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154화 (231/256)

154화

공중에 뻗는 한 가닥 빛의 창이 시베리아 중앙 사하공화국에 발생한 초거대 게이트를 단숨에 박살 내는 속보 영상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뒤이어 강수혁과 김윤조의 이름이 최대 포털의 최다 검색어를 차지했다.

곧 강수혁이 막대한 양의 M형을 소각하는 장면 캡쳐가 각 SNS에 돌면서 최대 1억 ‘좋아요’ 를 돌파했으며, 김윤조를 기억하는 동창이 소셜 계정에 한마디씩 올린 말이 온갖 언어로 번역되어 돌다가 다시 뉴스를 탔다.

그 바람에 신이 난 건 모 글로벌 보석 브랜드였다. 세계 최강의 에스퍼가 선택한 다이아몬드 팔찌라 대대적인 광고에 나선 모델은 세계적인 품절 사태에 빠졌다. 레플리카 제품이 쇼핑몰을 휩쓸기도 했다.

복귀 후 연구실에서 조정을 끝낸 수혁과 윤조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휴게실로 향했다.

공용 휴게실이지만, 강수혁과 김윤조가 사용한 뒤로 암묵적으로 프라이빗한 공간이 되었다. 감히 트리플 S급과 겸상할 놈이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었다. 가끔 롭스, 에이브리나 노리스, 그리고 강수혁을 향한 은근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로아무아가 들어오긴 해도 고정 멤버는 윤조와 심 박사뿐이었다.

여유가 있으면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다. 하지만 출동이 잦아서 휴게실에서 대충 때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휴게실 캐비닛은 한인 마트에서 구입하거나, 특작부 수송기로 전달받은 즉석밥과 도시락 김 외에 즉석 카레와 볶음김치 등등으로 가득했다.

윤조는 대령과 소령을 모시는 준위 된 죄로 매번 식사 당번이었다. 그래 봤자 즉석밥을 비치된 전자레인지로 데우고 공장 생산 반찬을 까서 접시에 담는 정도였다.

“미트볼과 카레 있습니다. 뭐 드실 겁니까?”

“둘 다 물린다. 뭐 상큼한 거 없냐?”

심 박사가 물었다.

“참치와 볶음김치도 있습니다.”

“집 김치 먹고 싶다. 아삭아삭한 물김치나 시원한 백김치 같은 거.”

일체형 전투복 상의만 벗은 수혁이 의자에 벌러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마트에서 사 올까요? 차로 30분쯤 걸립니다.”

“지금은 있는 대로 그냥 먹자. 이따가 저녁에 마트 장 봐서 삼겹살 파티해.”

“좋아.”

셋 다 슬슬 사 먹는 반찬에 질려 가던 참이었다. 그나마 저녁에 제대로 된 밥을 먹겠다는 일념하에 오늘도 카레와 볶음김치로 때우자는 결론이 났다.

“나 왔다.”

문을 벌컥 열고 최정이 들어왔다. 누구누구처럼 알로하 셔츠에 선글라스, 슬리퍼를 신은 그는 검은색 카메라 가방을 가로질러 메고 있었다.

“왜 왔어?”

지친 심 박사가 별달리 놀란 기색도 없이 물었다.

“국군 홍보에 쓸 사진과 동영상 찍어 오래. 참, 트렁크에 선물도 있어. 액세서리랑 옷, 모자가 있는데. 기다려 봐.”

최정은 가져온 24인치 관광용 트렁크를 열었다. 안에서 익히 아는 보석 브랜드 마크가 찍힌 상자 서너 개가 먼저 나왔다.

보석상자가 저절로 비행해 수혁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안을 확인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윤조에게 넘겼다. 다이아몬드로 범벅된 남성용 팔찌와 아이돌이 좋아할 것 같은 귀걸이, 반지 세트가 화려하게 빛났다. 뚜껑을 닫은 윤조는 그것을 다시 제 앞에 있는 심 박사에 넘겼다. 내용물을 확인한 심 박사는 상자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거.”

최정이 종이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윤조는 F1 팀원이 있는 것 같이 각종 브랜드 마크가 화려하게 박힌 점퍼 두 벌과 볼 캡을 보고 기가 막혔다.

“얼마 받았어? 이거 사이즈 조정 가능해?”

다이아몬드 팔찌를 냉큼 찬 심 박사가 헐거운 반지를 상자에 넣으면서 물었다.

“특작부 연간 비품비 정도?”

“500억? 많이 받았네.”

“대신에 3년 전속. 3개월마다 스폰서 유니폼 입고 쓰고, 실내 휴식 한 컷, 활주로 배경으로 한 컷, 실제 비행 장면 한 컷 찍어서 보내야 해.”

“할 일 진짜 없네.”

아주 가벼운 아저씨와 아저씨가 들고 있는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감을 가진 대형 카메라를 깔끔히 무시한 수혁은 트렁크에서 밀봉 김치통을 발견했다.

“역시. 좋은 냄새가 나더라니.”

마약 탐지견보다 더한 김치 탐지 외계인은 김치통을 들고 희희낙락 테이블로 향했다. 그 안에는 적당히 잘 익은 총각김치가 가득했다.

“맛있겠다.”

휴게실 한구석에 서 있던 캐비닛이 저절로 열리고 둥둥 날아오는 즉석밥의 덮개가 알아서 말리더니 식탁에 착륙할 때쯤 갑자기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전자레인지 안 돌렸는데 어떻게 뜨거워졌대?”

자연스럽게 강수혁의 반대편에 앉은 심 박사가 뒤이어 날아오는 젓가락을 먼저 낚아채며 물었다.

“특정 속도로 미세 진동을 주면 알아서 데워져. 급할 땐 이게 더 빨라.”

