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백화점 인근에 이르러 횡단보도 신호에 걸렸다. 백화점 앞이라 그런지 신호가 금방 떨어졌으나, 문제는 신호 주기를 짧게 조정할 만큼 이용객이 많다는 점이었다.
“헉. 강수혁이야.”
“야야. 봤어? 봤어? 완전 커. 진짜 대문짝이야.”
“옆에 있는 사람이 가이드지?”
“어어. 김윤조다. 비율 미친다.”
“세상에. 찍어. 빨리 찍어.”
“이미 도촬 중이야, 조용히 해.”
쇼핑 나온 젊은 남녀는 물론이거니와,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도 모조리 강수혁을 의식했다.
“아빠. 저기.”
“어린이는 에스퍼 가까이 가면 안 돼. 저 삼촌이 숨만 쉬어도 너 미국까지 날아가. 여기서 인사해.”
작은 손을 단단히 잡은 아빠가 강수혁에게 가자고 조르는 애를 타일렀다.
“안녕하세요!”
아이가 대뜸 크게 인사했다. 하지만 강수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뿐 아니라 아예 주변을 싹 무시하는 중이었다.
“아빠아!”
“삼촌이 못 들었나 봐. 한 번만 더 크게 인사해 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강수혁 삼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통에 강수혁을 두고 떠들던 다른 사람들도 아이 앞을 뚫어 주었다. 하지만 강수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강수혁을 기준으로 반대편 옆에 서 있던 윤조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흐어어엉.”
아이는 기어이 눈물을 터트렸다. 그때 신호가 떨어졌다.
“가자.”
수혁이 윤조를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애한테 한번 웃어 주지 그랬습니까.”
“응? 애? 누구?”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수혁이 주변을 돌아봤다. 실망한 아이는 이미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지나다니는 인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인사하던 애 있지 않습니까.”
“그래? 언제는 악수도 안 된다면서?”
“눈으로 인사하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애잖아요.”
“복잡하네. 인사시킬 거면 손을 잡아서 신호를 보내. 아니면 몰라.”
모른다는 말에 윤조가 인상을 썼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에 수혁은 살짝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차 엔진 소리에 각종 도시 소음에 사람들 숨소리, 말소리 등등. 신호 기다리다가 돌아 버릴 것 같아서 고막을 터트렸어.”
“예?”
막 길을 다 건넌 윤조가 기겁했다.
“3초 만에 재생 끝나. 뭔가 들을 필요가 있기 전까지는 계속 터트리는 중.”
“아무리 시끄러워도 고막을 터트리는 미친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여기 있잖아.”
“감사에서는 어떻게 참았습니까.”
“그때는 사람 수가 적으니까.”
“당장 귀마개부터 사러 갑니다.”
청력이 좋아도 문제였다. 인파 가운데 있는 것이 고막을 터트릴 만큼 심각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지 몰랐다. 페어링이 온전했다면 단번에 알아챘을 텐데. 윤조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앞장섰다.
밀쳐진 사람들은 짜증을 내다가 저들보다 반 뼘에, 혹은 머리통 하나가 더 큰 남자들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급해서 좀 지나가겠습니다.”
단정한 양해 부탁에 다들 물러났다.
윤조가 수혁을 이끌고 향한 곳은 지하 음향 기기 매장이었다.
현시대에 이르러 필수가 아닌 기호 혹은 사치 제품으로 분류되는 소형 기기들이 쭉 늘어진 가운데 무선 헤드셋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최신에 최고급으로 구매했다. 직원이 결제를 마무리하는 동안 바로 포장을 뜯어 강수혁에게 씌웠다.
“검은색은 없어?”
“이 모델은 원래 흰색뿐이라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윤조는 단말기를 꺼내 헤드셋을 연결하고 소음 제거 기능을 켰다.
“오.”
강수혁이 흡족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제 목소리 들립니까?”
“들리기는 해. 다른 소리도 아까보단 작게 들려.”
