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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62화 (239/256)

162화

항공우주국은 날마다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논문과 수식으로 무장하여 우주 비행의 신개념을 마구 던지는 세계 각국 출신 천체 물리학자 집단과 그들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구현 가능한 기술과 소재 한계 문제로 반박하는 방산 업체 및 우주항공산업 분야 엔지니어들, ‘예산’이라는 무시무시한 폭탄을 투하하는 행정 관리 전문가까지 모여서 언성을 높였다.

항공우주국 직원을 다 대피시키고 건물을 비웠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항공우주국이 파괴를 면하자 어디서 바퀴벌레처럼 한두 명 튀어나오더니 결국 웬만한 책임자들은 다들 우주국 안에 숨어 있었던 걸로 밝혀졌다. 심지어 국장과 부국장도 몰랐다. 배짱이 좋은 건지, 연구만 하다가 머리가 꽃밭이 된 건지, 아니면 절망에 못 이겨 빙글 돌아 버린 바람에 간접 자살을 추구한 걸 수도 있다.

-돈이 문젭니까! 우린 지금 인류의 존속에 막대한 지장을 끼치는 문제를 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게이트 출현을 완전히 막을 거란 보장이 없잖소! 모든 자원을 다 털어 넣었다가 다시 게이트가 출현하면 그때는 우린 지금껏 하던 군사적 방어도 못 한 채로 멸망할 수도 있다는 거요!

-여태까지 이런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게이트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 인류는 백 년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도박할 때입니다.

-도박도 일단 가능해야 하는 겁니다! 지금 기술로는 두 사람의 귀환이 불가능해요!

-그들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강만큼은 대체할 수 없어요.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희망입니다.

-강에게만 의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죽기라도 하면요? 게다가 그는 툭하면 인류를 상대로도 무력 시위를 합니다. 당장 우리 항공우주국도 그에게 파괴될 뻔했어요. 그를 믿을 수 없어요.

저렇게 싸우는 동안 수혁과 윤조는 회의장 구석에 마련한 3인용 고급 소파에서 대기했다. 맨 끝에 앉은 윤조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수혁의 긴 다리가 소파 밖으로 삐져나왔다.

한심해 죽겠으나마 윤조는 난장판을 보고 있는 반면에, 수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단조로운 백색 소음이 나오는 헤드셋을 낀 덕분에 이 지랄 속에서도 제법 깊게 잠들었다.

-거기다가 강도 인간인 이상 불멸은 아니잖아요?

-심의 연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강의 예상 수명은 100년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럼 백 년 뒤에는요?

-강을 분석하여 제2, 제3의 강을 만들어야 합니다. 백 년이면 충분합니다.

-모든 카피는 오리지널을 이기지 못합니다. 적어도 강화 인간 분야는 그랬어요.

-게이트를 유인하는 전파 발생 물체를 없애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아니 그것으로 게이트를 없앨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니까요?

-그리고 G형이 단독으로 나타나란 법 있습니까. 아무리 강이라도 예상 수명까지 무탈하게 버티란 법이 없어요.

-한시라도 빨리 강과 같은 트리플 S급을 개발해야 합니다. 적어도 둘, 아니 다섯은 있어야 해요.

-어떻게요? 강이 어떤 경로로 발생한 줄 알고요?

-한국이 강에 대한 개인 파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이 그를 전담하고 있으니 심의 파일도 공개해야 합니다.

-그건 강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현재 인류는 강의 너그러움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를 화나게 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설득해야 합니다. 가이드가 왜 있습니까. 가이드는 에스퍼를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

듣던 중에 절로 한숨이 났다. 윤조의 반응에 시장통 같던 회의장에 돌연 잠잠해졌다. 그들은 대부분이 이쪽을 돌아봤다.

“당사자 앞에서 못하시는 말이 없습니다.”

입꼬리를 비쭉 올리자, 머쓱한지 저마다 시선을 피하거나 입맛을 다셨다.

“아직 제 입장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 계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제 에스퍼에게 이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김, 인류의 존속이 걸린 문제네. 그렇게 방어적으로 나올 필요는 없네. 우린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을 뿐이야.

입을 연 건 나이 지긋한 천체 물리학자였다. 게이트 연구로 세계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저명한 박사였다. 한마디로 세계적인 명성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존경받는 박사든 나발이든 제 에스퍼를 함부로 논하는 이상, 윤조에게는 그저 욕심 덕지덕지 떨어지는 역겨운 노인네일 뿐이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인류 대표도 아니면서 입 다무시죠.”

평생 그런 불손한 대꾸를 받아 본 일이 없는 박사가 얼굴을 붉혔다. 윤조는 제 허벅지 위에 놓인 수혁의 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내 에스퍼는 이미 많은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자발적인 협조 외에 다른 것을 강요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를 일반 가이드로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아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가이드의 책임 의무를 운운한 자를 콕 찍어 노려봤다.