“인간 전자레인지야, 뭐야. 편해서 좋네.”

“그러게요.”

수혁 옆에 앉은 윤조가 동의했다. 뚜껑이 말리는 동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즉석밥 두 개가 더 생겼다. 덩달아 날아온 도시락 김도 알아서 껍데기를 벗었다.

뜨거운 쌀밥에 도시락 김, 갓 익은 총각김치만큼 한국 사람을 홀리는 조합이 없다. 혈관에 김치 주스가 흐르는 에스퍼가 잘 익은 총각 무 하나를 통째로 입에 집어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순식간에 즉석밥 하나가 비워지고 새것이 날아왔다.

“김치 되게 맛있네. 이거 누가 했어?”

“김치 명인.”

“내가 명인 김치를 다 먹고. 출세했다.”

“그러게요.”

심 박사와 윤조도 거들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본토 김치를 먹으니 밥이 잘도 들어갔다. 윤조도 군인이라 먹성이 좋아서 원래 즉석밥 두 개는 기본인데 오늘은 세 개도 모자라 네 개째를 깠고, 심 박사도 두 개를 비웠다. 강수혁은 즉석밥 열두 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챠르르륵.

셋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는 동안 최정은 셔터를 맘껏 눌렀다. 특작부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답게 아주 신난 모습이었다.

왜에에에에엥!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밥을 먹으면서 개인 단말을 확인하는 윤조와 심 박사와 달리, 강수혁은 이미 반 이상 비운 김치통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악 열네 개째 즉석밥이 둥둥 날아왔고, 최정은 광경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네 번째 즉석밥을 해치우고 나서야 강수혁은 느릿느릿 일어났다.

“남은 김치 버리지 말고 챙겨 둬. 저녁에 삼겹살이랑 해서 밥 볶아 먹게.”

“알았어. 잘 다녀와.”

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티슈로 입을 닦으면서 밖으로 나서는 수혁의 뒤로 헬멧과 김윤조가 둥둥 딸려왔다.

투명의자에 앉은 윤조는 즉석밥처럼 옮겨지는 중에 전투복 단말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확인했다.

“중미 대서양 연안에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 인근 해상입니다. 지금 막 열리는 중인데 F형 중급으로 추정합니다. 좌표 보냈고요.”

“어.”

양손으로 뺨을 툭툭 친 수혁은 연구소 건물을 나오자마자 바로 고도를 올렸다.

윤조가 굽었던 자세를 바로 세우면서 수혁의 옆구리에 붙었다. 헬멧은 알아서 제 위치를 찾아가 잠겼다. 뒤이어 윤조의 오른발이 파트너의 왼발 위에 닿자 수혁의 팔이 윤조의 허리에 감겼다. 충분히 고도를 올렸을 때 즉시 가속했다. 뒤이어 소닉붐이 터지면서 두 사람은 대서양 쪽으로 직진했다.

“이야, 멋있다.”

광경을 전부 카메라에 담은 최정이 감탄을 쏟았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발생한 F형은 초거대 플라이를 비롯한 다양한 플라이를 쏟아냈다. 그러나 강수혁을 상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해상에서 발생한 F형 게이트를 상대로 실제 전투 경험이 있는 윤조와 AI는 최적화된 전술을 제시했고, 강수혁은 완벽하게 수행했다. 순식간에 제거하는 바람에 후방 지원을 위해 인근 항구에서 출발한 미군 부대가 도착했을 때는 소수 플라이마저 다 제거한 후였다. 오히려 이동 시간이 더 길었다.

해가 지기 전에 심 박사의 숙소 뒷마당에서 삼겹살 파티가 벌어졌다.

-외계 지성체 감지는 쉽지 않군. 벌써 두 번째인데 성과가 없네.

잘 익은 고기를 막 집은 노리스가 동의했다.

“그놈들이 뭔가를 하기 전에 게이트를 해치워 버리니까 그렇지. 그러게 여유를 가지고 좀 천천히 하라니까.”

심 박사가 쌈을 싸면서 거들었다.

-인근 섬에 민간인이 있습니다. 외계 지성체 탐색보다 민간인 보호가 우선입니다.

칵테일 펀치를 담던 에이브리가 연구에 미친 작자들을 향해 군인의 윤리적 의무를 지적했다.

-그런데 의식 탐색기에 끼던 노이즈는 해결했나? 그것부터 해결해야 할 텐데?

해산물과 채소를 끼운 꼬챙이를 바비큐 그릴 위에 올리던 로아무아가 물었다. 그 옆에서 롭슨이 허브 소금과 후추를 넘겨주었다.

-계속 연구 중입니다. 아무래도 위성 전파 탓인 것 같은데요. 소거법을 적용 중이라 조만간 분리해낼 겁니다.

“근데 소주 없나?”

펀치를 한 모금 마신 최정이 심 박사에게 물었다.

“마트에서 사 와. 고기도 더.”

-같이 가죠. 마침 맥주도 떨어졌으니까요.

롭슨이 차 키를 들고 일어섰다. 더 필요한 거 없냐는 최정의 물음에 묵묵히 먹기만 하던 윤조가 쌈장이라고 답했다.

“근데 이 새끼들은 아까부터 왜 여기서 남의 밥을 먹고 있는 거야? 우리 연두부 먹일 것도 모자라! 그만 먹어!”

바비큐 그릴을 잡고 한창 집중해서 고기를 굽던 강수혁이 집게로 사방을 가리켰다.

-나도 파티를 좋아한다네.

-바비큐 파티 있다고 오라고 할 땐 언제고? 그리고 난 해산물 가져왔어.

로아무아가 정색했다.

“누가 오라고 했는데?”

“내가.”

대답한 심 박사가 쌈을 우적우적 씹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