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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32화 (209/256)

132화

정식으로 파견 명령서가 떨어지기 전까지 윤조는 구청에 들렀다가 쪽팔림에 반건조 오징어가 된 상태로 개망나니 새신랑에 의해 특작부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아직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곱게 키웠더니 어디서 개망나니 같은 놈을 데려왔냐’고 열받은 창조주에게 다이아몬드 세트를 제물로 바치면서 머리를 바닥에 거듭 박은 후에야 조건부 용서를 받고 페어링을 복구했다.

그러면서 가이드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업데이트도 실행되었다. 양키 놈들에게 당한 울분이 특작부에서도 흉흉한 명성을 떨치는 박사의 아주 작고 소중한 배알을 마구 뒤틀어 놓은 탓이었다.

프로토타입인 만큼 안정적인 운용을 우선 했던 가이드 시스템에 완전 전투 모드가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알려진 모든 에스퍼 전투 자료를 모조리 넣었고 또 국내 최대이자 최강의 연산력을 자랑하는 정부 중앙 관리 시스템 ‘한누리’에 의뢰하여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을 풀악셀로 돌려서 도출한 최적의 전투 프로그램을 모조리 마운트했다.

더불어 최근 강수혁의 혈액을 통해 신체 자체의 성능까지 크게 향상되었다. 파견 직전 에스퍼 표준 테스트를 진행했고 거기서 B+라는 놀라운 결과를 달성했다. 근력과 속력, 회복 속도를 포함한 내구력에 AI의 전투 보조까지 합쳐 종합적으로 따질 때 B급 에스퍼에 해당한단 얘기였다. 그래 봤자 탈인간인 강수혁은 변함없이 연두부 취급이었지만.

전투 모드에선 아음속으로 날아가는 물기둥이 상대를 향해 쇄도하는 모습이 꼭 3D 슬로모션 같았다.

충돌 직전 회피하는 두 염력 에스퍼와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방어막을 전개하는 에스퍼의 모습도, 심지어 산개하는 물방울에 충격에 울렁이는 갑판도 기이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에스퍼들에겐 이렇게 보이는 건가.’

그들이 0.25배속으로 움직인다면 윤조 자신은 0.2배속 정도 되었다. 다소 늦긴 해도 상대가 헬멧 스크린의 광각 범위 밖으로 나기 전에 AI가 그들의 위치를 인식하고 빨간 삼각형 표시를 띄웠다.

쿠구구구구궁 쿠구구구 쿠우우우웅

전투 모드가 아닐 때는 동시에 느껴졌을 충격이 명확하게 분리된 채 이어졌다.

물기둥의 파괴력은 어설픈 미사일을 능가했다. 항모 갑판이 움푹 파이면서 거대한 진동이 전 함선을 뒤흔들었다. 상대 에스퍼들은 아음속으로 날아든 해수 미사일을 각자 다른 방향으로 회피했다.

-전방 좌측 상단, 우측 상단 및 하단 후방을 유의하십시오.

더불어 페어링 자체도 대단히 강력해졌다. 통신 두절이 치명적임을 뼈저리게 실감한 강수혁이 따로 심 박사를 닦달했다.

그 때문에 반쯤 누그러진 창조주가 다시 빡치는 바람에 이번엔 명품 가방 안에 강수혁 카드를 다운한 단말기를 넣어서 바쳐야 했다. 아파트 한 채 값을 날린 후에야 심 박사는 다소 열받은 모습으로 강수혁의 척추 장치를 개조하여 강력한 송수신 기능을 추가했다. 척추가 안테나, 소뇌가 수신기였다. 덕분에 강수혁은 특정 범위 아래에서 헬멧 없이도 윤조의 통신을 바로 들을 수 있었다. 위성을 연계하면 이론적으로 지구 어디에 있든 통신이 가능하다는데 아직 시험을 해 보진 않았다.

“알아.”

세상 모든 것이 한없이 느린 중에도 강수혁만은 예외였다. 일반 속도도 아니었다. 달리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걷는데도 2배속은 되었다. 물방울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수혁에게서 멀어졌다. 물방울이 워낙 빽빽하게 깔려 있기에 강수혁 주변에서 시작된 밀림 현상을 곧장 더 바깥쪽 물방울에 영향을 미쳤다. 한번 시작된 연쇄 반응은 급기야 거대한 물방울 사태를 빚어냈다.

퍼엉. 퍼어엉. 펑.

물방울이 닿는 곳마다 충격이 이어졌다. 전투 모드인 AI가 충격을 빠르게 연산했는데, 작은 물방울은 소형 권총, 큰 물방울은 기관총탄에 버금간다는 결론을 가져왔다.

크어어억. 어어. 억.

회피하던 에스퍼 두 명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해수 탄막을 다 막아 내지 못하고 결국 수 개를 맞고 말았다. 반대로 뚝심 있게 방어막으로 버틴 쪽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허. 제법 튼튼한가 보네. 그럼 이것도 막아 봐.”

수혁은 작정하고 오이 크기의 물 총알을 다량으로 만들어 방어막을 향해 쐈다. 속도도 방금 전 날린 미사일보다 월등히 빨랐다. 게다가 방어막을 두루두루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일점사했다. 비교적 얇은 외부가 아니라 가장 두꺼울 것이라 여겨지는 중심부를 노리는 점이 강수혁다웠다.

투투투투투퉁 퍽!

물 총알 세례를 견디지 못한 방어막이 기어이 뚫렸다.

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가슴에 세 발을 정통으로 맞은 상대의 비명이 늘어지면서 도플러 효과의 선명한 예시를 시연했다. 그건 방어막도 없이 맨몸으로 물 총알을 맞아야 했던 다른 에스퍼도 마찬가지였다.

