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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85화 (162/256)

85화

쿵!

갑판 아래에서 묵직한 진동이 퍼졌다. 순간 캐나다 사령관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지원이 필요한가.”

노리스가 침착하게 물었다.

“네. 당장.”

사령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리스를 경호하던 미 해군 소속 에스퍼 네 명이 자취를 감췄다.

* * *

오랜 합을 맞춰 온 캐나다 에스퍼 팀에겐 최적화된 공격 포메이션이 있었다.

포메이션은 주로 투명화 능력자가 뒤로 접근하여 상대를 붙잡으면 다른 하나가 얼른 붙여서 놈의 움직임을 염력으로 고정하고, 다른 하나는 물건을 집어 던져서 공격하는 사이 화염 능력자가 상대의 몸에 불을 붙이곤 했다.

그 과정은 거의 1초 만에 이루어졌는데, 웬만한 에스퍼라면 피할 길 없이 당할 만큼 꽤 괜찮은 수법이었다.

문제는 수혁의 능력 범위는 보통 S급 에스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넓었고, 솔직히 말해 능력을 완전히 활성화한 이상 이 항모 전체가 이미 그의 수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놈들이 미처 몰랐다는 점이었다.

투명화 능력자는 수혁을 붙들기 전에 오버로드되는 염력의 기세에 떠밀려 나가떨어졌고, 염력 능력자 둘은 동시에 벽에 처박혔다. 틈을 노린 화염 능력자가 수혁의 몸에 손을 대려는 찰나, 막혀 있던 천장 배관 하나가 뚝 부러지더니 액화 질소가 놈의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그 뒤로 놈들은 전부 수혁의 염력에 붙잡혀 의무실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면서 곳곳에 핏자국이 흩뿌려졌다. 그 과정에서 핏방울이 롭슨의 얼굴에도 쫙 뿌려지는 바람에 그는 새된 비명을 한껏 질렀다.

에스퍼 특유의 스탤스 전투복을 입은 네 덩어리가 의무실 대각선 위쪽 모서리에 처박혔다. 처박힐 때마다 의무실 전체가 쿵쿵 울렸다.

“큭!”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내지른 놈들은 이내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너나 할 것 없이 코가 뭉그러져 있었고 푸 하는 날숨과 함께 막 뽑힌 생니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이미 정신을 잃은 놈들을 상대로 수혁은 라스트 팡을 날렸다.

“!”

완전히 기절한 에스퍼는 이윽고 의무실 중간에 차곡차곡 쌓였다. 단풍 마크를 단 검은 피떡이 총 네 개였다.

“꽤 버텼네. 그래도 단풍 마크를 달고 있어도 원조 미국산이라는 건가.”

가장자리로 피가 스르륵 번지는 몸뚱이 산을 보면서 심 박사가 단조롭게 평했다.

“그런데 얼굴이 저렇게 망가져서 어떻게 해. 재생해도 엉망으로 붙을 것 같은데. 다들 젊어서 결혼도 안 했을 것 같은데. 이봐요, 롭슨. 안면 성형 전문의랑 교정 전문의 꼭 불러요.”

-아…… 예? 예.

새하얗게 질린 롭슨이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성형까지 해. 멋대로 붙으면 멋대로 붙는 대로 제 팔자소관이지.”

수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저 새끼는 어떻게 하지?”

잔인한 눈길이 구석에 선 에이브리를 향했다. 단정하게 쪽을 지은 붉은 모발 아래 오밀조밀한 얼굴이 눈처럼 하얬다.

-나, 나는 재생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에스퍼잖아. 일반인은 안 때리는데 에스퍼는 봐주기 힘들거든. 재생 능력 없다니까 딱 한 대만 맞자, 적절하지?”

-제가 맞는다면 다른 일반인 병사들의 안전은 보장합니까?

“그래.”

