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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54화 (131/256)

54화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졌다.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우스워서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주가 마시고 싶은데 어쩐지 능력을 쓰기가 싫어졌다. 오랜만에 직접 걸어서 보통 인간처럼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그러는 사이 놈이 옆으로 슬쩍 와서 붙었다.

“복수 도와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맥주를 마시다 말고 수혁은 코웃음을 쳤다.

“잘도 그러겠네. 내 능력이 필요해서 가이드가 된 주제에.”

“그게 싫으시면 가이드는 멋있어서 지원한 것으로 하죠.”

잠시 침묵하던 놈이 개소리를 짖었다.

“이게 누굴 등신으로 아나!”

은은한 숯불처럼 도사리던 화가 갑자기 불쑥 치솟았다.

수혁의 안색을 살핀 놈이 삐질삐질 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심플하게 가자면서요? 제 말도 심플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심플할 게 따로 있지.”

놈이 뒷걸음질을 쳤다. 수혁은 틈을 주지 않고 바싹 다가섰다.

이 새끼를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나는 거였다.

어느새 놈의 등이 현관과 거실을 나누는 사각 기둥에 닿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자 놈은 고개를 바싹 들었다. 흰색 전투복 위로 삐죽 튀어나온 매끈한 목이 꿀꺽 울렸다.

“그래도 좋게 잘 끝난 일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지 맙시다.”

“구질구질? 오늘 이후로 당분간 걷기 싫은가 보다. 우리 가이드님.”

이미 붙은 몸을 확 밀어붙였다. 아무렇게나 버린 맥주 캔이 바닥에 뒹굴었다.

“으악!”

어느새 냉랭한 낯짝을 내다 버린 놈이 괜한 엄살을 떨었다.

“경고합니다. 떨어지십시오.”

“경고? 시발, 어디 패널티 한 번 더 날려 봐. 어떻게 되나 보게.”

그러든가 말든가 수혁은 놈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아직 전투복 차림이기에 하체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분노가 서서히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가이드 시스템 때문에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다.

‘이 미친 새끼야. 이 상황에서 서냐.’

자괴감마저 들려고 했다.

패널티를 다시 날릴 배짱은 없는지, 놈은 불안하게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왜 가만히 계시나, 우리 가이드님?”

뒤틀릴 만큼 뒤틀린 수혁은 자연스럽게 비꼬았다.

“여기서 또 패널티 날리면 저 영창 가겠죠? 정신 교육 일주일 정도?”

“당연하지. 시발.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진짜 날릴 생각이 있긴 했는지, 놈이 죽상을 했다.

이 새끼는 학습 능력이란 게 없나?

중급 꼰대 둘이 나타나서 잔소리를 퍼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심지어 수혁마저 질려서 김윤조를 어떻게 할 마음이 사라진 마당이었다. 제멋대로인 고집쟁이인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고집에도 등급이 있다면 이 미친 새끼가 단연코 전국 최강이다.

“하여간 너는 항상 내 뒤통수칠 궁리만 하지.”

“지금에서야 말씀이지만, 저도 제 의지로 친 게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가진 훈련 및 테스트의 일환…….”

수혁은 한 손으로 놈의 양 뺨을 꽉 잡아 눌렀다.

“입 다물어.”

숫자 8 같은 오리 주둥이가 된 놈이 눈을 깜빡였다.

“다무기 힝드네여.”

다방면으로 어이없는 새끼.

화는 나고, 이 새끼를 때릴 순 없고. 그렇다면 남은 건 한 가지 방법뿐이다. 어차피 훈련이 끝나면 할 거였고, 무엇보다 그 지랄을 겪고서도 또 섰다.

역시 가이드 시스템은 수혁이 겪은 군부의 수작질 중에 단연 최악이었다.

수혁은 고개를 비틀며 내렸다. 입술을 얄미운 오리 주둥이에 겹쳤다. 다량의 두려움과 소량의 허세로 발발 떨리던 놈의 눈동자가 얇은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놈은 양팔을 수혁의 목에 둘렀다. 볼록 튀어나왔던 오리 입술이 말캉한 혀와 함께 수혁에게 감겨들었다. 적극적으로 나오는 태도로 보아, 사죄는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키스가 길게 이어지기 전에 수혁은 입술을 뗐다.

놈은 ‘왜 벌써?’라는 의문을 담고서 수혁을 응시했다.

꿍꿍이로 속이 시커먼 성인 남자 주제에 순진무구한 눈깔이라니. 빌어먹을.

당장 잡아먹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수혁은 상황을 정리했다.

“아까 말한대로 심플하게 가자. 너는 가이드, 나는 에스퍼.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정확하게 페어링한 에스퍼-가이드로서만 지내는 거야. 덧붙여서 팀원이 같은 팀원에게 핵심 정보를 배제하고 다른 놈에게 우선 협조하는 건 팀원에 대한 배신 행위니까 앞으로 절대로 그러지 마.”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한 훈련이었다. 힘을 쓴 이후에 강력한 패널티를 처맞은 신체가 재생하면서 자연스럽게 흥분도가 올라갔다. 무슨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시발.

