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스크린이 역전 투사가 되면서 뭔가가 화면 가득 떴다.
-함교로 오게.
깍두기 맛집으로 소문난 국밥집에서 경쟁 업체의 사주를 받아 비법 훔치다가 걸린 주방 보조를 몰래 쓱싹 하고 담가 버릴 때 사용할 법한 낡은 김치 고무통과 같은 색깔을 가진 입술이 움직였다.
초거대 전방 스크린이다 보니 사람 둘은 거뜬하게 들어갈 초대형 고무통이 꼭 백반 그릇처럼 보였다. 심지어 화질까지 좋아서 공감각으로 입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윽! 더럽게 어디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세심하고 비위가 약한 개망나니가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쿵.
냅다 꽂힌 주먹 가장자리로 거대한 거미줄이 그어져야 하는데 어쩐지 화면은 멀쩡했다.
-그러니까 교체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대(對) 에스퍼 스크린일세. 강화 방탄유리. 자네가 다칠 테니 그만하고 들어오게.
목소리는 아주 거만한 태도로 말렸다.
“아, 그래?”
꽉 쥔 주먹 위로 오팔색 이채가 집중되었다. 꼭 고급 휘발유로 피운 횃불 같았다.
쾅! 파지직!
강화 방탄유리가 단숨에 뚫렸다.
-허.
목소리가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주먹을 빼자 스크린 전체에 스파크가 튀더니 곧 나가 버렸다. 뒤이어 수혁은 딱 세 번 더 주먹을 내질렀다. 대(對) 에스퍼용 강화 방탄유리 어쩌고가 얇은 은박지처럼 잘도 우그러지다가 종내에는 찢어졌다.
“별것도 아닌 게 무슨 강화 운운하고 지랄이야.”
-전투복에 걸리지 않게 입구는 크게 내주십시오. 저는 아직 단벌 전투복 신세니까요.
윤조의 부추김에 수혁은 스크린에 동굴 구멍을 뚫어 버렸다.
함교는 여느 항모의 함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각종 컨트롤 패널이 즐비한 가운데 휠 형태의 조타가 있었다.
다른 점은 패널을 담당하는 놈들의 행색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이었다. 무지개 모히칸 머리를 한 미친놈이 있는가 하면, 얼굴 전반을 문신으로 뒤덮은 놈도 있었다. 뚫을 수 있는 피부란 피부는 다 뚫어 놓은 정신 이상 추정자 옆엔 의외로 멀쩡한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군인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목부터 시작해 오른쪽 반신이 모조리 금속이었다.
“…….”
막 구멍을 넘던 수혁은 저 미친 면면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제 파트너와 다를 바 없는 윤조 옆으로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훅 몰아쳤다.
탕! 탕탕!
그때, 다짜고짜 총알이 날아왔다.
완전히 활성화된 수혁은 총알이 발사되는 즉시 잡아냈고 날아온 궤적을 따라 되돌려 주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놈도 있을 법한데 조용했다. 수혁이 되돌린 총알은 공중에 멈춰 있었다.
“어쭈?”
-전부 염력 사용자입니다. A급 이상으로 추정합니다. S급일 수도 있습니다.
윤조는 함교 장교들을 스캔했다. 전부 신원 미상이었다.
미12함대는 꼴통 부대인 만큼 극단적인 작전에 자주 동원되었고, 그 말은 그들의 신상은 전부 특수 기밀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국군 특작부 내 에스퍼도 마찬가지여서 이상할 건 없다. 단지 저들은 이쪽을 알고 있는데 이쪽은 저들을 전혀 모르는 정보의 차이가 짜증을 유발했다.
특작부 소속 중에서도 극소수 외에는 ‘때려도 되는 에스퍼, 때리면 안 되는 일반인’으로만 생각하는 수혁에게는 딱히 상관이 없을지라도, 그를 보조하는 가이드인 윤조 입장에서는 이 정보 불균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새끼들 신상이 왜 알고 싶은데?”
파트너의 불편함을 감지한 수혁이 물었다.
-불량한 태도에 관한 가정 통신문을 보내려고요.
“아, 그럼 알아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염력 충돌로 멈춰 있던 총알이 느릿느릿 전진했다. 피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놈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다급해지는 눈빛으로 봐서는 다들 총알이 제 미간으로 직진 중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 건?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거였다.
놈들의 미간에 닿은 총알은 멈췄던 고속 회전까지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피부를 뚫는 동안 피가 흐르기보다는 불판 냄새가 났다. 얇은 이마 피부가 총탄의 고속 회전을 이기지 못하고 타는 중이었다.
눈을 뜬 채로 총알이 본인의 두개골을 조금씩 갈아내고 있는 상황을 직접 겪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총알 열 발을 맞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뇌는 건드리지 마세요.
함대 전체가 운행 불능이 되면 다른 함대로 재배치될 거고 아마도, 높은 확률로 이 요란 법석을 또 떨어야 했다.
“딱 마빡만 뚫을게.”
-그렇게 저속으로 뚫다가 수박처럼 갈라질 것 같은데요
“알 바인가? 뇌도 아니고 뚝배기 좀 쪼갠다고 당장 뒈질 거면 에스퍼 때려치우라고 해.”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사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트리플 S급 망나니에게 다짜고짜 시비를 건 잘못도 있지 않은가. 윤조는 말릴 명분을 찾지 못했다.
