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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92화 (169/256)

92화

“무엇을 말씀입니까?”

“하, 계속 개수작 부리네. 갑자기 세상 억울한 을인 척한다고 내가 봐줄 줄 알아? 약속한 대로 12시간 5회 다 받아 낼 거다.”

수혁이 미간을 좁히면서 눈알을 부라렸다. 물고 있던 두유 팩을 내린 김윤조는 반 발짝 물러났다.

“제가 먼저 제안하고 이미 합의한 사항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윤조는 두유 팩을 바닥에 놓았다. 그러곤 뒷덜미에 있는 전투복 버튼을 눌렀다.

퓨슉.

전투복 텐션이 나갔다.

김윤조는 입을 다문 채로 외피를 벗었다. 무거운 전투복을 바닥에 얌전히 떨어뜨린 다음 검은색 내피도 조용히 벗어 바닥에 던졌다.

아직 밖에는 해가 떠 있었다. 물자 보급과 함께 사전 청소를 마친 안전 가옥의 커튼은 가지런하게 접혀 있었다. 깨끗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묵묵히 스트립쇼를 벌이는 미친 새끼의 발목에 걸렸다.

햇빛의 가장자리를 따라 연한 반사광이 감돌았다. 아킬레스건이 굵게 진 발목 위로 매끈한 종아리가 이어졌다. 근육이 붙었으나 사납게 보이진 않는다. 곧은 정강이뼈 위로 무릎, 그리고 허벅지가 이어졌다. 흰 피부가 갓 구워져 나온 식빵 속살 같았다.

제대로 난 털이라곤 머리카락밖에 없는 연두부 새끼의 중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 보려고 해도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기울었다. 이번엔 하체 재생을 한 것도 아닌데 뭔가 이상하게 께름칙했다.

너무 순수하고 무구해 보인달까. 동시에 단정하다 못해 냉정해 보이기도 했다.

‘시발.’

남의 가랑이를, 그것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지고 빨아 댄 전적이 있는 살덩이를 놓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낮에 스트립쇼를 해 대는 또라이 새끼를 두고 순진무구라는 단어를 떠올린 자체가 구제 불능이었다.

약한 자기혐오에 빠진 수혁이 시선을 억지로 위로 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같이 탱글탱글한 상체에 난 옅은 핑크빛 꼭지 두 개가 도드라졌다.

“아, 시발.”

이번 탄식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터졌다.

딱히 만질 것도 빨 만한 것도 아닌 작은 돌기 주제에 얼마나 야한지. 작고 말랑한 살점을 엄지와 검지 끝으로 잡아 살살 문지르고 돌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김윤조의 얌전한 젖꼭지는 쓸데없이 예쁜 가랑이만큼이나 수혁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전투로 인한 흥분이 꺼지지 않는 숯불처럼 은은하게 도사린 상태였다. 지나친 시각적 자극으로 인해 중심이 일어서다 못해 탄탄한 전투복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12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약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던 수혁을 상대가 일깨웠다.

“뭐?”

두 사람 간의 간격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혁에게 다가온 김윤조는 고개를 들어 입술부터 맞붙였다. 촉촉한 입술에선 두유의 고소한 내음이 났다.

할짝.

부드러운 혀끝이 살짝 벌어진 수혁의 입술을 핥더니 이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말캉하고 따뜻한 살점이 치아를 쓸었다.

탄탄한 두 팔이 수혁의 허리를 나긋하게 감쌌다. 에스퍼용 검은색 전투복 위에 흰 살결이 들러붙었다.

수혁은 넋이 나간 멍청이처럼 턱을 떨어뜨렸다. 그 틈을 포착한 상대는 조심스러우면서도 확고한 태도로 수혁의 입 안을 침범했다. 고소한 맛이 나는 혀는 금세 수혁의 혀에 들러붙었다.

입 안을 휘감는 감각을 느끼는 동안, 수형의 발등에 놈의 발이 올라왔다. 치수가 큰 만큼 완만한 곡선이 이어지는 발등 위에서 요령 있게 균형을 잡은 김윤조는 수혁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어느새 어깨 위로 올렸다. 상대가 까치발을 듦과 함께 고개가 올라간 덕에 수혁의 목이 뒤로 살짝 젖혀졌다.

옆에 가지런히 떨어져 있던 수혁의 팔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군인 출신 노출증 환자의 탄탄한 허리에 슬그머니 감겼다. 팔뚝으로 등과 엉덩이가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을 단단히 받혔다. 힘겹게 아래로 꺾인 손은 자연스럽게 매끈하고 탄탄한 엉덩이를 매만졌다. 하지만 전투복 장갑 때문에 쫀득한 살덩이의 감촉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다.

또라이가 벗을 때 같이 전투복을 벗을걸.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수혁은 나신을 한껏 끌어안았다.

겁도 없이 에스퍼의 입 안을 농락하려 드는 건방진 혓바닥을 휘돌리고, 살짝 깨물었다가 얼얼할만큼 강하게 빨아드리는 사이 수혁의 눈꺼풀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은은한 인공 양수 냄새가 났다.

딱히 좋은 냄새가 아니었다. 하지만 화학 유기물의 고유한 냄새는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가이드 김윤조임을 증명했다.

대가리를 스스로 깨트려 가면서 임무를 완수하는 독종 새끼는 야하기까지 했다.