“나는 평범한 인류로 태어났으나, 강수혁의 피와 살로 인해 그의 전담 가이드가 되었습니다. 인류로서의 자아와 동시에 가이드로서의 자아도 멀쩡합니다. 즉, 에스퍼를 관리 감독할 책임과 동시에 에스퍼를 보호할 의무도 있단 얘깁니다. 저는 강수혁을 실험체로 취급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명심하십시오.”

-혈액과 생체 표본만 제공해 주면 되네. 생명에 지장은 없어.

“생명에 지장 여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실험은 끝입니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나?

그렇게 물은 건 아까 분명히 강수혁에게만 기대선 안 된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본인도 동의하지 않는 옵션이면서 막상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자, 그건 또 싫은 모양이었다.

삐삑-

AI가 윤조만 알 수 있게 가벼운 신호음을 발신했다. 막 반박하려던 윤조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제 허벅지 위의 에스퍼에게로 기울였다.

“김윤조의 의견이 곧 내 의견이야. 김윤조가 날 실험체로 대하기 싫다잖아. 따지지 마.”

윤조가 한숨 쉴 때부터 깬 수혁은 한쪽 눈만 희뜩 뜨고 말했다.

“꼰대나 아줌마도 아닌 주제에 어디서 내 문제로 김윤조한테 따박따박 말대답이야. 건방지게.”

그러자 통역기가 뭘 어떻게 전했는지, 국장이 나섰다.

-난 꼰대 아줌마인데. 내가 말하면 되나?

“…….”

돌연 수혁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분노 그래프가 송곳처럼 불쑥 솟았다. 윤조는 빡친 에스퍼의 어깨를 꾹 눌러 도로 눕혔다.

“한국 특작부 소속 심나연 대령, 최정 대령을 불러 주십시오. 그 외에는 대화 안 합니다.”

직접적인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저쪽도 대화가 통하는 중재자가 절실했다. 심 박사와 최정이 이미 본토에 있으며 이쪽으로 곧장 출발할 거라고 했다.

“아줌마가 왜 본토에 있는데?”

“당연히 하와이 현지에서 구금 후 본토 후송했을 테니까요.”

“그래도 타국 군대 소속 최중요 인물을 제멋대로 자기네 땅으로 데리고 가고 그래도 돼?”

“핑계가 있으면 뭐든 못하겠습니까.”

“이때까진 그렇게 못했잖아. 갑자기 무슨 핑계?”

“우리가 본토 침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만.”

“아.”

“하지만 다치게 하진 않았을 겁니다. 박사님을 다치게 했다간 뭐, 어떻게 될지 저 사람들도 알 겁니다.”

윤조의 말에 회의실에서 미적거리던 자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저마다 개인 단말을 들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윤조와 수혁에 대한 정보를 채집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두 사람의 차가운 눈초리를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몰래 이쪽으로 무슨 방사능 측정기 같은 걸 들이대기도 했다.

“실험체 취급하지 말라니까 저러고 있네요.”

“내버려 둬. 아줌마가 해결하겠지.”

에스퍼가 아닌 민간인들에게 차마 손을 댈 수 없다며 그냥 무시하자고 했다. 강수혁치고는 대단히 너그러운 대응이었다. 하지만 귀찮아서 손을 못 대는 게 아니었다. 능력을 살짝 써서 저들에게 겁을 주면 그만이다. 다만 최우방국 항공우주국에 종사하는 주요 인적 자원에 손을 댔을 시에 어느 대머리 장군이 출동할 가능성이 크다. 수혁은 아직 장선욱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윤조는 돌아누운 에스퍼를 토닥였다.

“뇌파가 평소보다 예쁘네요.”

“뭐, 그럼 평소엔 안 예쁘냐?”

“평소엔 좀 송곳 같긴 합니다. 지금은 잔잔해서 느끼는 제 쪽에서도 기분 좋습니다.”

“나른해서 그래, 나른해서. 지금 나오는 화이트 노이즈가 아주 마음에 들어.”

“그렇습니까. 그거 제 심장 박동과 뇌파에 연동된 건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윤조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어? 방금 뇌파가 튀었는데요? 계속 더 흐트러집니다? 안 주무실 거면 일어나시죠. 다리 저려요.”

툭툭 치는 데도 수혁은 한사코 눈을 뜨지 않았다. 도리어 얼굴을 윤조의 아랫배 쪽에 묻었다.

“아줌마 올 때까지 더 잘 거야.”

“그러십시오.”

웃음이 피식 샜다.

한 시간 후 심 박사와 최정이 도착했다. 그들은 하와이 인근 해상 함대에서 조우한 순간이동 에스퍼를 통해 본토로 들어와 제트 수송기를 통해 바로 남부까지 날아왔다.

“얘들아! 깽판 칠 만큼 쳤냐!”

당찬 목소리와 함께 심 박사가 나타났다.

“심하게 친 건 아니지? 우리가 뭐 물어 줘야 하고 그런 건 없지?”

뒤따라 들어온 최정이 쭈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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