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여태껏 많은 능력자를 만났으나 수혁이 신체 지배력을 잃어버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말인즉슨, 전투 장교라면 누구나 받는 정신 조작 저항 프로그램을 수혁은 이수한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S급 에스퍼의 텔레파시도 통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안면 일부뿐이었다.
“시……발.”
입과 성대까지도 그럭저럭 마비된 몸의 구석구석에 어느 하나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하는 동안 수혁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괜한 수고를 하는군.
영감탱이는 품에서 철제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서는 큰 주사기가 나왔다. 척 봐도 위험한 약물을 담고 있는 듯했다.
평소라면 어디 모기가 무나?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수혁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신체를 통제하는 망할 영감탱이가 꺼낸 독약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자네가 먹은 에너지 바에 넣은 것과 같은 약물이라네. 원래는 하나씩 섭취시켜서 몇 개째에 정신을 잃는지 확인하려고 했지. 평범한 에스퍼는 두세 개에서 항복하거든. S급이라도 다섯 개를 넘지 않지. 그런데 50개를 다 먹고도 이렇게 멀쩡할 줄 누가 알았겠나? 이건 정제 원액이고 혈관에 직접 주사할 거라네. 자네의 재생력이 현 상식을 아득히 넘어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하길 바라네.
“조……까.”
할 수만 있다면 수혁은 중지까지 올리고 싶었다. 팔 움직임에 전력으로 집중해도 손끝 두 마디만 움찔거리고 말았다.
이를 악무는 수혁을 보며 노리스 영감이 감탄했다.
-흐음. 내 컨트롤하에서 아직도 말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하군. 심이 무엇을 만들어 낸 건가.
케이스를 재킷 주머니에 넣은 후 그는 느릿느릿하게 주사기 뚜껑을 열었다. 처음에는 늙어서 손놀림이 흐릿한가 했다. 하지만 수혁이 움직이려고 꿈쩍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발가락 서너 개를 오므리자 노리스 영감의 불안한 손놀림 또한 움찔거렸다.
‘아하. 이 망할 영감탱이도 상당히 무리하고 있네.’
손끝을 어떻게든 움직이기만 하면 영감탱이를 밀어 버릴 만큼의 염력은 구사할 것 같았다.
좀 전의 전투로 인해 사방의 철판이 마구잡이로 뜯겨나갔다. 넘어져서 별일 없을 환경이 아니었다. 특히 손을 떠는 영감이라면 더욱.
커다란 주사기 바늘이 어느새 눈 위치까지 올라왔다. 저절로 바늘 끝에 시선이 꽂혔다. 심 박사가 연구실에서 자주 휘두르는 바늘만큼이나 굵고 날카로웠다.
두피가 긴장하면서 머리 뿌리가 섰다. 긴장이 가져오는 신체 반응이 딴에는 신선하지만, 좆같긴 한결같았다.
저 빌어먹을 주사기가 제 목에 꽂히기 전에 어떻게든 영감탱이를 밀어내야 했다. 눈알에 힘을 주고 염력에 집중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게.
‘내 말이 들려?’
떠올린 의문을 들은 듯이 영감쟁이가 주름진 입가를 길게 늘어뜨렸다.
-자네 생각을 읽은 건 아니야. 단지 이 나이까지 가이드를 하면서 수많은 에스퍼를 겪었기에 짐작할 뿐이지. 대부분은 어떻게든 내 컨트롤을 벗어나려고 했다네. 하지만 성공한 이는 아직 없었지.
성공한 적이 없다니.
‘영감탱이, 늘그막에 못 볼 꼴 많이 보게 해 줄게.’
수혁은 이죽거리면서 계속해서 능력에 집중했다.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노력이 헛되진 않았다.
달달 떨기만 했던 손가락을 이젠 어느 정도 굽힐 수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손목까진 움직일 수도 있었다.
-내가 아무리 노인이라도 느린 손을 피할 여력은 있다네.
노리스 영감이 땀을 송골송골 흘리면서 말했다. 그는 주사기를 기어이 수혁의 목에 꽂았다. 주름진 손이 뻑뻑한 실린더 공이를 밀려는 순간이었다.
탕!
총성이 울렸다.
-피해!
이쪽을 주시하던 캐나다 선원들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깜짝 놀란 노리스는 주사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때 수혁은 최선을 다해 몸의 균형을 흩뜨렸다. 굵고 큰 몸이 상대적으로 작은 영감을 향해 무너졌다.
콰당.
수혁에게 깔린 채 철판에 거세게 넘어진 노리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짧은 순간 마비가 풀렸다. 수혁은 목에 쑤셔진 주사를 빼내 즉시 노리스를 향해 찍어 내렸다.
충격으로 벌어진 노인의 눈동자가 수혁을 향했다.
“큭!”
바늘이 노리스의 미간을 찍기 직전.
수혁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간발의 차였다.
-……큰일 날 뻔했군.
