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인근에 계십니까?’
‘나는 제주도 함대에 있어요. 지금은 미 공군 소속 텔레패스를 통해서 연결했습니다. 강 소령님 찾을 거죠?’
아무리 각국 텔레패스를 기지국 삼았다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이렇게 연결할 수 있다니. 과연 S급 텔레패스였다.
‘네. 가능한 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일단 의식을 나에게 맡겨요.’
‘네.’
의식을 맡긴다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헬기에서 내려 편안하게 서서 눈을 감았다.
‘김 준위. 이성의 가드를 내리세요.’
장세인이 이상한 요구를 했다.
‘이성의 가드를 어떻게 내립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떻게요?’
텔레파시를 통해 연결 중기에 저쪽의 곤란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머리 비우는 건 멍을 때리는 것과 비슷해요.’
‘멍을 때려 본 적이 없어서…….’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한 이후로 김 준위 의식에 들어가기란 강풍 모드로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 사이로 실을 던져 반대편에 있는 바늘구멍에 끼우는 난이도예요. 그나마 측면 강풍기인 AI가 없어져서 좀 수월할까 했는데 생각을 비우지 못해 선풍기가 360도 각도로 회전하면 어떻게 실을 꿰겠어요.’
그 정도 난이도인 줄은 몰랐다. 가능은 한 건가?
‘할 수 없네요. 비법을 써 봅시다. 따라 해요. 오―옴.’
입을 다문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면서 두개골 아래가 살짝 지글지글했다. 이게 뭐지?
‘우주의 근원을 나타내는 진언이에요. 이 소리 내면 의식이 쉽게 열리거든요.’
뭔가 대단히 사이비 같은 행위였다.
‘사이비라뇨? 엄연한 불교 상식인데요. 불신하니까 의식이 더러운 겁니다. 믿음으로 따라 합니다. 오―옴.’
약간 어색한 감이 있을 뿐 어려운 일도 아니니 시키는 대로 진언을 따라 했다. 숨이 차면 다시 시작하기를 서너 번 반복했다. 어이없게도 어쩐지 머릿속이 비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좋아요. 이대로 계속 유지해요.’
윤조는 눈을 감고 성심성의껏 염불했다.
같이 헬기에서 내려선 로아무아에게 다가온 미 공군 장교가 관등성명을 물어왔다. 호주 해군 대령이자 가이드임을 확인하자 장교는 즉시 상부에 무전을 친 뒤에 윤조를 가리켰다.
-노리스 제독의 전언을 받았습니다. 그럼 저 친구가 그 유명한 트리플 S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군요. 그런데 왜 저러는 건데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남자친구와 교신하나?
-교신을 저렇게 합니까? 장비도 없이요?
-잘 모르겠어. 내가 아는 한국 출신은 에스퍼 일반인 할 것 없이 워낙 괴상한 짓을 많이 하는 종자들이라서. 무슨 짓을 해도 놀랍지 않아.
로아무아는 윤조를 관찰하는 공군들의 흥미로운 시선을 무시했다.
-그런데 우리를 어떻게 발견한 거지?
공군의 설명에 따르면 기지에서는 위성 없이 남부에서 북상하는 다중 게이트 현황을 파악하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비행기의 무덤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군 기지이기 때문이었다.
기지 인근을 지나가는 비행 물체 파악에만 사용하는 레이더는 한계가 있었다. 운용 가능한 구식 무인 드론을 세 기 정도 띄웠지만, 구식이라 전파 교란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교신이 끊겼다.
게이트에 먹히거나 좀 전에 일어난 영문 모를 폭풍에 휘말려 추락 가능성을 상정하고서도, 혹시나 살아 있는 드론이 있다면 정보 수집을 위해 레이더에 집중했다. 그 덕택에 연료 소진으로 동체 착륙을 시도하던 윤조 일행을 발견한 것이다. 더불어 늘 부족한 가이드 두 명까지.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공군 기지 사령관인 중장이 친히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공군의 엄정한 호위와 함께 로아무아와 윤조 두 사람이 직접 사령관을 만나러 갔어야 맞는데, 지금 윤조가 이상 행동을 계속하고 있어서 사령관이 직접 발걸음 했다.
형국의 다급함에 체면과 절차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실전 장군의 실용성이 크게 작용하는 동시에, 이면에선 김윤조가 벌이는 뭔가가 트리플 S급 에스퍼와 관련 있음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기에 그의 행위를 방해해서 뭔가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현실적 우려도 크게 한몫했다. 어쨌거나 사령관은 실용성을 강조했고 그만큼 자신의 격을 낮추어 두 사람을 환대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 바로 실전 상황이다.
외계로부터의 지구 방위라는 위대한 목표 아래 하나로 뭉쳐야 하는 시점이기에 로아무아는 기지 사령관에 대한 존중의 의미에서 가볍게 경례를 붙였다. 엄숙한 얼굴로 경계를 가볍게 받은 사령관이 남부 상황을 물었다. 로아무아는 숨길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낱낱이 말했다.
-게이트가 대륙 남부를 완전히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다중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규모로, 거의 카펫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육안으로 가늠하기로는 게이트 지대 폭이 2천 킬로미터는 넘을 겁니다. 실측 오차는 7퍼센트 내로 예상합니다.
