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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70화 (247/256)

170화

격납고에서 긴급 대피와 항공기 수납을 지휘하던 장교는 둘의 요청을 즉시 사령관에게 확인했고, 사령관은 뭐든 좋으니 당장 가지고 나갈 수 있게 하라고 답했다. 그는 인류 생존에 큰 몫을 할 가이드 둘이 퇴역기와 함께 파묻힐 것을 매우 걱정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차를 타고 D구역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이륙 준비를 해 줄 겁니다.

장교가 시키는 대로 군용 지프를 타고 D구역을 향해 돌진했다. 퇴역한 군용기 수십, 수백 기가 양쪽으로 쭉 이어졌다. 연식이 적게는 30년 많게는 80년도 더 된 기체들이었다.

먼지를 막는 엔진 커버를 벗긴 대형 제트기 하나가 흙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텔스용 검은색 도장을 제외하면 꼭 개인 제트기 같았다. 작은 계단이 늘어져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조종석으로 갔는데 그 자리엔 이미 조종사가 앉아 있었다.

“제가 조종하겠습니다.”

-이건 꽤 구식이라서요. 우리 기지 내에서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파일럿이 에비에이터 선글라스를 쓴 채로 눈웃음치면서, 구형 헤드셋에 달린 돼지 꼬리처럼 꼬인 코드를 흔들었다.

유선 헤드셋이라니! 이런 건 진즉에 멸종한 줄 알았는데!

유물을 태어나서 처음 본 윤조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옆에 있는 부조종석에 앉았다. 헤드셋을 쓰자 돼지 꼬리 코드가 덜렁 들렸다. 대바늘 같은 코드 접속부를 보고 다시 경악하는 사이, 조종사가 중간에 있는 구멍에 쑥 꽂았다.

삐직!

불쾌한 소음과 함께 헤드셋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음질이 영 별로였지만, 비행 박물관이 제공하는 색다른 경험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뒤이어 들어온 로아무아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자기까지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것 같다며 도로 지프차를 몰고 현대문명 구역을 향해 달아났다. 치사하긴. 하지만 곧 깨질 바구니에 달걀을 전부 담을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아요. 자칫하다가는 꼬라박습니다. 발신기는 뒤에 있어요. 작동 매뉴얼은 여기 있고요.

조종사가 손때 묻은 초대형 책자 두 개를 윤조에게 건넸다. 당황한 채로 그것들을 받아든 윤조는 목차부터 빠르게 확인했다. 전원 넣는 법에 발신 장치 이용법을 신속하게 훑었다. 그러는 동안 진동을 일으키며 활주로에 접어든 정찰기가 가속을 시작했다. 덜컹거리던 거대 기체는 이내 쑥 이륙했다.

-오! 이게 진짜 나네요!

“예?”

치솟던 심박수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매뉴얼을 품은 채로 얼어붙은 윤조를 향해 조종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입니다! 하하하! 당연히 날죠!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재수 없는 말은 안 뱉는 게 상책이었다.

육중한 제트기는 곧장 게이트 쪽으로 날아갔다. 아까 윤조와 로아무아가 타고 온 기체에 비해서 훨씬 크기에 폭풍의 영향에 상대적으로 강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지,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터뷸런스에 휘말려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꼬라박기 전에 할 일을 빨리 마치십셔! 하하하하!

조종사는 약간 미친 사람 같았다. 혹시 마약이라도 한 걸까? 현대 마약의 시초는 전장에서 떠는 병사들의 고통과 공포심을 무마하기 위한 향정신성 약물이었다. 현재도 부스터라는 명목으로 비슷한 약물을 사용한다. 가이드가 발휘하는 에스퍼에 대한 정신적 영향력도 따지고 보면 마약과 유사했다.

떨떠름한 윤조의 안색을 살핀 파일럿이 다시 웃었다.

-그거 아십니까? 조종사 중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자는 비행기의 무덤에 있는 거 말입니다. 이륙부터 착륙까지 다 알아서 하는 AI가 붙어 있는 쌩쌩한 신형 전투기는 유치원을 갓 졸업한 아이도 몰 수 있습니다. 고장 나기 직전인 구식 퇴역 항공기를 날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파일럿이죠! 이런 건 위험한 작전 축에도 안 듭니다!

