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12. 소용돌이
망할 마비는 한 시간 정도 몸을 담그는 중에 다 풀렸다. 사지 마비가 완벽하게 풀린 걸 확인한 연두부는 덥고 좁다면서 먼저 일어섰다. 옆 샤워 부스에서 채 3분도 걸리지 않는 군대 샤워를 하고 나가는 통에 눈으로 호강할 기회도 없었다.
“망할 아줌마. 조금만 일찍 풀리게 하면 좋잖아.”
나와서 몸을 닦으면서 투덜투덜 댔다. 기껏 고급 호텔 욕조에 둘이 함께 몸을 담그는 아주 좋은 기회인데 고작 발목이랑 발꿈치만 만진 게 너무 억울했다. 향긋한 거품을 잔뜩 내서 서로 서로에게 막 끼얹고 그런 게 호텔 목욕의 묘미 아닌가. 적어도 수혁이 보고 접한 미디어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다 닦으셨으면 얼른 나오십시오.”
애타는 마음을 모르는 연두부는 삭막한 잔소리만 했다. 목욕 수건은 담요 크기라 허리에 두 번 감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괜히 어깨에만 쓱쓱 닦으면서 맨몸으로 나갔다. 덜렁이는 걸 좋아하는 연두부가 조금이라도 애타 보라고.
연두부는 반팔 티셔츠에 사각 내의만 입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질감의 옷감 아래로 드러난 엉덩이 아래 굴곡만으로도 야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 제 모습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남자는 수혁의 알몸에도 관심이 전혀 없었다.
“감기 들립니다. 옷 도착했으니 얼른 입으십시오.”
“내가 감기 들릴 거면, 전 세계 사람들 다 동사했겠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걱정은 늘 들으실 테니 그러려니 하십시오.”
내밀지도 않은 손에 속옷을 턱 안긴 김윤조는 쌩 돌아섰다. 모처럼 재결합이고 신혼이나 다름없는 상황치곤 너무 냉랭했다.
“왜요?”
못마땅함을 느꼈는지 막 양말을 집어 들던 녀석이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멋있다든가 먹음직스럽다든가 그래야 하잖아.”
“아, 배부르고 바빠서요. 얼른 준비하십시오. 11시 출발이지만, 그 전에 비서 장교님 만나서 사전 예측 질답을 암기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똑 떨어지는 대답이 냉랭하다 못해 춥다.
“내 애인은 너무 삭막해.”
“애인이라뇨? 우리 그런 거 아닙니다.”
“뭐?”
연두부 새끼가 갑자기 기겁할 소리를 했다.
눈과 입이 벌어지다 못해 콧구멍까지 벌렁거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혈관이 확 오그라들어서 귓가에 이명이 윙윙 울렸다. 심지어 온욕에 느슨하게 풀렸던 두 쪽도 착 올라붙었다.
“네가 먼저 재결합하자고 했잖아!”
버럭 고함치자 연두부 새끼가 인상을 찌푸리며 귓구멍을 막았다. 열이 확 터졌다.
“다 따먹었으니까 이제 됐다는 거야? 이 망할 새끼야?”
“무슨 소립니까. 아직 전혀 안 됐고 앞으로도 더 따먹을 건데요.”
느긋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새끼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럼 내 몸만 좋다는 거야? 그래? 나는 몸만 바치는 거야?”
“착각하시는 모양인데요, 강수혁 소령님.”
미친 새끼가 갑자기 서늘한 눈빛을 지으며 다가왔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기운에 압도되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애인 같은 거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배. 우. 자.입니다.”
수혁의 턱밑까지 온 김윤조가 도발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얄미운 말만 반복하는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은 거리에 있었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엇박을 내기 시작했다.
“원래 가족끼리는 대낮엔 간지러운 소리 안 하는 겁니다. 바쁜 아침 준비 중에는 더더욱이요. 하고 싶으면 이따가 해 지고 하십시오.”
“……그런 게 있어?”
“네. 있습니다.”
단호한 선언과 함께 김윤조는 바로 떨어졌다. 이만큼 가까이 있었으면 어색해서라도 뽀뽀 한 번은 할 것 같은데.
