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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95화 (172/256)

95화

돌아오는 버럭거림도 똑같이 축축했다.

“잘못했지, 이 망할 새끼야!”

심 박사는 눈가와 함께 입가도 덜덜 떨었다. 열 손가락을 쥐었다 폈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가까이 있는 의자 등받이에 얹었다. 꾹 눌린 손가락 끝마디가 희게 변했다.

“네가 구속 장치 계속 가늠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구속 장치를 풀면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가만히 둬?”

“하, 시발. 내 대가리에도 뭐 심어 놨어? 망가진 연두부 새끼처럼?”

수혁의 목소리에선 살기가 흘렀다. 쿵쿵 내딛는 발걸음 아래 콘크리트에 옅은 실금이 갔다.

심 박사는 갑자기 연구실 콘트롤 콘솔을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넓은 실내 전면을 압도하는 거대한 스크린에 강수혁 증명사진이 떴다. 그 옆에는 비공개 기밀 자료가 주르륵 떴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지네와 전갈을 합성한 듯한 기이한 장치 설계도였다. 장치의 입체 투사도가 천천히 회전했다.

파들파들 떨리는 중년 여성의 손이 스크린과 연결된 패드 위에서 휙휙 움직였다. 미친 천재 박사의 등 뒤에 자리 잡은 스크린 화면도 동시에 어지럽게 바뀌었다.

통계 그래프가 떴다.

8년 전부터 시작한 그래프 위에는 두어 가지 선과 막대가 있었는데, 셋 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 높아지고 길어졌다. 그래프 위쪽에는 샛노란 선이 그어져 있는데 각각 수치가 선을 넘기 직전이었다.

“구속 장치, 내가 디자인한 거야, 이 멍청한 새끼야. 네가 머리 굴릴 때마다 온갖 신호가 나한테 바로 전달된다고.”

그래프는 수혁의 구속 장치 손상 횟수와 그리고 장치가 받은 충격 정도에 관한 것이었다.

8년 내내 상승세를 이어 가던 그래프는 최근 급격하게 내리막길로 접어들다가 최하단에 있는 축에 접촉한 이후로 서너 달 동안은 아예 무기록이었다. 대신 숫자 0이 이어졌다.

“이래도 내가 가이드를 괜히 만들었어?”

심 박사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화장기 없는 창백한 낯이 파르르 경련했다. 한껏 젖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수혁의 명치가 싸늘하게 식었다. 기분이 개 같았다.

누구도 아닌 아줌마가 무서워한다. 지구상에서 수혁을 가장 하찮게 대하던 사람이 수혁이 무슨 짓을 벌일까 봐서 무서워서 벌벌 떤다.

자신을 대하는 장선욱의 본심을 알았을 때만큼 피가 식었다. 동시에 뜨거운 목구멍 위로 뭔가 울컥 튀어나올 것 같았다. 피라도 토하려나. 좆같게.

“하.”

수혁은 숙였던 고개를 위로 꺾었다. 그러지 않으면 볼썽사나운 짓을 벌일 것 같았다. 어깨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두 주먹이 저절로 말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식은땀이 아는 이마를 손으로 다시 훑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도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피가 쏠린 건지, 혹은 반대로 다 빠져나간 건지 머리가 아찔했다. 시야도 흐렸다. 하지만 혓바닥을 못 놀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해하고 있네. 내가 구속 장치 푸는 편이 아줌마나 최정에게 훨씬 좋아. 장선욱은 좀 싫어하겠지만. 장기적 관점으로 봤을 때 구속 장치 제거가 국가와 국민에게 큰 도움이 돼.”

그에 심 박사가 피식 웃으려 들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덕에 딱히 예쁘지도 않은 얼굴이 더 못생겨졌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너야말로 나와 최정을 잘못 생각하고 있어. 우린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애국자 아니거든.”

“내가 구속 장치 풀면 뭘 할지 모르니까 그런 소릴 하는 거지.”

힘이 쭉 빠진 수혁이 중얼거렸다.

“누가 모르는데. 네가 장치 풀자마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모르는데?”

“당연히 내가 테러를 벌일 거라고 여기잖아. 특작부 불태우고 경우에 따라서 군대 전체를 불태울 거라고. 그렇게 되면 이 등신 같은 나라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국민은 알아서 잘 망할 거고.”

“하. 하. 하.”

심 박사가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스타카토를 남발했다.

“테러를 벌이긴 하겠지. 다른 놈은 몰라도 장선욱만큼은 죽일 거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나라가 망하진 않아도 아니 망하겠네. 국가급 동귀어진 아니고선 네 난동을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근데 네 최종 목표가 장선욱과 국가 멸망은 아니잖아? 목표로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그에 수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똑바로 들었다. 심 박사의 눈에는 총기(聰氣)와 광기, 그리고 물기가 있었다.

정말로 알고 그러는 건지 혹은 허풍을 치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상대의 맥박으로 판별했다. 전문적으로 거짓말탐지기 회피 교육을 받거나 타고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대부분 거짓말할 때 심박이 빨라진다. 화난 트리플 S급 개망나니 앞에서 블러핑을 치기란 대담한 각오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심 박사의 심장 박동이 지나치게 빨랐다. 하지만 언쟁이 벌어진 후로부터 계속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 허풍인지 아닌지 구별할 만한 변화가 거의 없었다.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 최종 목표가 뭔데?”

