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수혁이 노리스의 목을 쥐어뜯으려 할 때였다.
“당장 귀환하랍니다. 제주도가 위험해요.”
윤조가 수혁을 말렸다.
“10초도 못 기다려?”
“미군과 전면전 할 거 아니면 참으시죠.”
“전면전 할 건데?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이 새끼들이.”
수혁은 노리스의 목을 잡고 그를 들어 올렸다. 이미 많은 피를 흘린 늙은 가이드는 죽은 듯이 사지를 늘어뜨렸다.
“저는 안 할 겁니다. 그리고 캐나다 해군 측이 심 박사님을 납치하고 있는데요.”
“뭐?”
수혁이 노리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줌마는 챙겨야지.”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겁니다. 위성 자료에 따르면 방금 미군 전투기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거든요.”
“그런 건 빨리 얘기해.”
수혁이 대뜸 신경질을 냈다.
“그래서 지금 얘기하지 않습니까.”
멀뚱한 대답에 그렇지 않아도 사나운 에스퍼의 눈매가 한층 일그러졌다.
“앓느니 죽지.”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하는 말치곤 아이러니했으나, 윤조는 달리 딴지를 걸지 않았다. 사소한 말씨름으로 낭비할 시간이 정말로 없기 때문이었다.
강수혁은 별다른 경고 없이 일단 윤조를 낚아챘다. 품에 안긴 채로 날아가는 중에 윤조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후방을 엄호, 경계했다.
기절한 노리스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어깨와 허벅지에 각각 총상을 입고 많은 피를 흘렸을뿐더러 뒤이어 목이 졸려서 끝내 기절한 상태였다. 하지만 멀쩡하다고 한들 앞을 가로막는 격벽은 다 부수면서 고속으로 이동하는 강수혁을 따라올 재간이, 그것도 비행하여 따를 재간이 늙은 가이드에게는 없다. 기절한 노리스를 운반하는 건 강수혁이었다.
“굳이 데려가야 합니까?”
강수혁을 다시 탈취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최초의 가이드는 노련하고 유능했다.
“계산은 해야지. 그리고 너도 나와 계산할 게 많으니까 그냥 닥치고 있어. 알량한 돼지 저금통 배를 당장 째서 탈탈 털기 전에.”
“깨면요? 소령님 다시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윤조의 우려에 강수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그쪽 가이드님께서 알아서 하셔야지? 에스퍼를 지키는 건 가이드의 의무니까요?”
눈알을 굴려서 지척에 있는 자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비교적 침착한 태도와 달리 윤조의 에스퍼는 맹렬한 뇌파를 발산 중이었다.
-격노, 가학, 우려.
주요 감정은 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짜증과 성욕 등도 있긴 있으나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격노.
분노를 넘어선 격노는 아주 드문 감정이었다.
딱 한 번 기록된 적이 있는데, 그때 갓 깨어난 신형 가이드 김윤조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격노가 감지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제가 소령님을 공격한 이유는…….”
“알고 있으니까 닥쳐.”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극단적인 분노를 느끼면서도 강수혁의 태도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물론 캐나다 항모를 완전히 박살 내는 중이긴 하지만.
쾅!
다른 격벽보다 현저하게 두꺼운 격벽을 뚫자 갑판이 휙 지나갔다. 기름, 가스 냄새 그리고 짠 바다 냄새가 훅 끼쳤다.
두두두두두두.
갑판에 있는 롤링 건이 이쪽을 향해 발사되었다. 1분에 천 발 이상을 날리는 대공포 총탄이 만드는 주황색 궤적 밧줄이 수혁과 윤조를 향해 휘었다.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아.”
케이블로 연결하면 좋겠지만 윤조의 케이블은 고리가 손상되었다. 대신에 윤조는 강수혁의 한쪽 발등을 디디고 한쪽 팔로 두꺼운 몸통을 껴안았다. 동시에 윤조의 허리에 감긴 팔이 더 단단해졌다.
두두두두두두.
