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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05화 (182/256)

105화

지프가 시원하게 특작부 내부 도로를 달렸다. 오픈카답게 휘몰아치는 칼바람에도 뜨끈하게 달아오른 윤조의 뺨과 귀는 쉽게 식지 않았다.

한참을 달린 지프는 특작부를 통과하여 후방 산길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장교 아파트 어귀에 도착했다. 주차하고도 윤조는 내리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은 손등이 이마를 댔다.

아까 신병 훈련 중에 강수혁이 나타난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AI의 도움을 받아 각종 바이털을 조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졸도하거나 혹은 요란한 맥박 소리를 강수혁에게 들켰을 거다.

AI를 통한 통제를 끝내자 숨쉬기가 버거웠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정신이 다 아찔했다.

페어링 해제 후에 처음 만난 것이었다. 언젠가는 겪을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달리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손발이 떨리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전투복이 단단하게 받쳐 주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을 것이다. 그나마 AI 덕분에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까진 괜찮았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다 보니 막판에는 운전대를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후유증인가?”

간이 AI 스캔으로는 특별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페어링 해제하면서 정밀 검사를 했을 때도 이상 징후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체 반응은 무언가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경우 원인은 대개 정신이나 감정에 있다.

“아무래도 너무 의식한 탓인 듯한데.”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쉽진 않다.

강수혁은 입대 이래로 윤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시작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굉장했다. 끝도 솔직히 원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라우마가 남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냥 트라우마라기에는 또 이상했다. 오늘 오후 내내 느꼈던 들뜸과 설렘이 꽤 흥겨운 축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보면 지나친 호감이었다. 너무 좋아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으로 보면 딱 맞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만 치부할 상황이 못 되었다.

가이드는 에스퍼에게 호감을 지니도록 설계되었다. 가이드는 제 페어링 에스퍼를 기본적으로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 자체가 거짓은 아니다. 속칭 말하는 정(情)이 빠르게 쌓이도록 감정 시냅스 부분을 약간 자극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윤조는 뇌를 리셋했다. 지나치게 부풀려지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축소된 부분을 전부 수정하고 감정적 동요가 적은 기본 설정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가이드 로그와 메모리를 다시 마운트했을 뿐이다. 이후 특별한 교감 없이 페어링을 해제했다. 감당 안 될 크기의 호감을 지닐 이유도, 쌓을 여유도 없었다.

“이건 이상해.”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이 고장 난 거다.

리셋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까. 하지만 심 박사는 아무런 이상을 찾아내지 못했다.

“괜히 또 만나자고 했나.”

후회하려다가 급히 고개를 저어 떨쳐 버렸다.

안정적인 일상을 바탕으로 다시 관계를 쌓아 보기로 한 결심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페어링을 끊었다고 해도 인간관계마저 완전히 파탄 나는 건 아니고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한 언제나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동료이다 보니 내외해 봤자 장기적으로 불편만 가중된다.

“잘 지내면 좋은 거지. 잘 지내면.”

한참 지프에 앉아 있던 윤조는 완연한 밤이 되었을 때야 몸을 일으켜 집으로 들어갔다. 집기가 별로 없는 휑한 소형 아파트에선 옅은 먼지 냄새가 났다.

전투복을 벗고 샤워했다. 뜨거운 물을 맞다가 이내 찬물로 몸을 식혔다. 뒤늦게 긴장이 풀리면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으로 휑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찬물 샤워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몸이 다시 뜨거워졌다. 이래저래 몸을 뒤척이는 사이 이상하게도 열기가 다리 사이로 모였다.

난처한 반응을 애써 무시하면서 고집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황당하게도 안전 가옥에서 몸을 겹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델 듯이 뜨거운 몸이 윤조의 전신을 찍어 눌렀다. 매끄러운 혀가 입 안을 누볐다. 거대한 기운이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내장을 휘저었다. 턱턱 부딪히는 힘에 뇌가 다 흔들렸다.

어느새 윤조의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뜨거운 기둥이 잡혔다. 엄지와 검지를 놀려 딱딱해진 귀두를 문질렀다. 느릿느릿한 손길은 이내 거칠고 빨라졌다. 기둥을 훑는 내내 몸을 뒤틀었다.

절정은 금방 찾아왔다. 하지만 일상적인 환희는 잠재한 욕망 전체를 풀어내지 못했다.

엉덩이골이 푹 패였다. 안에 자리 잡은 습한 입구 언저리가 미치게 간지러웠다. 욕망에 활활 불타는 건 아무래도 이쪽이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쑤셔 봤으나 턱없는 짓이었다. 난처했다.

도구를 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럴 만한 물건도 없거니와 그런 걸 썼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추후 신체 스캔 시에 발각당할 거다. 강수혁과의 페어링도 해제된 마당에 항문 열상의 원인에 관해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채 충족하지 못하는 열기에 몸을 뒤틀었다. 터진 입술 사이로 새는 신음은 베개가 먹어 버렸다. 윤조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해 가는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쳤다.

* * *

“오늘도 야근 각이구나.”