경험이 많아서 교관으로 활동하는 가이드가 게이트에 관해 말하는 정보는 그 자체로 막강한 신뢰를 갖는다. 실측 오차까지 스스로 말한 경우엔, 한마디로 있는 그대로 믿어도 된다는 얘기였다. 기지 사령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기지 방어를 위한 화력은 있지만, 다중 게이트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네. 보시다시피 여긴 무덤이라서 말이야.
-트리플 S급인 강이 단독으로 상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위력이 어마어마하여 혼자서도 귀국의 영공은 전부 커버할 수 있을 수준입니다. 다만 그의 가이드인 김의 말에 따르면, 최적의 효율은 아니라 체력 소진을 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현재 게이트 발생이 소강 상태가 아니라 확장 국면이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이어질 텐데, 그때 정작 인류 최강의 병기가 운용 불능 상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거기까지 말한 로아무아는 턱으로 김윤조를 가리켰다.
-기지에 텔레패스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텔레패스를 통해서 강과의 연결을 시도하는 중일 겁니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건…… 뭐 도움이 되는 행위일까요?
-가이드인 자네가 모르는 걸 에스퍼 출신인 내가 어떻게 아나?
사령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사령관의 귀에 꽂혀 있던 통신기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사령관이 윤조를 다시 봤다.
-우리 텔레패스도 저런 소리를 낸다고 해. 둘이서 뭔가를 하고 있긴 하군.
-혹시 여기에 텔레포터는 없습니까? 저는 남태평양에 있을 우리 군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게이트 지대가 거기까지 뻗어 있기에 한시라도 빨리 귀환해야 합니다.
-텔레포터가 있으나 거기까지는 보낼 만한 실력자가 아니네. 대신에 제트기는 얼마든지 있지. 구식이긴 해도 T1000 등급은 언제든 비행이 가능하니까 말이야. 소형 프로펠러기에서 제트 엔진 16개가 붙은 초대형 수송기까지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잡아. 가이드 협정에 따라 가이드의 안전한 복귀를 보장할 의무가 있으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사실 저기 있는 특급 가이드만으로도 골치 아프니 자네라도 빨리 우리 기지에서 나가 버리게.
동맹국의 최고 전술 탑과 인류 최강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를 동시에 데리고 있는 자체가 공군 기지로서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게이트가 북상하는 상황에 응전이 아니라 대피가 최우선인, 퇴역기 보관 기지에 핵 가방 같은 가이드 두 명이 동시에 나타난 건 사령관으로서는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사령관이 허락이 떨어지자 장교가 로아무아에게 즉시 사용 가능한 제트기 목록을 쭈욱 읊었다.
콰르르릉!
하늘이 울었다. 간발의 차를 두고 지진이 지나갔다. 마른 땅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하늘에서 재앙의 신이 내려오는데 이젠 지각 변동까지 일어나는 건가? 신이 인간을 버릴 작정이군.
-이건 충격으로 인한 단발성 지진입니다. 어딘가에서 대규모 폭발이!
가이드인 로아무아가 상황을 진단하자마자 우레가 연속적으로 터졌다. 헬기장에 있던 인물들 대부분이 자세를 낮추며 사방을 둘러봤다. 정비공 무리는 고정되지 않은 항공기의 랜딩기어에 록을 채우느라 바빴다.
-뭔가 심상치 않은데요?
로아무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사령관의 조속한 작전지휘실 복귀를 바라는 교신도 발신되었다. 사령관과 장교가 바로 뛰었다. 그런 중에도 김윤조는 내내 헬기 근처에 서서 눈을 감은 채로 괴상한 소리를 반복했다.
쿠르르릉.
진동이 계속되면서 타고 온 헬기의 메인 로터가 휘청거렸다. 덕분에 로터 끝이 사인 함수처럼 물결치면서 이동했다. 로아무아가 보기엔 저러다가 로터가 윤조의 정수리를 타격할 것 같았다. 교신을 위해 텔레패스와 연결하여 집중하는 상대를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두부 부상으로부터는 지켜야 하지 않나.
-피해!
로터의 움직임이 치명적인 범위에 들어가기 전에 로아무아가 움직였다. 윤조를 향해 몸을 날려 럭비 태클을 걸었다.
“억!”
두 사람은 바닥에 크게 부딪히며 뒹굴었다. 윤조는 눈을 뜨며 저를 방해하는 상대를 노려봤다.
“무슨…… 아.”
하지만 두 사람 위로 거대한 로터가 휘청이며 지나가는 걸 본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감사합니다.”
-뭐를 하는지는 몰라도 여긴 위험해. 일단 피해.
로아무아가 재빨리 윤조를 일으켜 세워 인근에 있는 격납고로 몰았다. 달아나는 둘 머리 위로 게이트 가장자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올라온 거였다.
-네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좀 해 보라고 해.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게 어려워서요.”
-연결이 어렵다고? 왜? 텔레패스를 통하면 된다면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힘듭니다. 게이트에 잠식될 것을 우려한 심 박사님이 아주 특수한 방화벽을 세워서요. 심 박사님 없이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하여간 심이 문제……!
쿠르르릉!
온 사방이 진동했다. 콘크리트로 만든 군용 격납고 지붕에서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살짝 열린 격납고 밖에 각종 형광색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그 사이로 진주색 빛이 번쩍였다.
-네 남자친구가 기지 레이더 범위에 들어온 것 같은데? 아까 공군 장교가 보여 준 보유 기종 목록에 다목적 정찰기가 있었어. 날아다니는 레이더니까 발신도 가능하고.
“아.”
로아무아와 윤조는 동시에 공군 장교를 찾아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