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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03화 (180/256)

103화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덕대면서 농담 따먹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상관이 귀찮게 이런 것까지 챙겨야 하냐며 타박하면, 김윤조가 뭐 챙겨 달라고 한 적 있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둘 사이에선 늘 있었던 일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수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뇌를 뜯어 고쳤는데 늘 그랬던 일상이 가능하겠냐, 이 멍청아. 귀중한 물건도 까먹었잖아.’

헌병대나 택배가 나았다.

묵묵히 양말을 만지는 놈을 더는 보고 있기 힘들었다. 딱히 지켜 보고 있을 이유도 없고.

“그럼…… 간다.”

어색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막 날아오르려던 수혁의 팔에 흰 전투복 장갑을 낀 손이 걸렸다. 주춤하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김윤조가 수혁을 공손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신경을 써 주셨는데 감사 인사도 없이 보낼 순 없습니다.”

망할 놈의 인사. 지긋지긋하다.

“됐어. 인사는 무슨. 고마우면 속으로 ‘고맙습니다’ 10번 복창해.”

얼버무린 수혁이 팔을 내리자 이번에는 김윤조가 한 걸음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자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싹 다가와 붙었다. 더 물러나는 것도 이상해서 일단 버티고 섰다. 균형이 약간 무너지면 바로 몸이 포개질 거리였다.

김윤조는 인형 같은 하얀 낯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수혁을 꼼꼼히 뜯어봤다.

“좀…… 야위신 것 같습니다.”

“내가?”

“예. 얼굴에 살이 빠졌는데요.”

상대의 손이 수혁의 뺨에 닿으려고 했다.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어쩐지 그러지 못했다. 흙먼지가 묻은 전투복 장갑이 광대 언저리를 스치는 순간 수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흔들리는 시선에 무구한 눈동자가 잡혔다. 일 초 정도 지났을까.

“억.”

김윤조가 크게 당황하며 손을 거두었다. 뒤로 물러나더니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는 큰 결례를 범한 사람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적절했습니다.”

“뭐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물음에 김윤조가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허락 없이 소령님의 안면에 손을 댔습니다.”

“그게 뭐.”

“예?”

연이어 놀란 김윤조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수혁이 먼저 다가서서 거리를 바짝 좁혔다.

“우리 사이에 얼굴 만지는 정도로 서로 사과하고 사과받는 거, 이상하잖아.”

“……우리 사이가 어떤 사입니까?”

이번엔 수혁의 말문이 막혔다. 어떤 사이라니. 그걸 설명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김윤조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파트너는 아니다. 수혁이 스스로 페어링을 깼다. 친구? 말도 안 된다. 그렇다고 헤어진 애인 사이? 그럼 서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없다. 남은 건 구차한 관계뿐이었다.

“동료……이자 전 숙소 동기.”

정작 말을 뱉고 나자 훨씬 뻘쭘해졌다. 아니 그냥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할걸.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터진 입은 뻔뻔하게 더 지껄였다.

“서로 모르는 것도 아니고 편안하게 대해.”

“아, 예.”

“그럼 이만.”

“잠시만요. 소령님.”

빨리 도망치고 싶은데 김윤조가 또 잡는다.

“왜 자꾸 불러.”

“저,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식사하시는 거 어떻습니까?”

“뭐?”

너무 의외의 질문이라 눈만 깜빡였다. 김윤조는 쥐고 있던 양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제 물건도 직접 가져다주시고, 훈련도 도와주셔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식사 대접하고 싶습니다.”

“딱히 대접받으려고 한 건 아닌…….”

꾸르르르륵.

뱃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단전에서부터 쪽팔림이 몰려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치 없는 위장 새끼. 왜 여기서 꾸륵대고 난리야. 집에 돌아가면 아주 다 끄집어내서 줄넘기할 것이다.

“식사, 제대로 안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며칠 굶는다고 안 죽어.”

며칠이란 말에 김윤조의 안색이 급격히 굳었다.

“며칠씩이나 굶으셨습니까?”

“아니 뭐. 그게.”

“당장 밥부터 먹으러 가시죠.”

말을 자른 김윤조가 먼저 앞장섰다.

두어 걸음 먼저 가던 그는 수혁이 가만히 서 있자 금방 되돌아와 수혁의 팔을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별로 센 힘도 아닌데 수혁은 가벼운 풍선처럼 끌려갔다.