으으으.
무시무시한 외견을 자랑하는 함교 에스퍼 중에서 제일 먼저 거품을 문 건 얼굴에 문신한 놈이었다. 그는 고통과 공포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무지개 모히칸은 이미 반쯤 넋이 나갔고, 사이보그는 불쾌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이보그라 신경을 차단한 모양이었다.
가관은 얼굴에 온갖 구멍을 다 내놓은 놈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이 웃고 있었다. 심각한 마조히스트 같았다. 솔직히 징그럽고 섬뜩했다.
“김윤조, 저 걸레짝 새끼는 죽이면 안 될까? 훈련 중 컨트롤 미스 사고라고 치고.”
-…….
수혁이 귓가에 속삭였다. 어쩐지 윤조는 안 된다는 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만! 그만두십시오!
누군가 다급하게 외쳤다. 페어링을 통한 동조 통신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뇌 속에 직접 내리꽂혔다. 텔레파시였다. 하지만 수혁에게 붙잡힌 에스퍼 중에는 텔레패서가 없었다.
“밖이야.”
수혁의 턱짓에 시선을 함교 입구 쪽으로 돌렸다.
한 박자 늦게 함교 입구가 열렸다. 육중한 문이 열리자 전투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처음부터 항복 자세로 손바닥이 보이게 두 손을 위로 들고 있었다.
“너는?”
의외로 수혁이 알은체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캐나다 해군 소속 중위 에이브리입니다.
말과 달리 에이브리는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대단히 긴장한 채로 수혁을 향해 읍소를 시작했다.
-이만하면 다들 알아들었을 겁니다. 그만 힘을 거두시죠.
“너, 한국말이 많이 늘었다?”
-한국어 통역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했습니다.
“어쩐지. 말 건 놈부터 시시껄렁하더라니.”
수혁은 코웃음을 쳤다.
두개골을 파고들던 총알의 움직임이 멎었다. 더불어 놈들을 구속했던 능력도 풀렸다. 애초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던 사이보그와 통증을 즐기던 정신 이상자 외에는 전부 자리에 쓰러졌다.
-감사합니다, 강수혁 소령님. 메딕!
에이브리의 신호에 무슨 방사능 폐기물을 다루듯이 전신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의무병이 들어와 쓰러진 놈들의 양 발목을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질질 끌어냈다.
수혁이 알아서 공격을 멈추었다. 최근 사회적 눈치가 일취월장하고 있어서 윤조가 말릴 것 같으면 알아서 멈추는 편이긴 했다. 함교 장교의 두개골을 다 갈라 놓으면 뒷수습이 귀찮아진다. 그래서 말릴 타이밍이긴 했는데.
-…….
윤조는 기분이 묘했다.
캐나다 해군 소속에 이미 안면이 있는 걸로 미루어 보아, 윤조가 신세를 졌던 그 항모에서 만난 사이인 모양이었다. 위성 AI를 통해 F형 사건 관련 보고서와 제 복구 기록을 뒤져 에이브리 중위와 교차 체크했다. 캐나다 소속 A급 텔레패서로 당시 폭주하던 수혁을 맞이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장세인 대위에 비해서는 한참 능력이 떨어지는 그렇고 그런 흔한 텔레패서다.
의무병이 다른 사람들은 다 끌어내자 상대적으로 멀쩡한 사이보그만 남았다.
사이보그는 조용히 눈치를 보았고, 미친 마조히스트 새끼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히히 웃고 있었다. 이맛살이 완전히 찢어지고 문드러져 허연 두개골이 드러났는데도 놈은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이내 가랑이를 조금 지렸다. 이젠 더럽다 못해 오싹했다.
“네가 여기 함장인가? 앞으로 주제를 모르고 덤비는 일이 없도록 부하들 단속 잘해. 그리고 함장용 큰 선실 내놔. 인접한 모든 선실은 비우고 안에는 방음 충전재 채워. 아니면 이 배 자체를 비우든가.”
수혁이 사이보그를 향해 협박성 요구를 날렸다. 사이보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고막 회로가 탔어? 귓밥도 시원하게 파 줄까?”
수혁의 주먹이 다시 오로라 횃불로 변했다.
-그 사람은 함장이 아닙니다.
에이브리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후방 지원을 우선하는 텔레패서치고는 대단히 용감했다.
-조커 대령은 항모 운전을 담당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항모 트럼프의 시스템 AI입니다. 파괴하면 항모 전체가 멈추니 참아 주십시오.
“그럼 네가 함장이야?”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캐나다 해군 중위고, 이건 미 해군 소속 항모입니다.
“하여간 양키 새끼들은 끼리끼리 몰려다닌다니까.”
-트럼프 함대는 외인부대이기도 합니다. 강수혁 소령님도 이제 여기 소속이 아닙니까.
“누가 여기 소속이래? 미쳤어?”
“그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흐름을 윤조가 끊었다.
“그럼 함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요.
에이브리가 가리킨 곳에는 아직도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히히 대고 있는 미치광이가 있었다.
“……환장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