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아무리 그쪽이 관심을 요구해도 정도가 있다.
아픈 애를 상대로 세울 때가 아니거니와, 혹여 김윤조가 멀쩡해도 선뜻 나설 처지도 못 됐다. 동료에 전 숙소 동기 주제에 무슨. 심지어 수혁 본인이 먼저 끝낸 사이다.
어느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침을 삼키며 김윤조를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소령님.”
낮고 허스키한 부름이 더운 한숨과 함께 귓구멍을 간질였다. 우뚝 굳은 수혁의 어깨 위로 뜨거운 손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저 아픈 거 아닙니다. 이건 아픈 것과 달라요.”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에로틱하게 들리는지.
“……그럼 뭔데?”
덩달아 수혁의 목소리마저 평소보다 훨씬 낮아졌다. 어느새 고개를 가눈 김윤조가 수혁을 빤히 응시했다.
자위하다가 들킨 중에도 제법 뻔뻔하게 유지되던 포커페이스가 완전히 무너졌다. 대신 물을 먹은 바둑알 두 개가 초롱초롱 빛났다. 홍조가 번진 하얀 뺨이 씰룩거리고 동시에 촉촉한 입술이 살짝 떨렸다.
“아무래도 페어링 해제 부작용 같습니다.”
“뭐? 아까는 부작용 같은 거 없다고 했잖아.”
당황한 사람은 수혁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틀린 것 같습니다.”
김윤조는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하자 괜히 또 성질머리가 앞섰다.
“멍청하게 제 몸이 어떤 줄도 몰라?”
“페어링도, 페어링 해제도 처음이라서요.”
다그치자 김윤조는 희미하게 웃었다.
더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수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망할 놈의 페어링. 망할 놈의 에스퍼-가이드 시스템.
군 상부와 아줌마를 향한 원망이 훅 치고 올라왔다.
“당장 연구실로 가자.”
“소용없을 겁니다.”
왜라는 의문을 입에 담기도 전에 김윤조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설명을 느릿느릿 이었다.
“제 신체 기능은 멀쩡합니다. 뭔가 이상이 있다면 24시간 풀 스캔 및 재생 시에 발견했을 겁니다.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추정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심각한 단어에 수혁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다가 금방 화가 났다.
“이 새끼야. 대가리를 깼다가 다시 붙였는데 트라우마가 생기지. 시발. 연두부 주제에 제가 무슨 용사라고. 왜 그런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망할.”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뭔데?”
숫제 따지고 드는 수혁을 향해 김윤조는 마치 유치원생을 대하는 선생님처럼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은 뇌 손상이나 그로 인한 두뇌 리셋이 아닙니다. 안가에 있던 일주일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안가 이후에 있었던 사건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이 왔다. 거기서 멈춰도 충분히 알아들을 텐데 김윤조는 정확하게 확인 사살했다.
“아무런 설명과 양해 없이 이루어진 일방적인 페어링 해제 탓입니다. 정신적으로 대단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만큼 충격이 큽니다. 페어링 해제로 인한 스트레스는…… 저는 한국 독자 모델이라 앞으로 더 많은 관련 연구가 있어야겠지만요. 일단 세계적으로 알려진 연구 자료에 따르면 상대의 사망이나 사망에 준하는 상태로 페어링 해제를 하는 경우 그 스트레스 정도가 직계 가족 혹은 배우자의 사망에 준한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지 수혁은 전혀 몰랐다. 밥맛이 뚝 떨어지고 이대로 먼지가 되어서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 경우는 사망과는 관련이 없는 해제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배우자의 일방적인 이혼 선언 및 의견 조정 없이 확정 절차를 밟은 것과 비슷하겠네요.”
입이 떡 벌어졌다. 손으로 일단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그러곤 김윤조를 다시 봤다.
설명을 끝낸 상대의 미간은 못마땅한 기운을 품은 채 일그러져 있었다. 수혁을 내내 노려보던 시선이 천천히 대각선 아래로 향했고, 조곤조곤 설명으로 수혁의 미세한 양심을 사정없이 패던 입은 조개처럼 꾹 다물렸다가 끓어오르는 열을 참지 못하고 다시 툭 벌어졌다.
“그러니까 제 상태는 전부 소령님 탓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심하게 낙담한 투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이미 졌다. 미련이 남았냐 뭐냐는 물음은 저 아래로 쑥 들어갔다. 뭘 어떻게 해 볼 것도 아니었다.
김윤조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페어링 해제로 더는 저한테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제해 주는 셈치고 한 번만 자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니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셈으로 한 번만…… 합시다.”
문장이 뇌에 채 입력되기도 전에 김윤조의 입술이 수혁의 것 위로 포개졌다. 수혁의 눈알이 튀어 나가려 했다. 하고 싶어 죽겠으니 한 번만 하자고? 해 달라고?
