지프가 엔진에 불이 날 만큼 맹렬하게 폭주했다. 목적지는 아무리 봐도 수혁이 있는 격납고였다.

누가 건물과 사람이 넘치는 부대 내에서 저런 폭주를 하겠는가.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사람은 소수다.

하나는 수혁 자신, 그런데 수혁은 이미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폭주 지프를 몰고 이 자리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그런데 심나연,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엔진 소리를 아직 듣지 못한 최정이 심중에 있던 이름을 뱉었다.

심 박사를 기다리고 있다면 아마도 오늘 수혁이 훈련을 보조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김윤조였다. 구겨졌던 기분이 살짝 펴졌다.

“오는 중이야. 그런데 거기 서 있으면 최 대령 당신, 죽어.”

“나를 왜? 내가 뭘 했는데?”

최정은 수혁이 자신을 죽인다는 줄 알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면서 수혁이 추정하는 지프 경로에서 아슬아슬하게 비켜났다.

부앙!

별안간 격납고 입구를 뛰어넘은 지프는 최정에게 부딪히기 직전 거친 드리프트를 했다.

끼이이익!

“으아아악!”

최정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스키드 마크를 그리며 멈춘 지프 운전석에는 역시나 수혁이 껄끄러워하는 작자가 있었다.

“강수혁, 정말로 있었네?”

심 박사가 지프 운전석에서 내리는 동안 조수석에서는 김윤조가 내렸다. 그는 흰색 가이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에이 씨. 강수혁, 너는 사람이 갑자기 바뀌고 그러면 안 돼. 안 하던 짓 하면 일찍 죽는다고. 아니지, 이 새끼는 일찍 죽는 편이 낫나?”

그걸 의문이랍시고 골몰하는 심 박사를 향해 윤조가 손을 내밀었다.

“판돈이요.”

“달아 놔.”

심 박사가 귀찮은 듯이 손을 저었다.

“달아 놓기만 하고 안 주신 판돈이 벌써 11만 5천원입니다. 이달 말에 꼭 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안 떼먹어. 이 자식아.”

신경질을 내는 심 박사를 상대로 김윤조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둘이서 사람을 놓고 내기를 하다니. 하여간 심 박사가 문제다. 순진한 애를 자꾸 나쁘게 물들인다.

지프에 치일까 봐서 깜짝 놀라 튀었던 최정을 향해 심 박사가 다가갔고 김윤조는 그 뒤를 졸졸 따랐다.

“꼭 주세요. 저 살 거 있어요.”

“네가 살 게 뭐가 있는데?”

“그런 게 있어요.”

그때 김윤조는 이쪽을 봤다. 눈이 마주친 수혁은 움찔했다.

‘무슨 신호지? 왜 날 보지?’

살 게 있다면서 의미심장하게 수혁을 봤다. 그러니까 꼭 사야 하는 물건이 수혁 자신과 뭔가 연관이 있다는 뜻인가?

‘설마 내 선물?’

혹시 생일이 다가오나 얼른 짚어 봤으나 한참 남았다. 앞뒤로 명절이나 별다른 기념일도 없다.

‘갑자기 선물을 왜? 혹시 동거 기념으로 뭔가를 준비하는 건가? 이때까지 잘해 줬으니 감사의 인사로?’

그럴 수 있다.

김윤조는 일주일 내내 수혁을 취사병으로 이용해 먹었다. 능력 쇼를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당연히 식사 담당이 수혁으로 정해진 상황이었다.

그뿐인가. 김윤조 새끼는 샤워하고 벽면에 묻은 거품을 물줄기로 쓸어내는 기본적인 뒷정리도 할 줄 모르는 놈이다.

청소는 당연히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심지어 빨래는 세탁기 안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데도 안 하고 땀내 나는 걸 최대한 말려 입거나 혹은 수혁의 옷을 훔쳐 입었다. 본인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그러다 보니 세탁도 결국 수혁의 몫이 되었다.

선천적으로 보유한 막강한 능력을 다양하게 익히는 차원에서 가사를 이것저것 하다 보니 숙련이 되어서 크게 힘들진 않다. 그런데 이건 뭐 부하와 동거를 하는 건지, 귀중하신 군 자산 가이드님을 모시고 사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고 싶을 때 바로 할 수 있다는 장점만 아니라면, 김윤조는 동거인으로서 최악이었다.

그런 일상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강수혁을 달래기 위한 뇌물, 그게 가장 타당한 추론 같다.

‘뭘 사려고? 연봉도 상당할 텐데 굳이 판돈까지 챙기는 걸 보면 뭔가 값이 나가는 건가.’

김윤조에 비해 4계급이나 높은 수혁이 손수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했다. 심지어 노출증 증세가 있는 놈을 위해 마트에서 속옷까지 가져와 건넸다. 이 정도면 커플 동거로 봐도 무방하다. 감사 인사로 대단한 걸 준비해야 할 텐데.

‘커플이라…… 설마.’

다른 곳은 몰라도 이 땅에는 커플링이라는 깜찍한 문화가 있다. 둘의 관계를 두고 생각하자면 ‘그럭저럭’ 괜찮은 선물이다.

수혁의 가동 범위를 고려하건대 얇은 건 하루 이틀 만에 박살 난다. 아주 두껍고 튼튼한 놈으로 해야 했다. 각종 특수 장비 덕에 금 수요가 늘어서 금값이 치솟고 있기에 준위 월급으로는 마련하기엔 빠듯할 거다.

‘팔찌는 번거롭고 비싸고. 역시 반지겠지.’

그간의 관계를 고려해서 김윤조가 사정한다면 동그라미 모양 장신구 하나 정도는 걸쳐 줄 수 있을 것 같다.

“알았어. 월급 들어오면 이번엔 꼭 줄게. 그런데 최정 너는 왜 거기 자빠져 있냐? 볼썽사납게.”

심 박사의 확답을 받고서야 만족한 김윤조는 수혁을 향해 걸어왔다. 아까 간이 의자를 구겨 만든 철제 공을 기이한 눈으로 보더니 당연한 듯이 수혁의 옆자리에 툭 앉았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제 자리를 찾을 줄 안다. 귀여운 새끼.

옆을 물끄러미 보던 수혁은 문득 말했다.

“야, 나는 심플한 민짜가 취향이야.”

“예?”

정면을 보던 김윤조가 이쪽을 돌아봤다.

“이니셜 각인 정도는 참아 줄게.”

“음?”

마치 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렸다. 염색이 빠져서 갈색이 된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게 꼭 만화에 나오는 얄미운 생쥐 같았다.

“주목, 김 준위까지 왔으니 오늘 훈련 개요를 설명하겠다.”

최정이 입을 열었다. 설명을 요약하자면 훈련 내용은 최근 높아진 동조율을 바탕으로 한 에스퍼-가이드 간의 본격적인 전투 모형 학습 및 모의 실전이었다. 훈련의 주 타격 목표는 모의 소형 게이트와 모형 플라이. 본부에 있는 메인 장비 대신 야전 실전 장비를 사용한다.

설명이 끝났을 때쯤 훈련 내용을 기록하고 분석할 특작부 산하 연구원들과 함께 야전 장비 운용팀이 나타났다.

최정의 지휘에 따라 특수 병사들이 격납고에 야전 장비를 설치하는 동안 심 박사는 연구원들과 함께 김윤조를 에워쌌다. 곧 가이드용 특수 위성이 정위치로 이동하고, 시각 자료를 채집할 카메라 드론이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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