“잠깐.”

수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감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곤 고개를 황급히 틀었다.

“어?”

별안간 끊어진 키스에 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야, 김윤조.”

“예.”

“누가 네 멋대로 대가리 깨랬어?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놈이 내 허락도 없이 그런 짓거리를 해? 나한테는 지구보다 나부터 지키라며? 그런데 너는 시발, 뭔 내로남불이 이렇게 가지각색이야?”

“죄송합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초거대 플라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모든 사람이 위험하니까요. 모든 사람에는 당연히 소령님도 포함됩니다.”

순순한 사과가 돌아왔다.

“그러다가 정말로 네가 죽기라도 하면 나는…….”

갑자기 울컥했다.

이렇게 사람을 흔들어 놓고 갑자기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실제로도 당시 기억이 흐릿했다. 기억이 없는 건 아닌데 실감이 묘하게 옅었다. 질긴 막에 감긴 느낌이랄까. 세상에서 유리된 둔탁하고 매캐한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건 소령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가이드로서 확인한 소령님의 모든 데이터는 즉각 세이브되므로, 혹시 제가 부재한 상황이 오더라도 다른 가이드가 불편함 없이 서포트할 수 있습니다.”

“…….”

갑자기 소름이 쭉 돋았다.

강한 능력을 바탕으로 무지막지한 인생을 살아온 수혁에게는 아주 생소한 감각이었다.

“잠깐.”

반사적으로 상대를 밀어냈다. 전투복 때문에 상대의 체온이 차단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분리된 부근에 냉기가 감돌았다.

“김윤조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어제 심 박사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김윤조는 멀쩡하게 생긴 외관과 달리 어디가 고장이 난 새끼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 더불어 뇌에 칩을 한 개도 아니고 네 개나 처박기도 했다. 사람처럼 굴다가도 별안간 인형처럼 돌변하기도 한다.

안 하던 짓을 하고 또라이처럼 군다고 해도 수혁은 ‘저 참신하게 돌아 버린 새끼’라며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그 때문에 김윤조의 변화를 눈치채는 것이 늦었다.

“장난이면 그만두지? 지금 장난칠 기분이 아니거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확인했다.

거듭된 협박에도 희멀건 낯짝엔 어떤 이채가 감돌지 않았다. 소름이 한층 거세졌다.

“재미없으니까 그만두라니까.”

“뭐를 말씀이십니까?”

“이거, 이거 말이야! 멀뚱한 기계 덩어리처럼 예의 바르고 침착한 태도. 기분 더러워.”

콕 찍어서 지적하자 이번엔 놈이 약간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데 정작 보고 있지는 않아 로봇 같았다.

수혁은 그를 놓고 뒤로 멀어지며 팔짱을 단단히 꼈다. 전투복에 주머니가 있었다면 두 손을 찔러 넣었을 것이다. 상완근에 닿은 손끝이 저절로 달그락달그락 물결쳤다.

잠시 뒤 연두부 새끼의 안면이 갑자기 변했다. 순했던 눈 끝이 약간 일그러지고 입술이 비틀렸다. 놈은 아래가 덜렁거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좁은 골반을 삐딱하게 틀었다.

“소령님, 아 또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뭘요?”

따지는 음성이 묘하게 들떴다.

“시발. 이건 또 무슨 짓거리야?”

“뭔 짓거리요? 아놔, 소령님 자꾸 이러시면 저 5회 보장 못 합니다?”

소름이 끼치다 못해 정수리 머리털이 쭈뼛 일어섰다. 수혁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머리를 헝클였다.

“기분 더러우니까 그만두라고 했지?”

“왜 그러심꽈? 저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촌스러운 비꼼이 돌아왔다.

어깨를 으쓱이며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수혁이 익히 하는 김윤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외형은 분명히 김윤조인데 내용물이 묘하게 바뀌었다. 같은 역할을 두고 배우가 달라진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심지어 발연기다.

더는 참지 못한 수혁은 김윤조의 팔뚝을 거칠게 낚아챘다.

“호되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수혁은 그를 끌어당겨 거실에 있는 소파에 던졌다.

전투복을 벗으면서 다가가는 수혁을 돌아본 김윤조는 얌전히 소파 위로 올라가 자세를 잡았다.

놈의 나체를 향하던 수혁의 발걸음이 멎었다. 김윤조를 향한 천형(天刑) 같은 성욕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어도 하고자 하는 의욕이 훅 사라졌다.

주인님을 맞이하는 노예같이 구는 꼴에 배알이 비비 뒤틀렸다. 예의를 차려서 엿을 먹이다니.

“그렇게 하기 싫으면 차라리 대놓고 말로 해. 이 치졸한 새끼야.”

“하기 싫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발연기가 계속 이어졌다. 위화감에 불쾌감이 퐁퐁 솟아올랐다.

“이게 미쳤나.”

욕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자초한 거다. 나중에 죽는 소리를 해도 안 봐줄 거야.”

“알겠습…… 흡.”

놈의 예의 바른 대답이 듣기 싫어 입술부터 부딪혔다. 동시에 놈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흉흉하게 부푼 성기가 연약한 살점에 닿았다. 이미 습기를 머금은 곳이 수혁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육중한 몸이 상대적으로 작은 몸 위로 포개졌다.

끼이익.

구식 소파가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옅게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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