최정은 까만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특작부 서류와 보고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북태평양 게이트 사건 이후로 몰아친 정치적, 외교적 후폭풍을 온몸을 맞고 있는 것도 자신과 직속 행정 장교들뿐이었다. 다들 눈 밑에 다크 써클을 달고 에너지 드링크를 빨면서 패드와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프린터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사무실에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다.

“이봐.”

놀랍게도 망나니였다.

“어이쿠, 우리 강 소령님이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소인을 찾아오셨습니까.”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강소령이 개인적으로 나한테?”

최정은 꽤 놀랐다. 강수혁과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니 대단히 곤란하고 심각한 문제거나 아니면 헛웃음이 터질 정도로 하찮고 어이없는 문제일 거다. 전자면 무조건 알아야 했고, 후자면 알아도 무방했다. 결론은 일단 들어 보는 것이다. 어차피 시간 없다고 거절해 봐야 저 망나니는 납치, 감금, 협박을 서슴지 않을 테니.

상대가 앞장서는 길을 최정은 군말 없이 따라갔다. 작은 회의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강수혁이 최정에게 들어가라고 턱짓했다.

“뭔 얘기를 하려고 이래? 나 무섭다.”

약간 떨면서도 최정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면서 개인 단말기에 있는 응급 구조 신호 버튼을 만지작댔다.

문을 닫은 강수혁은 팔짱을 끼고 조용히 다가왔다. 표정이 심각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한참 뜸을 들이는데 북태평양 F형 게이트 사건 이후로 대미 군사 협상과 국정 감사 준비로 바쁘니까 빨리 용건이나 꺼내라고 할 용기가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저기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겪은 일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고 싶거든.”

강수혁이 아는 사람이 있나? 저건 백 퍼센트 본인 얘기다. 거기다가 저런 어두로 시작하는 문제를 심나연 대신에 자신에게 물어본다고? 그렇다면 심나연에게 꺼내면 욕 뒈지게 퍼먹거나 혹은 밤새도록 조롱당하는 종류다.

자연스럽게 김 준위가 떠올랐다. 하지만 최정은 마치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었다.

“뭔데?”

“내가 아는 사람이 가깝게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좀 얽힌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빙고. 이건 무조건 본인과 김 준위 얘기다.

“그게 집안에서 정해 준 사람이라서. 처음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잘 지내긴 했어. 그런데 얼마 전에 헤어졌대. 자기가 찼다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또 맞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각색 솜씨가 초차원적이었다. 최정은 웃음을 억지로 삼키면서 “그래서?”라고 물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움을 준 일이 있는데 상대방이 고맙다고 밥을 샀거든. 아이스크림도.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중에 또 삼겹살 먹으러 가자고 했대. 자기를 찬 사람을 상대로 말이야.”

“아. 그래?”

벌써 소문이 짜하게 돌았다. 김치찜 집에 흰 전투복 차림의 가이드와 비인간적이기로 악명 높은 트리플 S급이 다녀갔다고. 심지어 사인 인증까지 남겼다.

“왜 그런 걸까?”

“뭐가?”

“그러니까 밥을 산 건 이유가 있잖아. 삼겹살은 이유가 없어. 그런데 왜 또 먹쟤?”

강수혁은 정말로 진지하게 궁금해했다. 밥 몇 번 먹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것도 김윤조와 강수혁처럼 웬만한 주말 드라마 뺨치는 서사가 있는 사이에?

“헤어졌어도 잘 지내고 싶은가 보지.”

“그러니까 왜 잘 지내고 싶은데?”

“동료끼리 어색하면 일하는데 지장이 생기잖아. 조직 생활이니까 을은 더러워도 숙여야지.”

정답을 말했는데 강수혁은 단칼에 거부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사람을 상대로 더럽다니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그리고 그럴 거면 그렇게 막 쉽게 놀리고 웃으면 안 됐어. 그건 진짜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분명해!”

아는 사람 얘기라더니. 동료에 조직 생활을 언급해도 강수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더불어 뭔가 원하는 답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확인하러 굳이 바쁜 최정까지 찾아온 거다.

강수혁은 전투 머리는 잘 돌아가면 이런 쪽 머리는 아둔하다 못해 멍텅구리 수준이었다. 성장 배경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이해는 가지만. 아니 이렇게까지 유치하고 지질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최정은 원하는 대답을 곱게 들려 주었다.

“혹시 미련이 남았거나 뭐 그런 건가.”

“맞아. 이거 미련 남은 거 맞지? 아니면 이럴 수 없어.”

“알면서 왜 물어봐.”

“아니 내가 생각한 게 맞나 해서.”

“정답 체크는 본인한테 하세요, 소령님. 바쁜 대령 붙잡고 이러시지 마시고요.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납니다”

최정은 할 수 있는 한 신속하게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기 전에 미친 듯한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아이쿠야!”

간이 책상을 밀치면서 넘어지는 최정 옆으로 망할 놈의 망나니 새끼가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반대편 창 쪽으로 보니 장교 아파트 방향이었다.

“김 준위, 뒤를 맡길게. 꽃띠 망나니에게 밥도 모자라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였으면 책임져야지.”

최정은 창문을 통해 마음을 전하고 원래 사무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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