파릿!

셋이 나가떨어지는 동시에 약한 전류가 느껴졌다. 초반에 전류가 흐르는 그물을 던진 놈이었다.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기 사용자입니다.

“알아.”

사방에 전해질을 품은 해수라 전기 사용자에게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트리플 S급쯤 되면 환경의 유불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참 느린 배속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홀로 빨리 감기가 가능한 막강한 에스퍼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전기가 제 곁에 도달하기 전에 주변의 물을 모조리 낚아채 긴 채찍을 만들었다.

전기를 품은 해수 채찍은 꼭 수룡처럼 공중에서 꿈틀거렸다. 그 속에는 이미 기절한 에스퍼의 젓가락도 가득했다.

-좌표 보냅니다.

전류 패턴을 분석하여 발원지를 찾아낸 윤조는 수혁에게 바로 전달했다. 수신 즉시 수혁은 해수 채찍을 휘둘렀고 젓가락에 전기까지 잔뜩 먹은 수룡은 반파된 함포 뒤에 숨어 있던 전기 사용자를 강타했다.

으으으으으.

젓가락을 사방에 꽂은 전기 사용자는 게거품을 물면서 몇 걸음 걸어 나오다가 픽 쓰러졌다. 뻣뻣하게 굳은 사지가 꼭 감전 사고를 당한 사람 같았다.

“전기 쓰는 놈도 감전이 되나?”

-그러게요.

둘 다 신기한 모습에 감탄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대(對) 에스퍼용 레이저 건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러면서 윤조의 헬멧에는 이쪽을 겨냥하고 있는 각종 중화기 위치가 빠르게 잡혔다. 전부 풀차지 된 상태였다.

“뭐야, 귀찮게.”

수혁이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솔직히 윤조도 슬슬 귀찮긴 마찬가지였다.

-항모 자체를 흔들어 놔야 정신 차릴 모양인데요.

“하여간 주제를 모르는 놈이 너무 많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혁의 전신에서 은은한 오로라가 발산되었다. 지금까지 딱히 능력을 전개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평상시 운용하는 힘만으로 에스퍼를 상대한 것이었다.

강력한 출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전신으로 발산되는 오팔색 오로라를 본 트럼프 부대원들이 동요하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이쪽을 향한 총구를 겨눈 자세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실전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침착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판 전체가 흔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처럼 다리 쪽에 묵직한 힘이 실렸다. 인근 바다가 출렁이면서 거대한 파도가 쳤다. 공중 부양 중인 수혁과 윤조와 달리 상대 측에는 제대로 서 있는 놈이 없었다. 개중 몇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욕을 뱉기 시작했다.

항모 자체가 공중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항모를 호위하는 구축함을 비롯한 함대 소속 모든 배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것들을 해상에서 공중으로 끌어 올렸다.

사방에서 거친 욕이 터졌다. 영어 원어로는 싸구려 욕이었지만 군용 통역기가 부적절하게 순화하여 전달했다.

-신성 모독. 이게 뭐야?

-악마의 현신. 난 그만두겠어.

-멍청이 같은 괴물 둥지에 드디어 주인이 생겼군.

영화 같은 대사와 함께 총구가 일제히 내려갔다. 동시에 빈손이 공중에 떠올랐다. 항복 선언이었다.

“안 떨어지게 잘 붙잡아.”

경고한 수혁이 그대로 힘을 거두었다. 상공을 부유하던 함대가 일제히 자유 낙하했다.

거대한 물보라가 휘몰아쳤다. 비교적 작은 구축함은 당연하고 웬만한 고층 빌딩을 능가하는 항모 갑판에까지 해일 같은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쳐 병사와 각종 파편을 모조리 쓸어갔다. 대부분 에스퍼라 파도에 휩쓸렸다고 죽진 않을 것이다. 죽어도 할 수 없고.

이런 상황에 아주 익숙한지 흰색 마크를 단 메딕이 우르르 나와 넉 다운된 에스퍼를 안으로 이송했다. 다른 전투 병력 중 염력 등급이 제법 높은 자들은 파도에 휩쓸려 간 동료를 차례로 구조했다. 그러면서 공사판 인부와 별반 차이가 없는 자유분방한 복장을 자랑하는 공병이 우르르 나오더니 엉망이 된 갑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맡은 소임을 다할 때, 수혁과 윤조는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작업에만 몰두하는 공병을 쭉 둘러본 수혁은 윤조를 돌아봤다.

“이게 끝이야?”

-그런가 본데요.

“다짜고짜 미사일을 날리고 덤비더니. 진짜 골 때리는 놈들이네.”

헛바람을 뱉은 수혁은 윤조를 끌어안고 곧장 몸을 띄웠다. 목표는 아까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함교였다.

전방 유리에 각종 코팅을 한 덕분에 안은 보이지 않고 거울처럼 이쪽만 보였다. 수혁은 이마에 손을 대고 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약간 바보 같아서 말렸다.

-그냥 뚫어요.

“그래도 돼?”

허락을 구하는 수혁을 향해 윤조는 엉망진창인 갑판을 눈짓했다. 이미 막대한 손해를 끼쳤는데 유리창 하나 더 깨부순다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솔직히 자유낙하로 해상에 처박은 덕분에 항모 내부도 내상을 입은 중상자처럼 장난이 아닐 거다.

“그럼.”

수혁이 주먹을 치켜들고 전방 유리를 향해 내지르려는 찰나였다.

-그만두게. 함교 스크린을 최신형으로 교체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말이야.

어디선가 묵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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