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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06화 (183/256)

106화

강수혁은 원칙적으로 장교 아파트에 접근 금지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입구에 감시 카메라도 있고 또 누가 우연히 목격할 수도 있기에 현관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부터 포기였다. 대신 선택한 경로는 베란다였다. 아파트 맨 구석 호수라서 키 큰 나무와 관목 덕에 사람의 눈을 피하기도 최적이었다.

장교 아파트 인근에 들어서서는 어두운 밤 그늘 사이로 조용히 비행했다. 이 단지에는 에스퍼 장교도, 또한 본부와 같은 특수 레이저 감지 장치도 없기에 은밀하게 미끄러지는 수혁을 알아낼 자는 아무도 없다.

어두운 관목 그늘에 숨어 능력으로 베란다 창을 움직였다. 군인이 사는 1층답게 잘 잠겨 있었다. 염력으로 잠금장치를 조작하여 풀었다. 창은 조용히 미끄러졌다. 어느 불순한 종자가 들어올지도 모르고 또 사생활을 다른 집에 생중계할 생각은 없으므로 창문 단속을 철저히 했다. 그러곤 베란다를 현관 복도 삼아 노크했다.

“야, 자냐?”

굉장히 놀란 기척이 안에서부터 났다.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도 있었는데 정확하게 분간하진 못했다.

“난데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실례했다.”

다시 한번 거실 유리문을 두드렸다. 그때 안방 쪽에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났다. 놈의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수혁이 갑자기 들어와서 놀란 탓이겠지.

“지금 들어간다.”

그대로 들어가려다가 제 군화가 거실 바닥에 닿기 전에 도로 거두었다.

“아차차.”

장교 아파트에서는 되도록 얌전한 편이 신상에 좋다. 더욱이 차여 놓고도 잘해 보자고 예의를 차리는 깜찍한 연두부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적절한 매너는 필수다.

군화를 벗고 방 안에 거실에 들어섰는데도 김윤조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얘기만 하고 돌아갈 거야. 잠시 나와 봐.”

아까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하던 상대의 맥박이 이제는 거의 날뛰는 중이었다. 꼭 도핑한 드러머가 혼을 불태우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호흡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다가 놀랐냐? 뭘 그렇게 긴장해?”

잘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수혁은 안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대답이나 인사는 없었다.

“뭐 하는데 이렇게 안 나와? 갑자기 찾아온 건 미안한데. 장교 아파트에 드나드는 걸 꼰대한테 들키면 곤란해서…… 큰 소리 내기 싫으니까 그냥 나와 보지?”

문고리를 돌리려다가 일단 주먹을 쥐고 문에 살짝살짝 두 번 댔다. 강수혁 인생사 최초의 노크였다.

안에서 헛바람 들이마시는 기척이 났다. 이상했다. 분명히 자는 건 아니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혹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김윤조가 대답 없이 저렇게 숨만 쉬고 있을 리가 없다.

“일단 들어간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던 수혁은 일단 김윤조부터 찾았다. 그러곤 우뚝 굳었다.

방 안엔 김윤조뿐이었다. 누군가의 공격을 당한 흔적도 없다. 김윤조는 결박을 당한 것도, 재갈이 씌워진 것도 아니었다. 물론 잠든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침대 위에 있었다. 엎드린 채로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고 있었다. 이상한 부분은 차림새였다. 강수혁이 알기로 김윤조는 잘 때 벌거벗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꽁꽁 싸매는 축도 아니었다.

수혁은 눈을 껌뻑이면서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침대 이불 위에 길게 엎드린 자는 김윤조가 맞다. 위에는 얇은 반 팔 티셔츠를 제대로 입고 있다. 그런데 아래는 아니었다.

통통하고 매끄러운 엉덩이가 아파트 가로등의 어슴푸레한 빛에 당당히 빛나고 있었다. 매끄럽게 올라가는 상승 곡선에서 시원스럽게 내려가는 하강 곡선까지. 두 쪽의 굴곡이 부엉이보다 야간 투시가 뛰어난 두 눈을 통해 생생하게 들어왔다.

“……어……?”

충격에 굳은 머리를 천천히 돌리면서 상황 파악에 힘쓰는 사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김윤조는 한쪽 눈으로 수혁을 원망스럽게 째려봤다.

몸 아래 깔려 있던 상대의 두 팔과 양손의 끝은 골반 밑으로 이어졌다.

대답 못 한 이유가 이거였나. 숨이 막힌 듯 헐떡이는 숨소리는 그러니까 이런 의미였단 말이지.

가만히 있던 김윤조는 갑자기 안간힘을 쓰는 듯이 끙 앓았다. 그에 수혁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선을 괜히 방구석으로 옮겼다. 뭐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내외할 것까진 없는데. 이상하게 안 될 큰 실수를 저지른 기분이었다.

“하……흐윽.”

일견 힘들게도 한편으로는 야하게도 들리는 숨소리와 함께 김윤조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골반 밑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손으로 침대를 짚고 이불을 구겨 쥐었다. 덩달아 수혁의 멱살까지 틀어 잡히는 기분이었다.

지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부러 도발하는 건지. 김윤조는 베개에 묻은 얼굴을 지렛대 삼아 엉덩이부터 들어 올렸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파트 가로등 불빛이 희고 통통한 엉덩이를 스쳤다. 끙, 앓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종아리 위로 내려 꿇어 앉은 후, 베개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와 국부를 가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나른하게 쓸어오린 후에야 김윤조는 다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대답 못 해서 죄송합니다. 오실 줄 몰랐습니다.”

“아니 그게……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수혁은 괜히 입과 턱을 문질렀다.

