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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91화 (168/256)

91화

빌어먹을 김윤조, 이 미친 가이드 새끼.

창백한 낯을 하곤 낯선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 있는 그를 보는 내내, 수혁은 분노와 안도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리고 점점 불쾌해졌다.

김윤조는 마비된 수혁을 발견하자마자 경동맥에 총을 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척추 장치를 이용한 거다. 경동맥의 잇따른 파열을 자해 행위로 인식한 척추 장치는 강력한 전기 신호를 발산했다. 뇌와 척수에 강렬한 충격을 받은 수혁은 금방 기절했다.

다른 때에는 혼수상태가 제법 오래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투 중이라서 그런지 자비로우신 척추 장치, 이 좆같은 금속덩어리 새끼가 가이드 위성 AI의 명령을 받아 수혁을 다시 깨웠다. 직후 급격한 재생이 일어났다.

‘개새끼. 깨어나면 죽여 버릴 거다.’

최선까진 아니라도,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김윤조의 결단이 가장 효율적이긴 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냉정한 눈으로 무작정 쏘다니.

첫 번째는 몰라도 두 번째는 의식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페어링이 인터셉트된 상태에서 마주한 김윤조의 안구는 너무나도 무기질적이고 냉랭하여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여 뒈지는 조연이 된 기분이었다.

이후로 진짜 수십 번도 더 다짐했다.

‘죽여 버리리라. 만약 죽이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만큼 끔찍한 배신감을 심어 주리라.’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든 새끼는 현재 수혁의 품에 꽉 안겨 있었다. 두 팔로 놈을 꼭 안은 수혁은 각종 방해를 피해 남쪽으로 직행하고 있었다.

본래 약속은 백사장에 야자수 그늘이 지는 태평양의 천국이었으나, 지금 거긴 이쪽 꼰대들보다 훨씬 귀찮은 양키 새끼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 난리를 겪고 나니 양키 새끼들은 꼴도 보기가 싫고, 장소야 아무렴 어떤가 싶어져 남해 쪽 무인도에 있는 특작부의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거친 맞바람이 놈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고 있었다.

멜라닌 색소와 상성이 좋지 않은 인공 양수에 장시간 담겨 있다가 나온 놈은 어느 때보다 희었다.

그제까지 밤하늘처럼 새까맣던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변했다. 눈썹도 좀 옅어졌다. 무엇보다 피부가 달라졌다.

원래도 까무잡잡하진 않았다. 그럭저럭 흰 편이었으나 그래도 생기는 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갓 뽑아낸 가래떡 같았다. 좋게 말하면 뽀얗고 부드럽고, 나쁘게 말하면 비인간적으로 희멀겋다.

연속 풀 재생 때문인 건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바람 소리에도 놈의 목소리만은 생생하게 들렸다.

“왜 물어.”

“불편함을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불편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소령님의 컨디션은 ‘좋음’ 단계입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담담했다. 불편함? 격노가 아니라. 일부러 말을 고른 건가.

“너 같으면 안 불편하겠냐? 12시간 5회 하겠다고 장담한 새끼가 24시간을 뻗어 있었는데.”

수혁은 눈을 살짝 내리뜨면서 대답했다. 어차피 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본때를 보여 주리라.

“아, 성욕. 이해했습니다.”

“이해하셨어요?”

평소와 같은 비비 꼬인 말투에 짜증을 듬뿍 얹어서 돌려주었다.

“각오는 되셨습니까, 귀하신 가이드님?”

“네.”

이후로 김윤조는 말이 없었다.

안전 가옥이 있는 섬은 남해 다도해 해상 국립 공원 안에서도 한참 외진 곳에 있었다.

해상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았지만 제법 큰 바위섬으로 인근에서 수십 년간 조업한 섬 토박이 중에서도 소수나 존재를 알았다. 주변에 휘돌아 치는 여울목이 있고 또 조업하기에 고기도 많은 편이 아니라 토박이들도 잘 접근하지 않는다.

섬 가장자리를 따라 큰 소나무가 삥 나 있어 섬 밖에서는 섬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솔숲 안에는 단층 양옥집이 있다.

원래는 자산을 보관하는 안전 가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었다. 가끔은 요인 납치 감금 장소로도 쓰였다.

특작부에게 인수인계된 후로는 에스퍼용 콘도쯤으로 용도 변경되었다. 에스퍼가 특수한 공로를 세웠을 때 혹은 요양이 필요할 때 제공했다.

현재는 수혁이 무기한 사용 선언을 한 상태로, 수혁이 도착하기 전에 물자 보급이 끝난 상태였다. 적어도 최정만큼은 스스로 약속한 바를 지켰다. 나머지 빌어먹을 에스퍼 새끼들은 다 당연하게도 생깠다.

‘이동 봉사에 주변 정리는 무슨. 시발. 다 죽어 가던 주제에.’

수송기에서 실려 나간 다른 놈들과 달리, 김윤조는 멀쩡하게 걸어서 내리다 못해, 비틀거리는 창조주를 부축하며 내렸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수혁은 심 박사만 의무대에 집어넣고 바로 김윤조를 데려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수혁의 착각이었다.

심나연 박사는 본인이 의무대에 가기 전에 김윤조를 연구실로 먼저 데려갔다. 김윤조가 알아서 재생할 테니 의무대부터 가시라고 해도 굳이 고집을 피웠다. 김윤조를 인큐베이터에 넣기 전에는 주사 한 대는커녕 온몸에 시퍼런 멍이 올라오는 중에도 타박상용 연고도 안 바를 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연구실로 먼저 향해야 했다.

망할 새끼들이 무슨 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내내 수혁은 입을 다물고 뒤를 따랐다. 재생한 지 얼마 안 되는 목에 힘이 들어가 힘줄이 바짝 섰다.