또 이상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너무 그럴싸하달까. 이쪽은 처음 가 보는 가게에서 어색하게 쭈뼛쭈뼛하는 사이 아주 능숙하게 주문하고 서비스를 받는 여유로움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가족 분위기는 잘 모르니까.’
살면서 가족다운 가족 관계를 가져 본 일이 전무했다. 생활관 공유가 기본인 군 생활 중에서도 제대로 동거한 사이도 따지고 보면 김윤조가 최초였다.
입대 전에는 위탁 시설에서 공동체 아닌 공동체 생활을 했다. 능력이 크게 발달하면서부터는 공동체 내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아니 어울리게 했다간 자칫 인명 사고가 날 수 있기에 오히려 수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또래 애들이 툭하면 귀찮게 해서 그러는 편이 수혁도 편했다.
12살 되기 전에 입대하고서는 장교로서 개별 숙소를 지급받아 혼자 살았다. 식사는 대부분 장선욱과 함께였고 더 커서는 혼자 먹었다. 15살쯤 요리에 취미가 생기고서는 집에서 혼자 먹었다. 남의 눈이 없어서 편했고 또 원하는 만큼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결과적으로 가정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수혁은 알지 못했다. 부모다운 부모도 없었고, 뭐 짜증 나는 이모와 못미더운 삼촌 비스무리한 인물은 있지만. 하여간 그렇다.
“그러니까 부부 사이에는 애정 표현을 자주 안 한다는 거지?”
속옷부터 입고 나서 김윤조 옆으로 가면서 물었다. 제복의 비닐 포장을 뜯은 김윤조가 어디서 다리미와 다림판을 찾아내면서 대답했다.
“네. ‘가족끼리 왜 이래?’ 이런 말도 못 들어 보셨습니까.”
들어 본 적이 있긴 있다.
“거짓말이면 나중에 혼난다.”
“최 대령님이나 장 중장님께 여쭤보든가요.”
심드렁하게 답한 후 김윤조는 와이셔츠와 정복 바지를 능숙하게 다리기 시작했다.
“다리미질 잘하네.”
“군인의 기본 소양 아니겠습니까. 군복의 멋은 칼처럼 잡힌 각 주름에서 나오니까요.”
“그래?”
여태껏 군복 주름을 잡고 다닌 적이 없어서 몰랐다. 하긴. 애초에 정복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입기에 입은 적이 손에 꼽는다. 임관할 때 한 번 입고 그 뒤로는 없었나? 내부 문건용 프로필 사진도 전투복 입고 찍어서 나중에 정복을 따로 합성했다고 들었다.
“그럼 나도 칼각 좀 잡아 볼까.”
마취가 풀리면서 능력도 돌아왔다.
하급 에스퍼처럼 손가락 움직임이나 특별한 포즈를 취하는 일도 없이 그저 의식만으로도 제복 포장이 뜯기고 알아서 공중에 좌르륵 펴졌다. 옷감 위로 공기층을 압축시켜 꽉 눌렀더니 깔끔하게 펴졌다. 거기까지 1초도 안 걸렸다.
김윤조가 조용히 다리미를 놓았다. 그러곤 제 옷을 내밀었다.
“뭐, 너도 해 줘?”
“부부끼리는 원래 서로 해 주는 겁니다.”
뭔가 부부라는 말을 만능처럼 사용하는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부부라고 꼬박꼬박 칭하는 게 귀여워서 그냥 해 줬다.
정복은 다른 특작부 장교처럼 검은색이었다.
계급을 나타내는 철제 견장 외에도 국기에 부대 마크에 각종 휘장, 흉장(胸章)까지 뭔가 많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에스퍼를 나타내는 특작부 특유의 휘장과 왼쪽 가슴에 있는 무수한 약장(略章)이었다. 훈장이나 휘장에 관심이 없다 보니 수혁 본인도 무슨 작전을 통해 어떤 의미로 받은 건지 몰랐다. 그냥 제법 많다고만 느꼈다.
“리본 바가 이렇게 많았습니까? 웬만한 장군 수준인데요. 아니 전과가 없는 장군보다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윤조가 감탄하자 그제야 뭔가 대단한 것 같아서 뿌듯해졌다.
“뭐. 국가 최고 전력을 담당하다 보니.”