치욕스러운 장면을 들켰음에도 김윤조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밑에 떨어진 속옷 반바지를 가리켰다.

“저거 좀 주워 주시겠습니까.”

“어. 응.”

수혁은 능력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손으로 속옷을 주워 김윤조에게 전달했다. 고개는 내내 불편하게 다른 쪽으로 돌린 채로.

상대가 속옷을 입는 동안 뒤늦게 여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김윤조가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셔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 아니 그게.”

이 상황에서 미련 남았냐? 라고 물어볼 용기가 수혁에게는 없다. 트리플 S급인지 나발인지와 관계없이 말이었다. 괜히 밤에 찾아왔다. 내일 본부로 가서 물어봐도 될 것을. 빌어먹을. 뒤늦게 후회가 막심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아닌데 연락도 없이 제 아파트에 숨어드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가당찮은 변명을 김윤조는 쉬이 받아넘기지 않았다.

“별거 아니라니까.”

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제 목소리에 수혁이 내심 더 놀랐다. 솔직히 김윤조의 상황에 비하면 심하게 하찮아도 목에 힘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실수는 이쪽에서 했는데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치는가. 쪽 팔려서 당장에라도 지구 대기권을 뚫고 달로 피신하고 싶었다.

김윤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요청했다.

“그럼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제가 좀…… 경황이 없어서요.”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하는데 미친 두 다리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덩달아 돌아 버린 손은 죄 없는 문고리를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인사라도 하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고개를 살짝 돌린 때였다.

“…….”

하필 상대의 얇은 반바지 앞섶이 들어왔다. 살짝 부풀어 있었다. 솔직히 했다. 한 거다. 주변에 다른 기척이 없으니 혼자서.

방에 감도는 냄새도 달랐다. 침대에서 퍼지는 살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다른 사람은 잘 못 맡을 정도로 옅은 향기여도 수혁에게는 향수를 쏟은 것처럼 강렬했다.

“왜 그러십니까.”

김윤조가 덤덤하게 물었다. 저건 지어낸 포커페이스인가, 아니면 기계 본능인 건가.

“혼자 한 거야?”

상대의 굳은 뺨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포커페이스였나 보다. 괜히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당연히…… 그럴 상대가 없으니까요.”

김윤조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대꾸는 계속 담담했다.

“왜 없는데?”

이번에는 포커페이스가 한층 더 지워졌다. 수혁을 응시하는 시선에 은근한 불만이 실렸다. 약간 일그러진 미간에 슬쩍 꼬이는 입매를 발견한 수혁은 발밑이 꺼지는 듯 내장이 울렁거렸다.

“그저께 페어링 해제했습니다. 지금 있을 턱이 있습니까.”

대꾸도 약간 꼬여 있었다.

“그랬지 참.”

“이상한 소리만 하실 거면 얼른 돌아가십시오. 용건이 있으시면 앞으로 본부 통해서 연락하십시오. 이렇게 불쑥 난입하지 마시고요.”

화난 김윤조는 벌컥 성질을 내는 대신에 이성적으로 당부했다. 그러면서 수혁을 거실 쪽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지금껏 자기 위로에 매진하던 맨손바닥이 수혁의 팔뚝에 닿았다. 가까운 만큼 진한 향기가 수혁의 이성을 마구 두들겨 팰 때였다. 별안간 김윤조의 한쪽 무릎이 푹 꺾였다.

“조심해.”

수혁이 늦지 않게 김윤조를 부축했다.

팔뚝에 걸린 김윤조는 젖은 빨래처럼 흐느적거렸다. 하얀 얼굴도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익어 버렸다. 수혁의 팔을 잡은 손이 인조인간답지 않게 뜨거웠다.

“왜 이래?”

연체동물처럼 허물어지는 몸을 추슬렀다.

“자, 잠깐만요. 저를 만지지 마십시…… 헉.”

“내가 만지는 게 아니라 네가 잠깐. 맥박이 이상한데? 체온도 너무 높아.”

수혁은 윤조의 무릎 밑에 팔을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놓으…… 하…… 십시오……흐읏.”

요구하는 음성은 차분함을 잃었다. 젖어서 야릇하기도 했다.

일단 수혁은 김윤조를 침대 위에 올렸다.

양팔을 빼자 김윤조는 힘 잃은 낙지처럼 축 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모로 돌리면서 웅크렸다. 뒤이어 손끝과 발끝을 말았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흰 이마엔 식은땀이 흥건했고 짓씹었는지 빨간 입술 사이로 더운 한숨이 푹푹 샜다. 뭔가 잘못됐다.

“김윤조, 왜 이래? 아줌마 불러 줘? 아니면 지금 바로 연구실로 데려가?”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단순한…… 열입니다.”

김윤조가 고개를 저었다. 눈이 반쯤 풀어졌다.

“열에 단순한 게 어딨어? 그렇지 않아도 좀만 건드리면 푹푹 뭉그러지는 놈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상하게 놈이 고집을 피웠다. 의구심이 더해갔다.

“그냥 뭐? 아니다. 그냥 연구실로 가. 수족관에 넣으면 무슨 이상인지 뜨겠지.”

눕혔던 상대의 팔을 잡고 당겨 도로 일으켰다.

고장 난 인형처럼 당기면 당기는 대로 딸려온 몸이 수혁의 가슴에 턱 부딪혔고, 흔들리는 머리통은 수혁의 어깨에 안착했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더운 입김이 목에 훅 끼쳤다. 간지러운 듯 찌릿찌릿한 느낌과 함께 수혁의 하체에 힘이 훅 들어갔다.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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