“당장은 이거 쓰시고 다음엔 실탄 사격용 귀마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수혁이 헤드셋을 살짝 움직이면서 맞추는 사이 직원이 인증을 위해서 결제 단말기를 가져왔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에스퍼님 사인과 인증 사진 부탁드려도 될까요?”
윤조가 헤드셋 끼고 신난 듯이 매장을 돌아다니는 동네 바보 형을 데리고 오자, 직원이 사인지를 내밀었다. 사인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윤조는 직원이 포장해 준 헤드셋 상자 봉투를 들고 비켜서 있었다.
“일행 분도 함께 찍으시죠?”
직원이 권유하자 수혁이 대뜸 윤조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내 가이드예요. 김윤조.”
“두 분 다 멋지십니다.”
직원이 연신 버튼을 누른 후에 고맙다고 꾸벅 인사를 했다.
“저쪽으로 가죠.”
이번에도 윤조가 앞장섰다.
헤드셋을 장착하자 귀가 덜 아픈지 강수혁은 주변을 돌아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생 고깃집도 안 가 본 촌놈이 대도시 한가운데 있는 백화점을 봤으니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김윤조, 백화점은 원래 이래? 아니면 여기가 특별한 거야? 군인 마트에 비하면 뭔가 엄청 많은데.”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고급 백화점입니다. 마트와 비교하면 직원들이 화냅니다.”
“여기서 옷을 어떻게 골라? 너무 많잖아. 그리고 가격도 장난 아니야.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열 배는 비싼데.”
딱히 옷을 뒤적여 본 적도 없으면서 가격은 어떻게 봤는지.
“여긴 지하라서 그나마 평범한 브랜드 위주입니다. 위층으로 가면 100배쯤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100배…… 꼰대 카드로 가능해?”
“특작부 총사령관 연봉 및 수당이 얼만 줄 아십니까? 천만 원쯤 써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면 메꿔 놓죠, 뭐.”
이러다가 촌구석 군부대에서 자란 에스퍼를 사람이 많은 데서 놓칠 수 있겠다는 걱정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놓치더라도 별로 걱정하지 않고 알아서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시점에 찾아서 합류할 거다. 하지만 새는 바가지에겐 그다지 믿음이 없다.
윤조는 자연스럽게 강수혁의 팔뚝을 잡았다.
원래는 장선욱의 권유대로 군복밖에 없는 에스퍼에게 정장 한 벌을 사 주려고 했으나, 막상 헤드셋을 끼고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아무리 그림 같은 미남이라도 좀 웃길 것 같았다.
마침 지하 매장에 고급 디자이너 캐쥬얼 브랜드 편집숍이 있었다.
윤조 본인에게 사 입으라면 대부분 군복만 입는데 뭐 하러 이렇게 비싼 걸 사겠냐고 손사래를 쳤을 만한 티셔츠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이미 강수혁을 알아보고 함박웃음을 짓는 직원에게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제품 추천을 부탁했다.
직원이 골라온 옷 중에서 부드러운 니트 티셔츠와 면바지는 그 자리에서 갈아입으라고 내밀었다. 수혁이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다른 옷도 골라서 함께 계산했다. 순식간에 삼백만 원이 훌쩍 나갔다.
다른 옷을 포장하는 동안 옷을 갈아입은 강수혁이 나타났다.
흰색 니트는 딱 맞았다. 어깨와 가슴이 적당히 강조되었고, 또 딱 맞는 면바지 덕분에 탄탄한 허리와 허벅지가 적당하게 드러나서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 처음인지라 신선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모델 같았다. 그것도 최고급 세단에서 막 내리는 젊은 CEO를 강조한 명품 향수 광고나 혹은 해변을 달리는 최고급 스포츠 차에 앉아 여유롭게 휠을 돌리는 명품 시계 광고에 나올 법한 모델이었다.
“이 사이즈 맞아? 들러붙는데.”
니트가 어색한 듯 강수혁이 가슴 부위를 잡아당겼다.
“엄청나게 잘 어울리세요. 모델 같으세요.”
