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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30화 (207/256)

130화

백화점에서 실컷 놀고 나오는데 장선욱이 호출했다. 호텔에 벗어 둔 전투복도 찾을 겸 들렀더니 장선욱은 마침 어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복에 예모 차림인 것으로 봐서는 또 무슨 공식적인 자리인 듯, 비서 장교 또한 완벽한 예장 차림이었다.

“뭘 또 부르고 그래? 아주 인이 박이겠네.”

상대적으로 편안한 군복도 아니고 아예 사복을 입고 슬렁슬렁 들어오는 수혁과 윤조를 향한 장선욱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휴가가 끝난 마당에 흐리멍덩한 자세를 보여서 화가 났다기보다는 뭔가 근원적인 분노가 보였다. 예를 들자면 백수 주제에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방에서 배 긁으면서 나와서 막 끓여 놓은 국을 향해 이거뿐이냐고 반찬 투정을 하는 삼십 대 초반 아들을 보는 부모와 같다고 할까.

“준위 김윤조.”

경례를 붙이고 정자세로 선 윤조와 달리 수혁은 소파에 반쯤 눕듯이 벌러덩 앉았다. 그러곤 윤조를 능력으로 가볍게 들어 제 곁에 앉혔다. 윤조는 눈으로 수혁에게 항의했으나 먹힐 리 만무했다.

“떨어져 앉아.”

장선욱이 턱짓했다.

“싫어. 내 거 내가 안고 있겠다는데 신경 꺼.”

중년 장군의 표정이 오만상으로 찌푸려졌다. 옆에 있던 비서 장교는 눈으로 상황을 빠르게 훑었다.

“신혼부부야, 뭐야?”

하필. 윤조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장선욱은 아무런 생각 없이 꺼냈지만 그 단어야말로 핵심이자, 강수혁이 가장 원하는 화제였다.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우리 결혼할 거야. 며칠 전에 김윤조가 청혼했어. 내 대답은 예스고. 이거 커플 팔찌.”

막 모자를 들던 장선욱이 멍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모든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난 거리에 있는 비서 장교는 재미있어 죽겠는지 이미 입술을 씰룩이고 있었다.

반면에 단둘이 있을 때는 배우자를 위해서 망사 끈 팬티를 입고 스트립쇼도 아무렇지 않게 해 댈 수 있지만, 밖에서는 손을 잡는 것도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윤조로서는 이 화제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신혼여행으로 보름쯤 어딜 가고 싶은데 말이지. 알아보니까 하와이가 그렇게 좋다는데. 괜찮지? 안 들키게 잘 갔다 올게.”

툭.

별 세 개가 박힌 예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래? 신혼여행이라.”

이상하게 침착한 장선욱이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경호팀으로 따라온 헌병 쪽으로 조용히 걸어가 헌병 허리에 달린 홀더에서 권총을 꺼냈다.

딸깍.

총구를 강수혁 쪽으로 겨누는 동시에 안전장치를 풀었다.

“중장님!”

소리친 건 비서 장교고 달려들어 말린 건 졸지에 총을 빼앗긴 헌병 쪽이었다.

“첫발부터 실탄입니다. 참으십시오.”

“놔! 저 새끼, 가만히 안 둬! 이 새끼야! 아까 내가 한 말 똥구멍으로 들었냐? 미국 안 보내려고 이 고생을 하는데 뭐? 하와이에 보내 줘? 이 새끼야! 하와이가 뭐냐, 아주 저세상으로 보내 주마!”

“거참, 왜 그런 위험한 걸 방 안에서 들고 설쳐? 잘못 발사라도 돼 봐, 내 연두부 흠집 나.”

수혁이 시선을 던지는 동시에 권총이 천장으로 휙 날아갔다. 끝까지 내달려 있던 장선욱은 그의 허리를 붙잡은 비서 장교 위로 기어이 떨어지고 말았다.

“중장님!”

난장판이 된 중장과 장교를 헌병들이 달려들어 일으켜 세웠다.

장선욱은 반쯤 혼이 나간 채로 멍하니 천장을 봤고 비서 장교와 헌병들이 그의 바지와 구겨진 제복에 묻은 먼지를 살살 털어 주었다.

“하. 내가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구나.”

“그래서 사람은 일찍 일찍 죽어야…… 아야. 왜 때려?”

개소리를 찍찍 뱉는 입을 향해 윤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다. 주둥이를 얻어맞은 수혁은 윤조를 향해 항의하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신혼부터 각방 쓰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주둥이 다물라는 무언의 경고를 알아먹는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슬그머니 건네는 예모를 패대기친 장선욱은 열이 뻗치는지 입었던 제복 상의를 거칠게 벗어서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마 성질 같았으면 철제 별과 훈장이 덕지덕지 붙은 상의로 망할 개망나니 놈의 뺨을 갈겼을 거다.

총질로도 못 잡는 에스퍼라 다들 정신적 고통이 많았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윤조는 왜 가이드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는지 너무나도 이해가 갔다. 가이드 없이 얄밉게도 삐딱선을 타는 트리플 S급 에스퍼를 누가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그날 아파트 무너뜨릴 뻔한 이유가 이거군. 어쩐지 화해가 빠르다고 했지. 청혼이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네.”