대공포 궤적이 셋으로 늘어났다. 전투기를 상대로도 60퍼센트의 저격률을 가진 재래식 무기는 그보다 훨씬 작으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에스퍼를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사실상 대공포는 저격보다는 강수혁의 접근을 막기 위한 엄호 사격에 불과했다.
빙그르르 돌면서 위로 아래로 고속 비행하는 중에 윤조의 시야가 검은 밤바다에서 달빛이 스치는 밤하늘로 수시로 변했다.
“아줌마 위치는?”
헬멧이 멀쩡하다면 위치를 바로 전송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대신에 윤조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손끝으로 AI가 전송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항모를 호위하는 구축함 떼가 있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해역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삐삐삐.
-미사일 방향 변경 탐지. 곧장 날아옵니다.
AI가 경고했다.
후방을 보자 항모를 향해 돌진하던 미 해군의 공대함 미사일 총 4기가 도중에 궤적을 바꾸어 정확하게 강수혁의 등을 목표로 날아오는 중이었다.
“소령님.”
“알고 있다니까.”
강수혁은 신경질을 내면서 노리스를 자신의 정(正)후방에 위치시켰다.
충돌 직전에 미사일이 사방으로 휘어졌다. 목적 달성을 위해 노리스를 함께 희생시킬 심산은 아닌 모양이었다.
펑! 펑펑! 펑!
화려한 불꽃, 네 송이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망할 영감탱이 주제에 제법 유용해.”
심 박사가 있는 구축함을 향해 대각선으로 내리꽂으면서 강수혁이 히죽거렸다.
해수면에 가까워질수록 습기 때문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만큼 저항이 세서 윤조는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두두두두두.
대공포가 하늘을 가로질렀으나 강수혁의 접근을 막아 내지 못했다.
쾅! 와장창창!
강렬한 폭발음이 들리면서 대공포 하나가 뿌리가 잘린 채 구축함 위를 뒹굴었다. 다른 대공포 또한 같은 신세가 되었다.
“배 쪼개고 들어간다. 머리 숙여.”
윤조는 즉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쿵!
큰 진동과 함께 주변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 윤조는 고개를 들고 조용히 방향만 가리켰다.
강수혁은 눈앞에 있는 격벽이든 무기든 설비든 인간이든 모조리 치워 버리면서 직진했다.
마지막 격벽을 뚫은 강수혁은 윤조가 건넨 신호에 따라 긴 갈고리 모양의 스키드마크를 내면서 정지했다. 품에 안긴 윤조는 같이 회전하면서 강수혁의 어깨 넘어 총탄 두 발을 날렸다.
탕. 탕.
컥! 억!
보초 격인 하급 에스퍼 둘이 목을 맞고 쓰러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구석에 구겨져 있던 심 박사가 벌떡 일어나 양 손목을 내밀었다. 윤조를 내려놓은 강수혁이 수갑을 뜯어냈다.
“우리 인큐베이터 챙겨야 하는데. 원조 양키 새끼가 가져갔어.”
“정말로 반드시 꼭 필요해?”
강수혁이 물었다.
“아니 뭐…… 정말로 반드시 꼭까지는 아니고 챙기는 편이 나중에 덜 귀찮다는 거지.”
모호한 대답에 강수혁이 인상을 썼다.
“우리 인큐베이터를 해킹하면 계속 귀찮아져. 윤조에 관한 기밀이 털려서 너를 조종하기가 쉬워진단 말이야.”
심 박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망할 영감을 챙겼는데도 계속 그럴 수 있어?”
수혁이 반문했다.
“망할 영감 누구?”
“로건 노리스.”
윤조가 답했다.
“뭐? 노리스? 강수혁을 낚아챈 게 그럼?”
“어. 저기.”
수혁이 엄지를 세워 어깨 뒤를 가리켰다. 기절한 노리스를 확인한 심 박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쩐지. 누구길래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벌이는가 했더니 저 영감탱이면…… 저 영감탱이 자산 가치는 그깟 이동형 인큐베이터 값은 갈음하고도 남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냥 양키놈들 배째로 날릴까?”