윤조와 똑같이 반쯤 넋이 나갔던 직원이 호들갑을 떨면서 수혁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니트는 원래 약간 붙게 입는 겁니다.”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간 윤조는 멋진 허리 라인을 쓱 만졌다. 옆에서 니트 소매를 정리하던 직원이 당황하더니 어색한 웃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이거 마음에 드네요. 남색 있었죠? 같은 사이즈로 주세요.”
윤조는 직원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너는 안 사?”
“저는 있습니다.”
“있기는. 닳은 티셔츠에 무릎 나온 체육복뿐이던데.”
“남의 집 사찰 금지.”
“우리 같은 집안 식구 아니었어?”
“……어쨌든 저는 됐습니다. 중장님 개인 카드잖아요. 소령님은 몰라도 저는 중장님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따로 사겠습니다.”
그러자 수혁은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친절하게도 직원은 다른 여벌과 막 벗어 놓은 수혁의 옷을 직접 정문 리셉션에 맡겨 두겠다고 했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 다른 매장으로 이동했다. 거기서도 수혁을 위한 물건만 샀다. 평소 맞춰 신을 런닝 운동화와 스니커즈를 샀더니 직원이 이벤트 기간이라며 양말 두 켤레를 고르길 권했다.
“이거 네 양말이랑 비슷한데.”
양말을 보던 수혁이 하나를 콕 찍었다. 발가락과 발꿈치, 그리고 발목에 배색을 댄 제품이었다. 평소 군용 양말과 무채색을 이용하던 윤조는 이런 색을 신은 적은 없다고 하려다가 관뒀다. 수혁이 무슨 양말을 말하는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요즘 네오트로라고 해서 이런 배색 디자인이 유행이에요. 방금 구매하신 스니커즈에 맞춰 신으시면 멋스러워요.”
직원이 양말을 꺼내 디피된 스니커즈에 대보았다.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세종에 온 적은 있으나, 이 백화점은 윤조도 처음이었다. 군에 있는 만큼 주로 온라인 주문을 이용했기에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들른 일도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일이 예전에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직접 신을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양말을 신중하게 골랐던 적이.
“그 양말…… 혹시 제가 산 걸까요?”
“뭐?”
“아닙니다. 이걸로 하죠.”
문득 정신을 차린 윤조가 양말 두 개를 집어서 직원에게 건넸다. 포장하는 사이 수혁이 갑자기 먼 곳을 봤다.
“야, 나 잠시 볼일이 있으니까 이따가 봐.”
“어디 가시게요? 같이 갑시다.”
“혼자 볼 일이 있어. 건물 안에만 있으면 네 위치 알 수 있으니까 건물 밖으로는 가지 말고.”
“몰래 저한테 뭐 달아 놨습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는 거야. 일단 이따가 봐.”
수혁이 어깨를 눌러 윤조를 매장용 의자에 가볍게 주저앉혔다. 그러곤 성큼성큼 매장을 떠났다.
평소라면 반드시 따라나섰을 거다. 하지만 어쩐지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지독하게 지루하고 짜증 나는 감사의 여파가 지금 미친 건지도 몰랐다. 혹은 양말이 가져온 기묘한 기시감 탓일 수도 있다.
5분 뒤 계산과 포장이 다 끝났다. 매장 직원에게 부탁해 똑같이 정문 리셉션에 물건을 맡긴 후 윤조는 느릿느릿 일어섰다.
갑자기 시원한 커피가 간절했다. 마침 가까운 코너에 테이크아웃 코너가 있어 아이스 커피를 받았다. 그러곤 물 흐르듯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딱히 목적지가 없었으므로 되는 대로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한적한 층에 이르렀다.
거대한 돔 형태의 꼭대기 층은 곳곳에 소품 가게를 제외하면 실내 공원과 음식점이 다였다. 빈 벤치를 찾던 중에 이벤트 전시를 알리는 광고 간판을 발견했다.
‘G in Metropolis’라는 제목 아래 ‘슬픔의 기록들’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었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