“나도 김윤조가 이렇게 화끈한지 몰랐어. 그 자리에서 배우자가 되자고 하는데 막.”

수혁이 입가를 문지르면서 씩 웃었다. 윤조는 이 자리에서 조용히 숨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장선욱은 잠시 먼 산을 보면서 숨을 돌렸다. 무거운 침묵이 호텔 방을 얼어붙게 만드는데 철없는 에스퍼만 뭔가 좋은지 옆에 낀 가이드를 보며 싱글벙글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중장님. 시간이……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말 안 듣는 문제아 수용소 소장으로서 늘 인내심에 극한의 도전을 받는 장선욱은 이번에도 자랑스러운 쓰리스타답게 이행해야 할 의무 앞에서 이성을 되찾았다.

“그런데 불러 놓고 어디가?”

“미군 사령관 만나러.”

건네는 예모를 툭툭 털어 옆구리에 낀 장선욱은 가슴을 부풀려 심호흡을 했다.

“하와이, 정말 갈 거야?”

“보내 주면 가지.”

“좋아.”

당황한 사람은 오히려 윤조였다.

“중장님?”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미리 언질하려고 불렀는데 말이야. 제 발로 먼저 간다니 뭐. 사태의 원인은 김 준위니까 알아서 해.”

“예, 제가 말입니까?”

“그래. 김 준위가 청혼해서 저 새끼가 날뛰는 거 아냐. 신혼여행지로 딱이긴 하네.”

윤조는 제 허리에 감긴 팔을 거칠게 떨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새는 바가지를 어디까지 데리고 가라고? 당황한 채로 중장을 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항의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선 윤조는 비서 장교에게 간절한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비서 장교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밀인데, 노리스 제독의 송환에 관한 협의가 마무리 단계에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최초의 가이드 제독이라서. 이번 사태로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져서 말입니다.”

“망할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먼저 선빵 쳐 놓고는 코뼈 부러졌다고 보상금 내놓으라잖아. 그런데 그 망할 놈들이 하필이면 동네 유지인 거지. 우린 그냥 평범한 중산층이고. 우리 식구끼리만 독야청청 독고다이 할 거 아니면 적당히 마무리하는 게 맞긴 하고. 게다가 이 좁은 땅덩이 안에 또 매국노가 있어요, 망할 놈의 매국노가.”

장선욱이 혀를 찼다. 비서 장교가 설명을 이었다.

국감에서 강수혁이 힘을 쓴 일로 의원들이 전부 겁을 먹었다고 했다. 여당은 그나마 수습 중인데 야당은 아주 벌집을 들쑤신 듯 난리였었다. 국가에 대한 항명이라나. 공개적으로는 강 소령 무서워서 찍 소리도 못 내면서 물밑에서는 그를 내보내려고 당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강수혁을 어떤 식으로든 해외 파견을 보내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국방부만은 그랬다가 강수혁이 아예 손을 떠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 중이었다. 강수혁이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는 순간 잡을 수단이 없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나왔다.

비서 장교이 요약 설명을 하는 내내 묵묵히 사색에 잠겼던 장선욱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김 준위,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나!”

“네, 그렇습니다!”

느닷없는 선창에 윤조는 뒤꿈치를 척 붙이면서 차렷 자세를 했다.

“경례!”

“충성!”

군기가 바짝 든 윤조는 거수를 눈썹 언저리에 척 붙였다. 딱히 주변에 국기가 있지도 않았지만 특수부대 하사관 출신 직업 군인에게 척수 반사나 다름없었다. 비서 장교와 헌병들 또한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국기를 향해 거수했다.

“차렷.”

똑같이 어딘가에 걸려 있기는 할 국기를 향해 거수했던 장선욱이 절도있게 손을 내렸다.

“구청부터 다녀오는 게 낫겠지?”

늠름한 쓰리스타였다가 갑자기 동네 아저씨가 된 장선욱이 비서 장교를 향해 물었다.

“네.”

“저놈들만 보냈다가 또 무슨 소동 벌어질라. 하나 딸려 보내.”

“알겠습니다.”

비서 장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다른 행정 장교가 방으로 들어왔다.

“구청은 왜 말씀입니까?”

“혼인신고 해야죠. 그래야 신혼여행 갈 거 아닙니까.”

“예……에엣?”

비서 장교의 대답에 윤조가 화들짝 기겁했다.

“저 새끼가 워낙 국회를 뒤집어 놔서 말이야. 저 새끼가 뭘 하든 우린 앞으로 우리는 김 준위만 믿고 간다. 김 준위가 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상 저 새끼는 무조건 이쪽에 발을 담그게 되는 거니까. 김 준위, 자네에게 국방력 70퍼센트가 달려 있음을 기억해. 잘 때도, 먹을 때도, 쌀 때도 말이야.”

“그게 무슨.”

“자네가 금세기 논개일세. 저 개망나니를 잘 붙들어서 구워삶아 봐. 하와이 가기 전에 페어링도 다시 하고. 파이팅!”

장선욱은 윤조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린 다음 늦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비서 장교는 늘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을 챙긴 다음 눈인사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경호를 맡은 헌병들도 동시에 우르르 나간 후 방에 남은 건 허락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 개망나니와 졸지에 금세기 논개가 되어 버린 윤조, 그리고 끼어들 짬이 되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젊은 행정 장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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