무겁게 가라앉은 성대가 저음을 발산했다.

“정말 내 입으로 말해?”

“말해.”

심 박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입을 꾹 깨문 채로 수혁을 노려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혁의 딱딱한 입매에 냉소가 번졌다.

“뇌가 다른 사람이랑 달라서 그런가? 아줌마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 하여간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보는 버릇은 누구랑 똑같아, 그렇지?”

빈정거림에 잇자국이 선명한 상대의 입술이 달싹였다.

“강수혁.”

“사람 이름을 왜 자꾸 불러 짜증 나게.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빌어 보게?”

“부른 게 아니라 네 최종 목표는 강수혁이라고. 이 멍청한 개새끼야.”

부들부들 떨리던 심 박사의 눈가에서 기어이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하. 뭔 시발. 또 무슨 개또라이 같은 소리야. 창조주라는 게 이러니까 그 연두부 새끼도 정상이 아닌 거지. 이봐요, 심나연 씨. 내가 누군지 알아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육군 특수작전부대 소속 소령 강수혁. 트리플 S급 에스퍼. 성격 더럽고 통제 안 되는 구제불능……인 새끼가 내 연구실에 쳐들어와 난동 부리는 중.”

똑같이 분노에 찬 음성이 심 박사의 떨리는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다른 사람이면 벌써 지리고도 남았을 무시무시한 살기에도 분통을 터트릴지언정, 기가 죽지 않는 점이 대단했다.

“잘 아네. 아는데 그래? 내 목표가 나라고? 뭔 귀신 선문답이야?”

“선문답 아니거든.”

“그런데 왜 앞뒤 없는 개소리를 찍찍 늘어놔? 아줌마는 내가 우습지. 그렇겠지.”

쾅!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쪽 벽에 세워져 있던 캐비닛이 터졌다. 안에 들었던 각종 장비와 자료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장난 그만해라. 아무리 아줌마라도 이제 더는 안 봐줘.”

“너야말로…… 이 짜증 나는 새끼야!”

폭발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심 박사가 별안간 눈에 핏발을 세웠다.

“너는 네가 뭔가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그냥 DNA가 조금 망가진 덕에 알량한 재주 좀 부릴 줄 아는 애송이일 뿐이야!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무슨 전지전능한 신처럼 하늘 꼭대기에 계시나? 어디서 건방지게 봐주니 마니 지랄이야, 엉?”

한바탕 쏟아낸 심 박사는 숨을 고른 뒤 싸늘하게 씹어 뱉었다.

“남들 다 살아내는 인생 하나도 버거워서 어떻게 하면 뒈질까 궁리했던 주제에 잘난 척 그만해. 이 덜 자란 애새끼야.”

싸한 정적이 감돌았다.

강수혁은 산 채로 얼어붙었다. 크게 벌어진 두 눈동자에는 충격이 넘실거렸다. 그는 휑한 먼지바람이 들어가도 모를 만큼 입을 벌린 채로 숨도 쉬지 못했다.

“…….”

충격을 소화하지 못하는 강수혁을 마주한 심 박사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 사건 이후로 수시로 미친 행각 벌이는 네 얄팍한 의도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눈물에 젖은 심 박사의 뺨이 실룩거렸다.

“구속 장치 이식에 동의한 것도 군부에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악독하게 지랄하면 깔끔하게 자폭시킬 줄 알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어쩌나? 우리 강수혁 소령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해서.”

수혁을 쏘아보는 상대의 안구가 번들거렸다.

“자폭 장치 같은 거 아니거든, 그거.”

“뭐라고?”

수혁은 아까부터 심 박사가 늘어놓는 말을 하나도 따라가질 못했다. 자폭 장치가 아니란다.

“그럼…… 뭔데?”

“그냥 네가 자해하지 못하게 막는 기절 장치. 물론 장선욱은 핵폭탄 달린 줄 알지만.”

심 박사는 조소했다.

“네 자살 충동을 인지했을 때부터 결심했어.”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경악 어린 질문에 심 박사는 웃어 보였다.

“가이드 만들기로 말이야. 가이드가 생기면 자살 충동 완화가 가능할 것 같아서. 물론 대성공이지.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반쯤 썩어 가던 새끼가 갑자기 꽃이 피더라.”

그러면서 심 박사는 자기가 아무리 천재라도 2년 만에 가이드를 뚝딱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며 헛웃음을 지었다.

“실제 제작 기간은 2년이지만 기초 개념 정립과 설계에 6년을 쏟아부었어. 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 뇌를 가진 심나연이 장장 6년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만들었다고. 그만한 대형 프로젝트에 관해서 다른 놈들 눈치 못 채게 숨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 전용 가이드 제작 얘기가 상부에서 먼저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최정이 얼마나 뺑이 쳤는지 너같이 유치뽕짝한 새끼는 죽어도 모를 거다.”

“……왜?”

“왜라니?”

왠지 신난 상대를 향해 수혁은 고장 난 기계처럼 반문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주절주절 지껄이던 심 박사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미치광이처럼 고함치고 분노를 터트리는 사이 삐딱하게 기울어졌던 몸을 바르게 폈다. 고개를 꼿꼿하게 든 채 자신만큼이나 창백한 낯을 한 젊은 소령을 바라봤다.

“네가 살기를 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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