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하와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미국 영공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환영 메시지가 날아왔다. 역시 미국 해군 대표로서 환영한다 어쩌고 하더니 이내 좆같은 트럼프 함대 박살 내 줘서 고맙다는 사감 가득한 인사가 이어졌다. 막상 미군끼리도 집안싸움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걸레짝 얼굴을 가진 함장을 봐서도 집안에서도 내치고 싶어 하는 미치광이 집단 같긴 했다.
-트럼프 함대는 스트레스 발산을 위한 놀이입니다. 본격적인 서비스는 호놀룰루 특급 호텔에서 시작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황금 같은 호스트 기회를 다시 놓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는지, 미 해군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와이 해변에 붉은 유도선을 띄웠다.
“어쩔까?”
“가죠, 뭐.”
수혁의 물음에 윤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항모를 하나 박살을 내 놨는데 더 막 나가기는 좀 그랬다. 이미 되돌릴 길이 없는 강수혁의 이미지나, 그 강수혁의 뒤를 바싹 쫓으며 몰락해 가고 있는 특작부 체면을 따졌기보다는 가이드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될 것을 우려했다. 가이드로서의 제 가치를 떨어뜨릴 순 없다.
유도등을 통해 착륙한 곳은 군대 소유 해변이었다. 환영 인사를 받았지만, 혹시 또 달려드는 개새끼가 있을지도 몰라 경계했다. 하지만 막상 마중을 나온 것은, 에스퍼도 아닌 일반인이었다. 거기다가 가벼운 개인 화기만 휴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풍채를 자랑하는 미군이라도 에스퍼를 상대로는 비무장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하와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원주민 환영단이 등장했다. 흥겨운 북소리에 맞춰 훌라춤을 추면서 다가온 그들은 윤조와 수혁의 목에 색이 진하고 꽃잎이 큰 남국의 꽃으로 엮은 목걸이를 걸고 어깨에는 화려한 무늬의 하와이언 셔츠를 걸쳐 주었다. 윤조는 쪽팔려서 슬그머니 끌어내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원주민의 환영식이 끝나자 어디선가 나타난 군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선베드를 깔고 파라솔을 설치했다. 직후 한쪽 팔엔 하얀 수건을 걸친 병사가 나타나서 작은 우산과 레몬 조각으로 장식한 파란색 칵테일이 두 잔 올려진 쟁반을 내밀었다.
윤조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수혁은 아니었다. 그는 전투복 위에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는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이런 서비스는 공짜가 아니라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냉큼 선베드에 누워 윤조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파트너가 너무 바보처럼 좋아해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상병은 되어 보이는 미군이 건치를 한껏 드러내며 웃었다. 무슨 호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걸 준비하셨습니까?”
-우리 하와이 주둔 부대는 트럼프 함대와 다릅니다. 폭력보다는 교섭과 화해를 우선합니다.
씨알도 안 먹히는 거짓말이지만, 숨은 진의는 대충 알아들었다. 일전에 F형 게이트 사건 때 북미 양국 전단을 박살 내 놓은 걸 보고서도 행여나 미치광이 함대면 어떻게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강경한 의견이 있었을 거다. 그 때문에 트럼프 함대를 우선 내보냈고, 깨지는 광경을 보자마자 즉각 플랜B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뒤늦게 사령관이 나타났다. 수혁은 칵테일에 정신이 팔려 그를 무시했지만, 윤조는 그래도 일어서서 악수했다.
-앞으로 자네들을 지휘할 사령관 중장 퀘이커일세. 그 멍청한 함대의 어처구니없는 짓을 말리지 못해 미안하네.
“안녕하십니까, 퀘이커 중장님. 괜찮습니다. 저희는 피해가 없으니까요.”
피해가 없다는 말에 사령관은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앞으로 2년간, 하와이에서 잘 지내보세. 이건 내가 쏘는 환영 인사야. 작전 명령과 훈련 일정만 잘 소화한다면 그 외의 개인 활동은 자유롭게 해도 좋네. 물론 민간인은 건드리면 안 되네. 그러면 여러모로 골치 아프거든.
“민간인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제 에스퍼도 잘 압니다.”
-가이드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숙소로는 부대 내 장성급 주택을 마련해 두었네. 앞으로 72시간은 자유일세. 천천히 즐기고 첫 훈련에서 보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용건을 끝낸 사령관은 수혁을 슬쩍 봤다. 뇌파로 눈치를 주자 그제야 수혁이 사령관을 보더니 흘끔 보았으나, 바로 흥미를 잃었다.
“일반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그렇군. 에스퍼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사령관은 금방 퇴장했다. 하지만 다른 미군은 거리를 두었을 뿐, 계속 해변을 지켰다.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데 2년 내내 여기 있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수혁의 질문에 윤조는 어깨를 으쓱했다.
강수혁이 특작부 밖으로 나온 이상 뭐가 어찌 되었든 호스트 국에 잠재적인 손해가 있을 거다. 기왕 손해를 끼칠 거면 망해도 삼대三代 아니 오대五代는 갈 것 같은 대감집 세간살이를 박살 내는 편이 차라리 낫다. 이미 항모 하나를 해먹었기도 하고.
해변에서 태양을 즐기면서 칵테일을 실컷 마셨다. 오후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대기하던 미군 하나가 다가와 시내 관광을 권했다. 사양할 이유가 없어 수락했다.
세종 시내 백화점에서 그랬듯이, 수혁은 쇼핑을 아주 제대로 즐겼다. 쇼핑몰을 나설 때는 하와이언 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선글라스에 샌들을 차림이었다. 윤조도 비슷했다. 미군이 추천하는 레스토랑에서 각종 해산물 요리와 스테이크를 흡입한 후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식후 산책은 미군을 떼어 놓고 둘이 가기로 했다. 미군은 목적한 행선지를 듣더니 곧장 동의했다.