그러면서 수혁은 윤조의 정복도 확인했다. 제 것보다는 훨씬 적어도 눈에 띌 만큼은 제법 달려 있었다. 거기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흰색 휘장이 달려 있었다. 현 국군 유일의 특작부 소속 가이드 휘장이었다. 정모도 에스퍼와 달리 흰 띠가 있었다.
“너도 있네.”
“특수부대 출신 평균입니다. 소령님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존경심을 담고 약장을 하나하나 세어 보는 흰 얼굴이 꽤 귀여웠다. 부부는 아침부터 간지러운 짓을 안 한다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쪽.
집중하던 입술에 뽀뽀했다. 그러자 윤조가 눈만 흘끔 올리더니 다시 약장 개수에 집중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상대의 심박이 약간 빨라졌다. 수혁만큼 설레면서 겉으로 티만 내지 않을 뿐이었다. 환장하게 귀여운 새끼.
쪽쪽.
“아침에는 이런 거 하지 말라니…… 흐음.”
거듭 뽀뽀를 날리다가 이내 허리를 휘어잡고 입술을 진득하게 붙였다. 살짝 밀어내던 상대의 손이 이내 수혁의 허리에 감겼다. 입이 벌어지고 뜨거운 살덩이가 서로를 넘나들었다.
너무 좋다. 김윤조가.
툭하면 틱틱거리고 때때로 너무 어처구니없는 또라이에 가끔…… 아니 자주 열받게 하는 망할 연두부 새끼가 선망과 감탄의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때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만지지 않으면 허전하고 부르지 않으면 심심하다. 언제는 머리가 연결된 것이 너무 끔찍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만져야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귀여운 새끼를 누가 훔쳐 가면 어쩌지? 페어링이 없으니까 별별 걱정이 다 든다. 페어링이 있으면 적어도 서로의 급박한 상태나 누가 훔쳐 간 정도는 알아챌 수 있다. 전에 김윤조가 머리 깨먹었을 때나, 제가 그 양키 영감탱이에게 탈취당했을 때처럼.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제야 맞붙었던 입술이 떨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간 손이 어느새 날개뼈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걸 김윤조가 슬그머니 밀어냈다.
“준비되었습니까?”
비서 장교가 밖에서 물었다. 옷은 다 입었다. 구두만 신으면 된다.
“네. 지금 나갑니다.”
김윤조는 키스하느라 살짝 주름진 정복 상의를 털더니 이내 정모를 옆구리에 꼈다. 그러곤 수혁에게 곁눈질을 했다. 손등으로 입을 닦은 수혁은 제 파트너의 뒤에 바짝 다가가 섰다. 정모는 알아서 날아왔다.
비서 장교는 두 사람을 다시 장선욱의 객실로 안내했다. 스위트룸 거실 소파 테이블에는 아까는 보지 못한 서류 파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다 보란 뜻은 아니었고 그중에 가장 얇은 파일 하나를 꺼내 윤조와 수혁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받은 사람은 윤조뿐이었다.
파일을 열자마자 익숙한 얼굴의 사진이 나왔다.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현 여당 대표 이청규였다. 이세명이 그렇게 믿고 따르는 아버지였다. 생긴 것도 꼭 썩은 가지 같았다.
“공개 감사 출석 전에 이 대표와 비공개 회담을 먼저 할 겁니다.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정리했으니 이 자리에서 바로 숙지합니다.”
“알겠습니다.”
비서 장교는 중령이었다. 그렇기에 편안하게 말을 놓아도 되는데 그러지 않았다. 미디어를 가까이에서 접하기에 생긴 업무용 예의였다.
“나도 봐야 해?”
“강 소령은 되도록 답변하지 않습니다. 강 소령은 참석만 하고 질답은 김윤조 준위가 담당합니다. 강 소령에게 직접 하는 질문도 가이드로서 김 준위가 대변합니다.”
특작부의 명물 새는 바가지에게 감히 국회 마이크를 대줄 강심장이 어디 있을까.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래? 그럼 난 놀아도 되지?”
금방 풀어진 수혁이 소파에 앉으려 들었다.
“바지 구겨집니다. 앉지 마십시오.”
파일을 넘기던 윤조가 한마디 했다.
“그럼 떠 있지 뭐.”
수혁은 투명 선베드에 누운 사람처럼 공중을 둥둥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