김윤조가 이끈 방향에 군용 지프가 있었다.

“조수석에 앉으십시오. 운전은 제가 합니다.”

“귀찮게. 날아가면 되는데.”

“식사를 거른 상태로 비행이라니요. 아까 신병 훈련 때도 이상하게 봐주더라니. 열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운전석에 오른 김윤조는 조수석에 앉은 수혁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런 건 아닌데. 아니 지금 생각하니까 약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소령님처럼 에너지 소비가 많은 분이 식사를 거르시다니요. 전에는 이런 적 없지 않습니까.”

“입맛이 좀 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말입니다. 밥은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김윤조는 시동을 걸자마자 거칠게 질주했다. 꼭 비상 상황이 떨어진 사람 같았다.

생활관 인근을 벗어난 지프는 특작부 중앙 차로를 타고 부대 입구로 향했다. 숙소로 가는 줄 알았는데. 부대를 벗어나 첫 갈림길에서 지프는 장성급을 위한 전원주택 마을로 가는 대신에 인근 번화가로 향했다.

“어디 가는데?”

“부대 앞에 등갈비 김치찜으로 유명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김치찌개 좋아하시잖아요.”

“김치찜이랑 김치찌개랑 맛이 비슷해?”

“아무래도 묵은지를 돼지고기랑 같이 삶은 거니까 비슷하죠. 혹시 한 번도 드셔 보신 적 없습니까?”

“어…… 음.”

운전하던 김윤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수혁을 흘끔 봤다.

“뭐 안 먹어 봤을 수도 있지. 군부대 사니까.”

“회식은 해 보신 적 있을 것 아닙니까, 군인이라면 누구나 회식 좋아하는데요.”

“없어.”

끼이이익.

막 사거리를 건너기 전 신호에 걸린 지프가 급정거했다. 수혁은 앞으로 확 쏠렸다가 뒤로 턱 밀려났다.

“아, 진짜 운전 더럽게 하네. 야. 넌 생긴 건 연두부처럼 생겨서 하는 짓마다 이렇게 거칠고 맵냐.”

수혁이 화를 내든 말든 김윤조는 제 할 말부터 했다.

“부대 밖 회식을 해 보신 적 없다고요?”

“내가 같이 갈 놈이 어디 있냐? 기껏 가자고 해 봐야 아줌마나 최저씨나 꼰대지. 먹다가 체해. 다른 에스퍼 머저리들과는 어울려 다니기 싫고. 그 외에는 아는 사람 없으니 뭐.”

툴툴거리며 대답하는 수혁을 김윤조가 빤히 봤다.

“저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혹시 식당에 가 보신 적은 있습니까?”

“너는 내가 무슨 등신인 줄 아냐? 식당도 안 가 보게.”

“부대 내 식당 말고 부대 밖에 있는 민간 식당 말입니다.”

수혁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가만히 있자 김윤조의 벌어진 두 눈에 서서히 경악이 서리기 시작했다.

신호가 바뀌었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로 고개를 정확하게 조수석으로 돌린 김윤조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호 떨어졌어. 안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윤조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지프는 파쇄석 마당에 단층 건물로 되어 있는 거대한 식당에 도착했다. 군부대 인근이나 소도시 외곽에 흔히 있는 맛집이었다.

본격적인 저녁이라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 식당엔 벌써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그들은 입구로 들어오는 흰색 전투복 차림을 보고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개중에 놀랍게도 김윤조를 알은척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어, 김 준위님. 전투복 차림으로 웬일이야.”

“혼자 왔어?”

미리 자리 잡은 하사관 무리가 김윤조를 향해 반갑게 손을 들었다가 뒤따르는 수혁을 보고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백 원사님. 김 상사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일행이 있습니다.”

“어, 어. 그래요.”

“맛있게 드십시오.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김윤조는 일행에게 인사하고는 구석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수혁은 하사관 무리를 빤히 보다가 김윤조의 손짓에 자리로 가서 앉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왁자지껄하던 식당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전부 수혁을 의식하느라 바빴다. 넓은 식당이라 사각지대가 있어 소식이 늦은 테이블도 옆 좌석의 수군거림을 듣고 목소리를 낮췄다.

“야, 강수혁 소령 아냐?”

“맞는데. 강수혁이 밥도 먹어? 에스퍼 전용 에너지 어쩌고만 먹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간부 식당에도 안 오잖아.”