윤조를 옆구리에 낀 수혁이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하와이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맑은 하늘 위로 솟아 있는 거대한 화산은, 숲이 울창한 산등성이와 달리 봉우리가 흙이 드러난 채였다. 왕년에 천문대의 성지였던 곳답게, 드러난 봉우리 여기저기 공 모양 건물이 여럿 보였다. 여기 천문대들은 백 년도 훨씬 전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최근에 지은 것이라고 해 봐야 80년 전으로, 오랫동안 방치된 채로 벽에 금이 가고 망가져 있었다. 해마다 불어오는 소금기 가득한 폭풍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한 것도 많았다.
“여기가 거긴가?”
“네.”
수혁도 아는 눈치였다.
단지 출현하는 것만으로도 천문대에 근무하던 우수한 재원을 모조리 죽이고, 값비싼 최첨단 광학 장치를 모조리 망가뜨려, 천문학에 큰 타격을 주었던 최초의 게이트. 마우나케아 게이트는 세계사에 한 장을 차지하는 유명한 사건으로, 관련 교육용 교재에 필수로 들어가는 항목이었다. 에스퍼로서 엘리트 군사 교육을 받은 수혁도 자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방사능이 있나 본데? 공기가 찌릿찌릿해.”
“반감기가 아직 안 끝났거든요. 당시엔 제염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콘크리트 차폐나 지역 폐쇄가 유일한 대책이고 또 여긴 해발 4천 미터 상공이라 땅을 버리는 쪽이 효율적이었을 겁니다.”
“그래? 아무튼 조용해서 좋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본 수혁은 이내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윤조는 제 AI 위성이 제대로 위치를 조정하도록 신호를 보내느라 잠시 서 있었다.
해가 서쪽 해수면까지 닿았다. 주홍색 빛이 하늘을 물들였다. 반대편에는 보라색을 머금은 밤기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별이 왜 보고 싶었어?”
“평소엔 광공해로 잘 볼 수가 없으니까요. 하와이 간다고 할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천문대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원래 여긴 별 관측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게이트 발생하기 전에요.”
“흐음.”
수혁은 별에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별은 관심 없으십니까?”
“아니 예쁘긴 한데 여기서 굳이? 싶긴 하지. 별을 제대로 보려면 그냥 위성 궤도까지 올라가면 되는데.”
“위성 궤도까지요?”
“응.”
“로켓 타고요?”
“아니. 날아서.”
위성과 교신을 마친 윤조는 조용히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어느새 벌러덩 누운 수혁은 두 손을 모아 제 뒷머리를 받쳤다.
“맨몸으로?”
“전투복 차림이면 가능. 우주 방사능은 제법 따갑거든. 일반 옷은 안 돼.”
“……그렇군요.”
묵묵히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았다.
“그런데 위성 궤도까진 왜 날아갔습니까?”
“그야 위성 부수러.”
“누구네 위성이요?”
“노코멘트.”
돌아오는 답에서 불길한 기운을 읽었다.
“설마 특작부 소유 군사 위성은 아니겠죠?”
“알면서 왜 물어?”
“왜 부쉈는데요?”
“귀찮게 자꾸 신호를 삑삑 보내잖아. 낚아채서 고물로 만들었지. 파편은 특작부 본부로 특급 배송. 기밀 새면 곤란하니까.”
“아, 예.”
트리플 S급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스레 와닿았다. 어느 미친 에스퍼가 위치 추적이 귀찮다고 위성 궤도까지 비행하여 위성을 직접 때려 부순단 말인가. 보통은 미사일을 날려서 박살 내거나 혹은 위성 관리자를 습격하여 프로그램을 뜯어고친다. 물론 그것도 당연히 해선 안 될 일이고, 또 에스퍼라고 한들 특수 기밀 시설일 위성 센터를 습격할 깜냥이 다 있는 건 아니었다.
“우주 방사능이 그렇게 셉니까?”
“좀? M형 게이트랑 비슷한 정도일걸. 전투복은 견디고 일반 군복은 못 견뎌. 전투복이라도 재생력 약한 놈도 곤란하지. 혹시 위성 궤도로 올라갈 생각이면 꿈 깨라. 두부 데리고는 못 간다.”
“그렇군요.”
다른 눈치는 바가지면서 이런 눈치는 또 있다. 수혁이 단칼에 자른 바람에 윤조는 조용히 입맛만 다셨다.
석양이 지는 아름다운 바다를 묵묵히 보고 있노라니 가족 생각이 문득 났다.
괴롭고 슬프다기보다는 아련했고, 죽기 전에 이런 곳에 함께 여행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우선이었다. 한편으로 말도 안 되는 시작과 과정을 통해 얻은 새로운 가족과 함께 있으니 푸근함도 제법 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응?”
“아까 그 캐나다 중위와 엄청 친하시던데요?”
잔잔한 분위기에 한껏 느슨해졌던 거구가 급격하게 굳었다. 머리를 받치느라 굽은 팔꿈치가 은은하게 흔들렸다. 페어링을 통해 감정 패턴이 쏟아졌다.
-불안, 초조, 두려움.
“친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벌떡 일어선 수혁이 도리질을 쳤다.
“제가 공격해도 좋다고 말하는데 자꾸 비키라고만 하고 말입니다. 에스퍼한테 가차 없는 분이 그래서 좀 놀랐습니다.”
“아니, 에스퍼라도 걘 머리 쓰는 애라서 몸은…….”
“걔……라고요. 아하. 혹시 이상형이 캐나다 출신 여군?”
높낮이를 생략한 어조에 에스퍼의 낯이 사색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