심 박사가 씩 웃었다. 그때였다.
-심 박사님?
“장세인?”
-세 분 다 당장 돌아오라고 합니다. 함대 전체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헉, 노리스 제독을 확보했나요?
-심나아여언!
뒤이어 외친 건 이율희였다. 보고를 듣다못해 분통이 터져서 직접 장세인에게 연결을 요청한 것이었다. 텔레파시답게 연결 요청이 즉시 이루어져 의사소통에 있어 시차가 없었다.
동시에 역방향으로도 진행되었다.
-알았다. 인큐베이터는 포기하고 그쪽은 더는 건드리지 마라. 노리스를 확보한 이상 어떻게든 사태를 유리하게 수습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신 빨리 귀환해서 우리 눈앞에 총구를 들이미는 놈들에게 개망나니의 매운맛을 보여 주길 바란다.
심 박사의 계산을 실시간으로 전달받은 이율희가 신속하게 판단을 내렸다. 화를 내면서도 결단이 먼저인 점이 존경받는 노(老) 함장다웠다.
이율희의 명령임을 언급하는 대신 심 박사는 가장 실용적이고 유효한 이유를 제시했다.
“돌아가자. 네가 연결 소실되는 바람에 재생 중인 윤조를 강제로 깨운 거야. 빨리 정밀 검사해야 해. 강수혁 너도.”
그러자 강수혁은 군말 없이 떠올랐다. 동시에 심 박사와 윤조, 그리고 여전히 기절한 노리스도 떠올랐다.
들어온 길을 정확하게 되돌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저 사격이 시작되었다.
수혁은 무심하게 구축함 외벽을 뜯어서 사방을 에워쌌다. 그도 모자라 철판을 꼬아 전봇대 크기의 창을 다수 만들었다.
부웅!
철제 창은 각각이 비행하는 뱀처럼 휘어지며 미국과 캐나다 함대 사이로 날아갔다.
쾅! 쿵! 펑펑!
반경 5km 내에 흩어져 있던 함선에 장착된 각종 레이저 건이 연이어 폭발했다.
쐐애액.
전방에서 전투기 네 대가 선회하며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사일 발사 탐지.
AI가 경고하기가 무섭게 4개의 불빛이 이쪽으로 향했다.
쾅!
마지막 레이저 함포를 꿰뚫은 철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미사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펑! 퍼퍼펑!
두 번째 불꽃놀이에 철창을 모조리 써 버린 강수혁은 인근 미군 함선의 옆 외벽을 아주 크게 뜯어냈다. 커다란 빵처럼 두루뭉술하게 생긴 철판은 급하게 퇴각하는 전투기 편대 꽁무니를 쫓아갔다.
쾅!
달아나는 놈들을 하나하나 따라잡은 철판은 일말의 자비 없이 전투기를 후려쳤다. 몇천억 원을 호가하는 초고성능 전투기가 매운 손바닥에 얻어맞은 파리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돌아와서 매운맛을 보여 주라고 했지, 누가 돌아오기도 전에 청양 고춧가루부터 치고 보랬나? 이 청개구리 자식들. 장선욱 이 망할 능구렁이는 부하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
심 박사와 연결된 장세인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이율희가 분노했다. 하지만 특작부 소속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 이율희는 끝내 텔레파시 그룹에서 나가 버렸다.
멀뚱히 떨어지는 전투기 파편을 보던 수혁이 입을 열었다.
“아줌마, 장세인이랑 아직 연결되어 있지?”
“어.”
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들한테 전하라고 해. 지금 물러서면 연두부 새끼 재생 도와준 걸 고려해서 조용히 물러나고. 내 친절한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빡치게 하면 태평양 바다에 떠 있는 놈들 모조리 수장시키고 그쪽 본진으로 쳐들어간다고.”
1분이 지나기 전, 모든 함선에는 백기가 내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