“몰라? 그래도 사람인데 밥은 먹겠지. 그런데 나는 특작부 10년 만에 처음 본다.”

“일행은 가이드인가. 그 준위라던?”

“그런가 본데.”

아무리 목소리를 낮춘들 수혁에게는 생생하게 들렸다.

심지어 주문받으러 온 식당의 중년 여사장마저 “웬일이셔? 흰 전투복은 처음 봤어.”라며 반가워하면서도 시선은 내내 수혁에게 머물렀다. 뭔가 묻고 싶은데 군부대 앞 식당 주인답게 눈치껏 입을 다무는 기색이었다.

“훈련 마치고 바로 와서요. 저희 등갈비 김치찜 대짜 두 개요. 공깃밥은 일단 4개 주시고 이따가 더 시킬게요.”

“일행 더 있으셔? 우리 집 양 많은데 다 드실 수 있겠어?”

주문을 받아 적던 사장이 말렸다. 그에 김윤조는 옆 테이블에 이미 나온 냄비를 가리켰다.

“저게 대짜죠? 소령님 저걸로 되시겠습니까?”

수혁이 고개를 돌리자 옆 테이블에 앉은 네 명이 일제히 멈췄다. 그들은 맹수와 마주친 피식자처럼 조용히 냄비만 응시했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는 대짜답게 컸으나 수혁의 양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적어.”

“네. 대짜 두 개요. 사리는 하나씩 전부 넣어 주시고. 계란말이 2개 추가요.”

“혹시 무슨 영상 찍어? 그럼 자리 조용한 데로 옮겨드리고.”

“아니요. 원래 많이 먹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총 6인용 테이블을 둘이서 차지하고 기다리자 푸짐한 밑반찬과 함께 수저와 물수건이 나왔다. 김윤조는 전투복을 입은 채로 놓아주는 수저를 정리하고 물 잔에 물을 따르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수혁은 눈치껏 김윤조 따라 했다. 김윤조는 몰라도 자신을 지켜보는 식당 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초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잠시 뒤 사장과 직원이 각자 푸짐한 김치찜 냄비를 들고 왔다. 김윤조가 테이블 불판 뚜껑을 여는 걸 보고 수혁도 마치 알았던 것처럼 옆에 있는 불판 뚜껑을 열었다.

바깥쪽 불은 사장이 붙였다.

“안쪽에도 불 켜요. 조리되어서 나온 거니까 끓으면 바로 드시면 돼.”

그에 김윤조가 몸을 일으켜 불에 손을 대려고 했다. 그보다는 팔이 긴 수혁이 켜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 무엇보다 직접 해 보고 싶었다.

“내가 할게.”

“네. 이쪽으로 돌리시면 됩니다.”

“나도 켤 줄 알아, 이 자식아.”

짜증을 냈지만, 사실 수혁은 내심 신기해 죽을 지경이었다.

테이블 설치 불판에 불을 켜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난 집게도 처음이고, 탄 자국이 선명한 플라스틱 앞접시도 처음이었다.

이미 뜨거웠던 찜은 금방 끓었다. 냄비 뚜껑을 열자 흰 김이 확 피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장이 다가와 가위로 김치와 등갈비를 잘라서 각자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이런 서비스를 받아본 일이 없어서 그런지, 가만히 있기가 민망하고 불편했다.

“원래 이런 건가.”

혼잣말에 김윤조가 “뭐가 말입니까?” 라고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수혁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고기와 김치를 자르고 불까지 알아서 줄인 사장은 김윤조의 흰 전투복을 보더니 물었다.

“앞치마 가져다드려?”

“네. 두 개 주십시오.”

사장은 큰 구멍이 뚫린 흰색 부직포 두 개를 가져왔다. 윤조는 하나를 펴서 목에 걸고 다른 하나를 수혁에게 내밀었다.

“옷에 튀지 말라고 쓰는 겁니다. 소령님도 쓰십시오. 국물이 튀면 잘 안 져요.”

“어, 어.”

목에 건 부직포를 폈다. 워낙 덩치가 커서 앞 일부분만 가려졌다. 꼭 턱받이를 한 모양새였다. 등신 머저리 같아서 화가 나야 하는데 묘하게도 입매가 스르륵 풀렸다.

“이거 TV에서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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