수혁을 다시 마비시킨 노리스는 한쪽 팔을 들어 올린 채 굳은 수혁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탕탕!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사방에 튀었다. 비명과 함께 여러 욕설이 들렸다. 막으라는 둥, 저 새끼는 뭐냐는 둥. 당황한 누군가의 어수선한 외침이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권총과 소형 레이저 건을 빼든 캐나다 해군 병사들이 다가와 노리스를 안전한 후방으로 끌어냈다. 뒤이어 수혁도 그들에게 끌려갔다.
연사가 이어졌다. 소음의 발원지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명백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얼어붙은 채로 사방을 경계하는 해군 병사들 사이에서 노리스는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자의 가이드로군.
노리스는 수혁의 손에서 주사기를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수혁의 관절이 단단히 굳은 탓이었다. 컨트롤을 느슨하게 하면 되겠지만, 트리플 S급 에스퍼를 상대로는 너무 위험했다. 당장 신체를 장악하는 데만 노리스는 모든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쾅!
이미 찌그러진 철판이 완전히 구겨져 갈라졌다. 틈 사이로 누군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발포!
캐나다 해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레이저가 철판을 지지고 총탄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습격자를 해치우진 못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마주친 해군이 벌써 제압했을 것이다.
체조 선수가 마루 운동을 하는 것처럼 가볍게 몸을 날린 습격자는 중력을 거슬러 천장을 딛고 다시 몸을 사선으로 비틀어 일반인이 감당할 수 없는 각도로 쇄도했다.
배를 뒤집고 물 위를 도약하는 돌고래처럼 위에서부터 날아드는 그의 양손에는 강탈한 것으로 추정되는 캐나다 해군의 주력 권총과 소형 레이저가 들려 있었다.
탕! 탕!
“악!”
“컥!”
총격이 이어질 때마다 캐나다 해군이 피를 흘리며 넘어졌다.
-저기!
탕! 지이이잉! 징!
권총과 레이저 건이 사방으로 마구 발포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좁은 항모 내 공간을 번개처럼 이동하면서 기회를 포착할 때마다 한발에 한 명씩 착실하게 해군을 해치웠다. 그에게 수적 열세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나마도 빠르게 격차를 줄이고 있었다.
-이런.
노리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흰색 전투복으로 보아 분명히 가이드일 텐데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경험이 풍부한 에스퍼 같았다. 노쇠한 자신과 달리 젊은 신형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저런 물건을 제압하려면 적어도 A급 이상의 에스퍼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항모 전단에 있는 A와 S급 에스퍼는 강수혁에게 전부 당했다. B급, C급 에스퍼 팀이라도 불러들여야 했다.
-에스퍼 팀을 보내게.
노리스는 캐나다 사령관에게 통신했다.
그걸 들은 수혁의 눈알이 사납게 굴렀다. 김윤조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에스퍼 팀을 상대로 버티긴 힘들다. 죽거나 혹은 죽지 않아도 크게 다칠 게 분명했다.
‘저 연두부 새끼를 어떻게 재생시켰는데!’
게이트 없애겠다고 제 뇌를 날린 미친 새끼 때문에 수혁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이제 그런 경험은 사양이었다.
분노가 절절 끓어오르자 오버로드되는 염력이 주변부에 영향을 미쳤다. 철판에 박힌 탄환과 각종 파편이 달그락달그락 떨렸다. 잘하면 저걸로 영감탱이를 공격해서 마비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자네까지 이러지 말게.
노리스는 수혁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으면서 주사기를 꺼냈다.
재생력도 마비되었는지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수혁의 안구에 핏발이 섰다.
기어이 주사기를 꺼낸 노리스는 그걸 수혁의 목에 가져다 댔다. 영감도 나름대로는 필사적이었다. 주사기 끝을 꾹 누르려는 때였다.
탕!
“끄악!”
총격과 함께 주사기가 날아갔다. 주사기 파편에 당했는지 노리스는 제 손을 부여잡으며 몸을 숙였다. 그때였다.
탕!
한 번 더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 날아든 총알은 정확하게 수혁의 경동맥을 찢어 버렸다.
푸확!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수혁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재생력이 마비된 상황이라 피가 계속해서 흘렀다. 머리에서 피가 빠지면서 정신이 아찔했다.
탕!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어느새 캐나다 해군을 모조리 해치운 습격자가 노리스의 어깨를 쐈다.
“큭!”
늙은 영감은 그대로 바닥에 자빠졌다. 하지만 마비는 풀리지 않았다.
“강수혁 소령님.”
저를 부르는 소리에 수혁은 눈알을 간신히 굴렸다.
익숙한 흰색 전투복을 걸친 상대는 분명히 김윤조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수혁과 눈이 마주친 그는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멀뚱히 물었다.
“의식이 있으면 눈을 두 번 깜빡이십시오.”
느릿느릿 두 번 깜빡였다.
그러자 상대의 총구가 수혁을 향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주사기를 쏜 것도, 그리고 방금 수혁의 목에 총알을 박은 것도 김윤조였다.
‘김……윤……조.’
탕!
다시 총성이 울렸다. 총알이 다시 쓰러진 에스퍼의 목에 박혔다. 감전된 듯 덜덜 떨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