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다른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보다 윤조는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다소 안도했다.
-프로토타입 문제가 아닌가 봅니다?
되묻는 목소리가 명랑했다.
“당연하지! 내 작품에 이상이 있을 리가 없잖아! 외부적 문제인 거지.”
덩달아 자신감이 올라간 심 박사의 음성도 커졌다. 그는 아주 경쾌하게 패널을 두드려 연구 메모장을 켜곤 새로운 지식을 손가락으로 휘갈겨 넣었다.
“그래서 제독, 가이드와 환청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그건 이제부터 심, 자네가 알아봐야지.
“네?”
노리스는 심 박사에게 씩 웃어 보였다.
-이건 베타클럽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라네. 그저 가이드의 교감률, 그러니까 자네 측 용어로는 동조율이 높아질수록 환청을 들을 가능성이 큰 것만 밝혀졌어. 그리고…….
“게이트 때문이군.”
수혁이 끼어들었다. 노리스는 뒷짐을 쥐고 눈썹 하나를 들어 올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저 가이드, 헛소리하기 전에 적색 광선에 맞았잖아.”
수혁은 팔짱을 끼면서 스크린을 향해 턱짓했다. 최강의 에스퍼에게서 초조감이 흘렀다. 그걸 눈치챈 건 역시 그와 동조된 윤조뿐이었다. 주(主) 감정이 아니고 부(副) 감정 중에서도 후순위 감정이었다. 감정 강도만 봐서는 무시해도 좋지만, 지속 시간이 문제였다. 부차 감정은 1초간에도 여러 차례 변동한다. 낮은 수준이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현상은 흔치 않았다.
‘나 때문에? 그러기엔 감정 강도가 너무 낮은데.’
윤조에게 관련된 일은 즉시 주요 감정이 된다. 이렇게 기저에 깔린 감정은 흔치 않다. 이상했다.
강수혁을 관찰하는 노리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심리적 동요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능구렁이같이 늙은 가이드는 어떤 내색도 없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베타클럽도 그 점에 주목했네. 하지만 환청을 들은 케이스는 혹은 환각을 본 케이스는 더 있어.
“환각?”
심 박사가 되물었다.
노리스는 뒤이어 다른 파일을 열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각, 다른 게이트를 상대로 작전에 나선 함대의 전투 기록이었다. 그들은 미군뿐이 아니었다. 대서양에 나타난 게이트였기에 나토 사령부도 함께였다. 해상에 나타난 중급 M형 게이트로 해수면에 닿아 녹아내리는 슬라임 부산물을 제때 건지기만 하면 되기에 아주 날로 먹는 작전이었다.
B급과 C급 에스퍼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거 작전을 지휘하는 건 나토 소속 가이드였다. 그는 수거 작전에 나서는 에스퍼 부대를 지휘하다가 갑자기 해상을 가리키며 소리를 쳤다. 게이트 덕분에 파도가 거칠었고, 함선은 위험하게 흔들렸다. 그런데도 가이드는 바다를 향해 손짓하며 뭐라고 외치다가 끝끝내 뛰어들었다. 우발적인 사고도 아니었다. 완벽한 다이빙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놀란 일반 해병 무리가 가이드를 구조하러 급하게 구명보트를 내렸다. 인근에 있는 에스퍼에게 긴급 구조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거친 바다에서 가이드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전은 영화가 아니었다. 무서운 바다를 비추는 카메라가 기어이 물에 빠졌다가 다시 급하게 검은 보트로 올라온 지점에서 비디오 클립이 끝났다.
-시신을 찾긴 찾았다네. 물에 빠진 M형에 둘러싸여서 몸의 반이 녹아내렸지만 말이야.
노리스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리곤 오디오 클립을 재생했다. 솔직히 들으나 마나였다.
물에 뛰어든 당사자로 추정되는 목청이 이탈리아 억양이 가득한 영어로 외쳤다. 아군이 위험에 빠졌다고. 다수라고. 당장 구조해야 한다고. 왜 아무도 저 소리를 듣지 못하냐고. 그러면서 자신이 구하겠다고 뛰어들었다.
-왜 이걸 들려주는지 말 안 해도 알겠지?
-누구도 구조 요청을 보낸 사실이 없었군요.
롭슨이 덧붙였다. 노리스는 눈을 살짝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이드는 동조율이 어땠죠?”
심 박사가 물었다.
-그날 가이드 그룹 구성원 중 두 명이 빠졌다고 하네. 그래서 나머지 세 명이 부스터를 사용했지. 유럽 모델 측에서는 흔한 방식이네.
한 명의 가이드 아래 에스퍼 여러 명이 배치되는 통상적인 북미형 모델과 달리, 유럽형 모델은 가이드 그룹에게 에스퍼 그룹이 편성되는 다자 대 다자 구조였다. 그래서 가이드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그룹 전체의 균형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그룹 내 가이드끼리 약물을 사용하여 능력치를 균질하게 조절했다. 종종 자기 원래 능력보다 낮추기도 하고 혹은 반대도 있었다.
이런 유럽형 그룹 가이드는 가이드에 대한 극단적인 신체 개조가 필요치 않아 상대적으로 가이드 수급이 안정적이었다. 특히 B급과 C급 에스퍼의 활용도가 압도적이라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질 때 매우 효과적이다. 단지 S급, A급은 에스퍼 하나를 가이드 그룹 하나가 붙어서 서포트해야 하기에 전투 현장에서 비효율 문제와 평상시 유지 비용 문제가 있었다.