누구에게나 공평한 한 대를 요구하는 미친놈을 보며 에이브리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리곤 각오한 듯 두 주먹을 꾹 쥐고 눈을 감았다. 그런 에이브리를 향한 롭슨의 눈빛에선 존경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흘렀다.

“미친놈아. 네 한 대는 한 대로 곱게 죽인다는 뜻이잖아. 재생 능력 없으면 일반인이나 마찬가진데 봐줘라. 어차피 텔레파시 통하지도 않잖아.”

심 박사가 수혁을 말렸다.

“아줌마, 갑자기 왜 착한 척?”

“착한 척이 아니라 재생 능력도 없는 사람을 건드려서 뭐 하게? 벌써 국제법 어마어마하게 위반했어. 나중에 김윤조 깨어나면 그것까진 카바 못 쳐 준다.”

김윤조를 언급하자 수혁은 움찔했다. 그는 에이브리를 진하게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후우.”

에이브리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롭슨과 의무병들이 에이브리를 향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개망나니를 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와 경이가 줄줄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S급 에스퍼, 그것도 전투 경험이 풍부한 팀이 애처로울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이 날 줄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트리플 S급의 위력은 그들의 인지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그로 인한 충격은 80년 전 게이트가 처음 열렸을 무렵 처음 대응에 나섰던 군인들이 겪은 트라우마에 비견할 수 있었다. 약물과 상담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개망나니의 잔인한 짓에 익숙한 심 박사는 트라우마의 T도 없이 산뜻한 태도로 인큐베이터를 확인했다.

“재생 수치는 좋아. 이만하면 눈을 뜰 만도 한데 왜 안 뜨지?”

심 박사가 중얼거렸다.

“캐나다 물이 안 좋아서 그런 거 아냐? 그만 돌아가는 건 어때? 연구실 수족관이 제일 확실하잖아.”

수혁이 말했다.

“그럴까. 저기, 롭슨. 인큐베이터 좀 빌려 갈게요. 이동 완료하면 바로 반송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 기왕 데려가는 거 롭슨도 함께 빌려 갈까? 물어볼 것도 꽤 있는데. 괜찮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줌마가 알아서 해. 내 화물칸은 넉넉해.”

심 박사가 인큐베이터째로 떼가기 위해 기기를 조작할 때였다.

“하, 이것들이 또 수작을 부리네.”

수혁이 짜증스럽게 읊조렸다.

“왜?”

“네 마리 더 왔어. 근데 약간 귀찮은 놈들이야.”

“어떤 의미에서?”

심 박사가 돌아봤다.

“기척을 잘 숨겨. 의무실 밖에 도착하고서야 알아챘어.”

“항모라 시끄러워서 그런가 보지.”

수혁은 내내 의무실 슬라이딩 도어를 노려봤다.

“느낌이 안 좋아. 아줌마, 일단 숨어.”

“어디로?”

“인큐에 붙어.”

수혁의 지시대로 심 박사가 인큐에 붙자마자 의무실 바닥과 천장 철판이 우드득 떨어졌다. 찢어진 철판들은 인큐베이터와 심 박사를 여러 겹으로 감쌌다. 거대한 연꽃이 만들어졌다.

그와 동시에 슬라이딩 도어의 중심부가 진한 주황색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누군가 녹이고 있었다.

사방이 철판이다 보니 높은 열이 의무실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구석에 쭈그러져 있던 롭슨과 의무병들이 펄쩍펄쩍 뛰었다.

-으악! 뜨거워!

“여기 아군 인질이 있습니다. 공격에 유의하십시오.”

에이브리가 육성과 텔레파시로 동시에 전달하는데도 온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저쪽에도 너 같은 놈이 있나 보다.”

심 박사가 말했다.

“나 같은 놈이라니. 난 일반인은 안 건드린다고.”

강수혁은 짜증을 내면서 에이브리와 롭슨을 비롯한 사람들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피떡들과 함께 다른 쪽 구석으로 보냈다. 그러곤 천장 배관을 다시 터트렸다.