흥분에 눈이 돌아간 가이드는 바싹 굳어 버린 에스퍼를 슬쩍 밀었다. 그것만으로도 트리플 S급 에스퍼를 함락시키기 충분했다. 침대에 반쯤 걸쳐진 채로 눈알만 굴리고 있는 수혁의 허리께에서 탄탄하고 곧은 허벅지가 공중을 갈랐다.
뒤이어 매끈한 엉덩이가 정확하게 중심 위로 내려앉았다. 수혁은 반사적으로 하복부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들숨도 함께였다.
“역시. 반응은 있네요.”
김윤조는 엉덩이를 잠시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그러면서 수혁의 굵은 기둥이 제 엉덩이골 사이에 오도록 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저는 싫어도 섹스는 괜찮아서 다행입니다.”
“아니…….”
자기가 언제 김윤조를 싫어했다고. 수혁이 항변하려는 찰나 입술이 맞붙었다.
수혁의 위를 점한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깨물어서 부푼 입술은 촉촉하기가 꼭 젤리 같았다. 달콤한 냄새도 났다. 샴푸나 혹은 샤워젤 같았다. 그게 무슨 과일 향인지 혹은 어디의 꽃 향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냥 매우 마음에 들고 계속 맡고 싶기만 했다.
김윤조를 알게 된 이후로,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이후로 키스는 늘 재미있고 흥분되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던가? 정신이 혼미해져 오로지 입술에만 모든 감각이 쏠리는 그런 중독적인 행위였나?
입술을 가르고 매끄러운 살덩이가 들어왔다. 수혁은 기꺼이 그를 마중했다. 촉촉한 혀가 마치 사탕처럼 달았다. 눈을 감고 따뜻한 인조 인간 캔디의 맛에 흠뻑 젖어 들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너무 좋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는 동시에 강한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상대가 머리를 갈아 끼우든 뭐든 입술을 붙이고 혀를 비비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 그래도 되는 건가? 정말로?
“잠깐.”
수혁은 입술을 떼며 상체를 일으켰다. 살짝 당황한 듯 고개를 드는 김윤조를 억지로 노려봤다. 그냥 포기하고 이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김윤조.”
“예.”
“넌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냐?”
“예?”
“그러니까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한 배우자니 뭐니 내 탓을 하다가 하자고 달려드는 거야? 나는 정말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이번에는 김윤조가 스턴이 걸렸다. 남자 주제에 그것도 군인 주제에 어이없이 귀엽고 야한 눈매를 깜빡이더니 ‘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아는 무슨 아. 정말 널 못 따라가겠어. 애초에 머리를 바꾸었다고 치자.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되는 바람에 내 상태가 좀 바뀌었다. 이렇게 얘기는 못 하는 거야?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내가 하자는 대로 장단을 맞추다가 뒤늦게 내가 이상하다고 하니까 뇌를 바꿨어요~ 이러면 되는 거야?”
충격을 받은 김윤조의 안면이 딱딱해졌다. 반대로 눈은 물을 먹은 것처럼 일렁였다.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인조인간 주제에.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서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 때마다 수혁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혁도 만만찮게 상처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하는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줄 알았다면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미리 전후 사정을 드렸을 겁니다.”
그 말에 수혁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상체를 벌떡 들자 여전히 제 허리에 앉은 김윤조가 힘에 떠밀려 뒤로 휘청였다. 수혁은 공중을 휘젓는 팔을 잡아챘다.
“심각하게 생각할 줄 몰랐어? 그냥 뽀뽀해 주고 빨아 주고 옆에서 알랑거리면 다 좋아하는 줄 안 거야? 아무리 개망나니에 상종 못 할 쓰레기라도 나도 마음이라는 게 있어.”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한테는 목숨 걸고 나서지 말라고 해 놓고 반대로 너는 안 그랬잖아! 실컷 게이트 패 놓고 돌아와 보니 네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지. 망할 수족관은 다 터져서 망가졌지. 아줌마는 너 죽는다고 울고 불지! 염병할 바다 한복판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지! 그런 중에 양키 놈들까지 후려 패서 간신히 고쳐 놨더니 뭐? 이젠 바뀌었다고? 누가 바꾸래? 누구 마음대로 내 연두부를 바꾸랬어? 아줌마는 아줌마대로 날 몰아붙이고 머리가 복잡해서 죽을 것 같은데 망할 네놈 새끼는 별일 아닌 것처럼 더 잘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누가 너한테 잘해 달라고 했어? 내가 너한테 그런 적 있냐고!”
수혁은 김윤조를 붙잡고 숫제 울부짖었다.
바로 지척에 있는 흰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대가 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수혁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을 뿐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까만 눈이 한층 커졌다. 붙들린 팔이 움직였다. 곧 수혁의 뺨에 김윤조의 손바닥이 닿았다.
“우십니까?”
“……안 울게 생겼냐? 평생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새끼가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데.”
얼굴을 만지던 손이 우뚝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