-단순한 환각인지, 혹은 미지의 존재와 동조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네. 누군가 가이드에 대한 교란을 시도했을 수도 있지. 다만 확실한 것은, 가이드가 통상 범위를 넘어선 능력을 발휘했을 때 발생하고, 상대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는 점이지. 한국형 가이드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 만큼 ‘가이드’라는 개념 자체와 연관이 있는 문제 같군.
“영감은 겪은 적 없어?”
수혁이 물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동조율을 높이기엔 너무 늙었다네. 자칫하다간 뇌사에 빠지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하지.
뇌사라는 말에 수혁의 시선이 회색 인큐베이터를 향했다.
“어쨌거나 윤조만의 문제는 아니니 다른 쪽으로 이유를 찾아봐야겠네요.”
-심플하게 생각해서 외계인에게 동조한 건 아닐까요?
롭슨이 해맑게 물었다. 그에 에이브리가 약간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가 발생한 후 80년간 인류가 외계인과 소통을 위해서 안 해 본 것이 과연 있나?
로아무아가 입을 열었다.
-세계 모든 천문학자와 통신 전문가, 언어학자가 다 모여서 수천 종이 넘는 신호와 파장을 발신해 봤고, 수학자들이 방정식을 발신했고, 양자 신호도 보냈지. 물론 실패. 해양생물학자들이 모여 고래어도 시도했고 곤충학자들이 모여서 곤충처럼 의사소통하기 위해 냄새를 만들기도 하고 소형 드론을 대규모로 띄워서 꿀벌 엉덩이춤도 춘 적 있어. 모두 실패하고 이번에는 고생물학자와 고고학 전문가들이 외계와 접촉을 암시하는 모든 문명 흔적을 다 파헤쳐 각종 패턴과 신호를 시도했고 그도 모자라서 원시적인 제사 의식까지 지냈지. 그리고 결과는?
-어떤 반응도 없었죠. 그저 나타나고 괴물을 토해 내고 사라질 뿐입니다. 80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에이브리가 대답했다.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몰라. 아니, 원하는 게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야. 누가 알아? 저들이 지나기는 길에 그냥 우연히 지구가 있었을 뿐인지.
로아무아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롭슨은 동의 못 하는지 입을 더 달싹였다.
-가이드는 처음이니까요.
-가이드의 역사가 얼마라고 생각하나?
로아무아가 되물었다.
-하지만 고성능 가이드가 나온 건 최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롭슨이 노리스의 눈치를 보았다.
-고성능이라. 나도 성능에선 지지 않는다네.
-알고 있습니다. 무려 S급을 탈취한 전력이…… 아…… 강.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불똥이 강수혁에게로 튀었다. 에이브리는 제 상관을 향해 입을 집는 시늉을 했다. 롭슨이 얼른 주둥이를 집었다.
“어쨌거나 설계 바탕이 서로 다른 세 타입 전부 발생 전적이 있다면 가이드 자체 개념의 문제라는 거네? ‘에스퍼에게 동조’하는 행위 자체 말이야.”
-그렇다고 본다네.
-그러니까 외계 생명체 자체가 에스퍼의 근원…… 아, 예. 다물죠. 다물겠습니다.
롭슨이 알아서 짜질 때였다.
오로라 발광이 수그러든 수혁이 조용히 심 박사에게 다가와 손목을 톡톡 두드렸다. 심 박사가 고개를 돌리자 수혁은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시선만 맞추었다. 의외의 행동에 호들갑을 떠는 대신 심 박사는 연구실 안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아, 그러니까 이런 현상이 있다~ 이거 아닙니까. 당장은 뭐 조치할 것도 없으니 그만 끝냅시다. 윤조, 너도 나와. 지금 종료 명령 내릴게.”
-예, 박사님.
점검이 끝난 인큐베이터에서 신호음이 나면서 곧 인공 양수가 빠지기 시작했다. 사용한 인공 양수는 검진 샘플을 제외하곤 여과기와 소독기를 거쳐 다시 보관 탱크로 보내진다. 롭슨은 그 과정을 담당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가도 되는데 계속해서 연구실에 버티고 있었다.
“놀랐더니 정신이 없네. 나는 담배나 한 대 태워야겠다.”
심 박사가 주머니에 있는 전자 담배 세트를 확인하더니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수혁이 따랐다. 둘의 뒷모습을 연구실 모두가 지켜봤다. 그들은 수혁이 일부러 심 박사를 데리고 나갔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텔레패서에 가이드니까 뭐.’
윤조는 롭슨의 참관 아래 양수 세척 과정을 거치고 인큐베이터를 나와 몸을 닦고 롭슨이 제공하는 표준 내피를 착용했다. 그 위에 새 군복을 착용한 후 휴게실 혹은 흡연실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건물 안에선 수혁이 감지되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수혁이 위에서부터 내려꽂혔다. 어라? 하는 사이에 그에게 붙들린 윤조는 웬 야자수가 무성한 해변까지 옮겨졌다. 무성한 열대 나무 아래 퍼질러 앉은 심 박사가 누구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윤조는 그 옆에 다가가며 물었다. 질문은 당연히 수혁과 심 박사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문제가 아주 심각해. 환청 들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단다.”
“그래요? 누가요?”
수혁이 인근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며 윤조는 심 박사에게 되물었다. 심 박사가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훅 뱉으며 대답했다.
“네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