쏴아아.

액화 질소가 달아오른 철판을 빠르게 식혔다.

쩡!

급격한 온도를 견디지 못한 철판이 깨졌다. 그와 동시에 철판 조각이 수혁을 향해 날아왔다. 밖에서 조종한 것이었다.

총알처럼 날아온 철 조각은 대부분 맞기 전에 멈췄다. 하지만 얇은 조각 하나가 수혁의 뺨을 스쳤다. 붉은 생채기가 양 끝에서부터 쓱 사라졌다.

“훗.”

수혁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능력을 사용할 때 별로 손을 드는 일이 없던 수혁이 오른쪽 손을 녹는 부위를 향해 들었다.

갑자기 의무실 전체가 진동했다. 그와 동시에 붉게 녹아 가던 부분이 확장을 멈췄다. 찰나의 침묵 후 밖에서 약간의 기척이 들렸다.

“어딜.”

수혁이 혼잣말을 내뱉자마자 내부 공기가 작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녹는 중인 도어를 향해 돌진했다. 강한 공기압을 버티지 못한 문이 뻥 뚫렸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철물 저쪽엔 검은 스탤스 전투복을 헬멧까지 빈틈없이 쓴 놈 둘이 언뜻 보였다.

슉.

점점이 떨어지는 쇳물이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음속을 돌파하진 못해도 충분히 빠른 속도다. 그러나 한 놈의 헬멧에 붉은 불똥이 서너 점 튀었다.

“……!”

놈은 영어로 거친 욕설을 하더니 헬멧을 분리했다.

원래 그런 건지 헬멧은 날카로운 마름모꼴 날붙이로 변했는데 그것들은 곧장 수혁 쪽으로 날아왔다. 직선으로 날아오는 건 당연히 도중에 멈췄다. 하지만 찰나를 두고 항아리 궤적으로 우회한 파편이 수혁의 양옆과 뒤를 노렸다. 연계 공격이 일품이었다.

“어쭈.”

그래 봤자 그것들은 수혁의 갑옷이나 다름없는 오로라 발광을 뚫지 못했다. 헬멧 파편들이 수혁에게 종속되자마자 상대는 피신했다. 상황 판단이 빨랐다. 그사이 다른 세 놈도 기척을 숨겼다.

‘꼴에 천조국이라고 단풍국보다는 좀 낫네.’

국방비에 1천 조(兆) 쓰기로 유명한 나라답게 그 군인들도 제법 빠릿빠릿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빠릿빠릿해 봤자 심장이 뛰는 인간이다. 뒈지기 전엔 수혁에게서 완전히 숨을 수 없다.

항모 내라 각종 시끄러운 기관 소음이 수혁의 집중력을 다소 흩트리긴 하지만 인근에 이르면 놈들의 내장 소리가 들린다. 특히 관통 능력자인지 두꺼운 항모 내부 갑판 철근 사이에 숨은 놈의 기척이.

“흐음.”

잘 모르겠다는 듯이 일부러 사방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하면서 놈이 있는 곳 위쪽으로 이동했다. 상대의 손이 갑판을 관통해 수혁의 발목을 잡으려는 찰나였다.

쿠왕!

기다렸다는 듯이 수혁이 발밑을 짓밟았다. 갑판이 푹 꺼짐과 동시에 척추와 갈비뼈 전체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감지했다. 피를 토하는 듯 쿨럭거림도 들었다.

상대의 맥박은 그대로였으나 흉부 전체가 철판에 끼인 이상 움직이지 못할 거다. 실제로 놈은 기절했는지 위로든, 아래로든 관통하지 못하고 그대로 끼어 있었다.

‘한 놈 처리했고.’

부지불식간에 동료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세 놈은 무반응이었다. 잘 훈련받은 놈들이 분명했다. 물론 놈들의 맥박과 호흡이 동시에 거칠어지는 바람에 아까보다 위치가 더 잘 드러난다는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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