멀쩡하게 걸어 들어간 놈이라 서너 시간짜리 재생 프로그램을 돌릴 거라 여겼다. 그럭저럭 참을 만한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수혁도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심 박사는 이번에도 수혁의 예상을 산산조각 냈다.

24시간.

풀 스캔을 포함한 전체 재생 과정을 세팅한 심 박사는 이미 불만으로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수혁을 돌아봤다.

“너, 아까부터 김윤조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전투 피로를 우선으로 풀어 주려고 수혁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유치한 핑계를 대려나 싶었다.

“말투나 태도 말이야. 평소랑 다르지 않았어?”

“다른 긴 뭐가 달라. 항상 짜증 나고 재수 없지.”

“그래? 네가 차이를 모르는 거면…… 뭐 됐고.”

심 박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수혁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김윤조가 아무 이상이 없으면 그것대로 이상하지 않은가.

‘그따위 짓을 했는데 멀쩡하면 사람인가. 괴물 새끼지.’

황금 뚱땡이를 때려잡던 때에 통신이 불가능했다. 폐쇄 회로 카메라처럼 항상 따라붙는 AI 신호와 더불어 김윤조의 존재감도 지워졌었다. 눈코입도 생기다가 만 징그러운 괴물 놈이 지구형과는 출력도, 영향력도 차원이 다를 만큼 막강한 EMP를 발산한 탓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혁은 텅스텐 빔을 전부 잃었다. 뚱땡이 놈을 어떻게 때려잡을까. 솔직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별안간 가이드의 강한 존재감이 훅 끼쳤다.

뇌에서 골수를 따라 전신의 신경계가 찌르르 떨렸다. 정수리가 징징 울리고 뒤이어 사지 말단의 감각이 멀어졌다. 견딜 수 없는 아찔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절정을 맞았을 때 같았다.

-파괴 구축함으로 창을! 공군이 위성 궤도 저격! 직후 공격!

선명한 외침과 함께 미친 존재감이 사라졌다. 한 박자 느리게 수혁은 그것이 김윤조임을 깨달았다.

환상적인 만족감에 휩싸인 채로 수혁은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때려잡았다. 이보다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급한 불을 끄고 난 후에 김윤조를 납치해서 12시간을 보낼 곳을 빨리 찾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좆같은 삶이 수혁에게 녹록할 리가 없다.

지구 따위 지키려고 목숨 걸고 싸우지 말라고 화를 냈던 새끼가…….

그 후의 일은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생각보다 침착하게 뭘 해냈던 것 같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목에 굵은 호스를 꽂아 피를 뽑아냈을 때였다.

목표한 섬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막 재생을 끝내신 연두부를 온전한 상태로 잡아먹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내리꽂는 대신에 수혁은 서서히 속력을 줄여 안전 가옥 마당에 사뿐히 안착했다. 그리곤 김윤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전 가옥 문은 열려 있었다. 들어가서 문을 단단히 잠갔다. 자신이 도착한 걸 최정은 이미 알고 있을 거다.

화내야 할 이유가 많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렇게까지 열을 받을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쨌거나 당장은 성적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유달리 희멀건 놈이 멀뚱히 서서는 수혁과 안전 가옥을 둘러보고 있었다.

“뭐 해? 안 따라오고.”

“죄송합니다.”

지은 죄가 상당한 걸 아는지 놈은 예의 바른 사과를 하곤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쓸데없이 출입 코드니 키니 만들었다가 강수혁의 손에 문짝이 박살이 나는 걸 우려한 최정이 모든 문에 코드를 풀어 둔 듯싶었다.

들어가자 깔끔한 공간이 나왔다. 생활감이 없는 공간이 꼭 콘도나 펜션 같았다. 넓지 않은 공간을 휙 둘러본 수혁은 곧장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다양한 식품과 함께 두유, 그리고 맥주가 있었다. 두유는 수혁이 특별히 요청해 두었다.

맥주를 꺼내 따면서 동시에 두유를 하나 연두부 새끼에게 날려 보냈다. 척 받아 낸 놈은 두유를 보고는 수혁에게 시선을 던졌다. 플라스틱 인형 같은 얼굴에서 유일하게 핏기가 도는 입술이 막 떨어질 찰나였다.

“죽다가 살아난 거 알아. 기분 개좆같은 거 알고. 그래도 맥주는 안 돼. 대가리 깨진 놈은 콩물이나 마셔.”

“저도 동감입니다. 맥주는 아직 이릅니다. 두유, 감사합니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던 수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김윤조는 두유 패키지에 붙어 있는 빨대를 꽂아 내용물을 마셨다. 소리도 나지 않게 얌전히.

“이번에는 또 무슨 새로운 수작이야.”

빈 캔을 우그러뜨린 수혁은 살짝 떠서 김윤조를 향해 미끄러졌다.

집 안에서 저공 비행으로 이동하면 연두부 새끼는 발 없는 귀신 같아서 이상하다고 기겁하곤 했다.

작은 빨대를 물고 조용히 두유를 마시던 놈은 약간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김윤조는 전투복을 벗지도 못한 상태로 수혁에게 끌려왔다. 12시간 5번이라고 했어도 시기는 정하지 않았다면서, 인간답게 좀 쉬엄쉬엄하자고 발광하기 전에 선수 친 것이다.

뭔가 이상했다.

원래 김윤조라면 안겨 오는 내내 뇌가 가랑이에 달렸냐느니, 트리플 S급이면 뭐 하나, 죽다가 살아난 사람 상대로 그 짓거리부터 하려 드는 개망나니인데 어쩌고 해야 했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수혁은 놈을 향해 고개를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코끝이 닿기 직전이었다.

“김윤조, 이번엔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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