“지금 벗을까요?”

죄를 지은 놈이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사람을 쉽게 달래려는 태도에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나긋하게 감기는 몸에 대한 욕망이 짜증을 압도하고 남았다. 페어링된 가이드 앞에 에스퍼는 배알도 없는 멍청이였다. 지금 이 순간 그 멍청이의 이름은 바로 강수혁이었다.

“전투복 쪽이 색달라서 좋아.”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수혁은 제게 감기는 몸을 어루만졌다.

“그래요? 그럼 고장 내지 마십시오. 안 그러면 또 3주 정도 못 보십니다.”

“너는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뻑 하면 고장 내게.”

벽과 수혁 사이에 끼인 놈은 자연스럽게 살짝 떴다.

“근데 섹스는 팀 작전에 들어가는 겁니까?”

“둘이 하는 거면 팀 작전이지.”

“인원이 아니라 작전 여부가 궁금한 건데요.”

“왜? 작전 아니고 싶어?”

“작전 아닌 옵션이 있습니까?”

“있지.”

“뭔데요?”

“같이 사는 사람 둘이서 합의하에 하는 섹스잖아. 과연 뭐 같아?”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멀뚱한 표정도 그럭저럭 괜찮지만 찡그린 표정이 생기가 돌아서 훨씬 좋았다. 이 얼굴을 보려고 자꾸 시비를 거는 건지도 모르겠다.

먹물 먹은 눈알이 도록도록 구르더니 이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작전할게요.”

“왜?”

단언하는 놈을 향해 되물었다.

“섹파보다는 나으니까요.”

섹파라는 단어에 수혁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섹파? 발상을 그렇게 밖에 못 해?”

“섹파 아니면 뭔데요? 금전이 오가는 성매매는 아니잖아요. 아니 대가성이 있으니 성매매 맞나?”

“…….”

한술 더 떠서 성매매까지 나온다. 성폭행을 떠올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명치에서부터 냉랭한 기운이 퍼졌다.

둘은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긴 하다. 그리고 오늘 이 새끼가 떤 갖은 지랄을 감안하면 앞으로 그렇게 될 확률도 지극히 낮다.

‘반지는 개뿔.’

그런 걸 줘도 어차피 수혁을 구슬릴 수단에 불과함을 안 이상 기분 좋을 리가 만무했다. 그건 등에 들러붙은 징그러운 자폭 장치의 액세서리 버전일 뿐이다.

* * *

화해하는 최고의 방법은 섹스라고 누가 말했던가.

‘애인 사이도 아니고 이게 뭐야.’

윤조는 공중 들린 채로 격렬하게 흔들리는 제 종아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요격 훈련으로 능력을 사용한 후에, 패널티로 뇌까지 탈탈 털린 에스퍼는 응당한 보상을 요구했다. 재생력이 있는 에스퍼를 상대하는 동안 윤조의 체력과 수명이 푹푹 깎여 나갔다.

“아! 읏!”

무지막지한 길이와 굵기를 자랑하는 성기가 내장을 짓이기다 못해 터트려 먹는 게 빠를지, 혹은 거친 추삽질의 충격이 척추를 분질러 놓는 쪽이 빠를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는 건, 이렇게 거친 행위임에도 행위에 익숙해진 몸은 성적 자극에 도취 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뿌연 통증은 오히려 쾌감에 가까웠다.

이마에서, 들뜬 등골에서 땀이 삐질삐질 샜다. 상대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윤조가 흘린 땀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단한 허리에 감긴 다리도 어느새 촉촉해져서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풀리려고 했다.

강수혁의 행위는 아득할 정도로 길었다. 그래서 지루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하고 나서도 다시 서는 것뿐이었다.

그가 세 차례 뿜어낸 흔적이 윤조 안을 흥건하게 적셨다. 두꺼운 성기가 구멍을 벌리면서 깊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르게 빠져나갈 때, 흰 점액질이 마찰부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으, 아.”

“후으.”

귓가에 더운 숨이 훅 끼쳤다. 더불어 가슴을 압박하는 무게가 더해졌다.

강수혁은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때때로 윤조를 눌러 터트리려고 들었다. 꼭 인간 모양의 프레스기 사이에 끼인 느낌이었다.

무슨 기계를 돌리는 듯 쉼 없이 박아대는 몸짓에도 약간의 강약은 존재했다. 한참 피치를 올리더니 속도를 약간 늦춘다 싶었다. 두꺼운 귀두가 부푼 입구 주름까지 내려가더니 이내 내장을 저 깊은 곳으로 돌진했다.

딱딱한 기둥의 끝이 하필이면 가장 약한 부위를 들이박았다.

“허억!”

그렇지 않아도 초점을 잃어 가던 눈앞에 형광색 불꽃이 퍽 튀었다. 목이 뒤로 꺾이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충격은 감내하지 못해 전신이 굳었고, 덩달아 목구멍도 턱 막혔다.

“크…읏.”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에스퍼가 다시 사정했다.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였다.

“하아.”

네 번은 또 신기록이었다. 그러니까 하다가 기절하지 않게 된 이후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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