조종사는 한쪽 눈을 찡끗했다. 이상하게도 윙크 한 번에 신뢰가 생겼다. 지뢰밭을 맨발로 밟으며 뛰어도 눈썹 위를 가로지르는 멋진 생채기 하나 외엔 사지 멀쩡한 구식 블록버스터 주인공 같달까. 어쩌면 가정용 냉장고 하나로 핵폭발의 강렬한 열복사를 견디는 모험물 주인공 같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추론하자면 재생 능력이 탁월한 에스퍼일 확률이 높다.

파일럿의 안위보다는 방사능 태풍 안에서 날뛰고 있는 제 망나니의 안위가 더 걱정이었다. 게이트에 충분히 접근하기 전에 윤조는 미리 레이더 장치 앞에 앉아 매뉴얼을 속독해가며 조작을 시작했다. 날아다니는 박물관을 날아다니는 확성기로 탈바꿈시키는 건 금방이었다. 송출 모드인 레이더 출력이 맥스까지 치솟았다.

정찰기가 게이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들어섰다. 아무리 구식이라도 대(對)게이트 시대에 제작한 기체다. 스텔스 도장 아래에는 우주 방사능도 너끈히 버티는 특수 세라믹 타일이 붙어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중 게이트의 압도적인 위력을 전부 차단하진 못했다. 기체 내부까지 진한 열감이 침투하면서 온도가 급상승했다.

-이 열기라면 조만간 회로가 녹을 겁니다! 빨리하십시오!

“준비 완료!”

윤조는 제 헤드셋 코드를 발신 장치에 꽂았다. 기판 위에 있는 출력 조정 스위치를 모조리 위로 밀어 올렸다.

“송출 시작!”

키이잉―

구식 레이더가 용트림을 시작했다. 윤조는 헤드셋 마이크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가 한계까지 부풀 때 참았던 숨을 폭발시켰다.

“가아아앙 수우우우우우 혀여어어어억! 동작 그만!”

막강한 송출 신호가 대기를 흔들었다. 대형 민간 화물기 사이즈를 자랑하는 정찰기에 실린 레이더 설비는 아레나 콘서트에서 쓰는 우퍼를 아득히 능가하는 송출력을 가졌다. 거기다가 출력 맥스 상태에서 내지른 외침은 물리적 파동까지 동반하여 게이트 한가운데에 냅다 꽂혔다.

“가앙수혀억! 공격 중지! 즈윽시 귀화안!”

두 번째 외쳤을 때 가까운 곳에서 큰 폭발이 일었다. 레이더 송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막강한 떨림이 기체 전체를 덮쳤다. 팍! 스파크가 튀면서 곳곳에 계기판이 죽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조종사가 쌍욕을 연신 뱉으며 기체를 크게 틀었다. 헤드셋 마이크를 쥔 윤조는 레이더가 완전히 죽기 전에 한 마디라도 더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강수혁억! 들리나! 즉시 귀환!”

들었다면 즉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 강수혁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외부 파장에 자극받은 게이트가 날뛰기 시작했다.

전방에 있는 F형 게이트가 성숙을 마치고 더러운 초록색 꽁무니를 아래로 한껏 늘어뜨렸다. 가운데서 까만 파리들이 주르륵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폭풍우 때문에 파리들은 기체에 좀처럼 접근하지 못했지만, 끈질기게 이쪽으로 다가오려 들었다.

-저런. 게이트가 열렸네.

파리떼 한중간에 희뿌연 날벼락이 쳤다.

콰쾅!

척 보기에도 길이가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초강력 번개에 직격당한 F형 게이트가 터지면서 사방에서 폭발이 연이었다. 날파리는 폭발에 휘말려 사라졌지만, 터뷸런스에 휘말린 정찰기가 큰 타격을 받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윤조의 무릎에 있던 매뉴얼이 어느 순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중력이 있다면 마땅히 구석에 처박혀야 할 책자가 어쩐지 공중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윤조는 새처럼 날아다니는 매뉴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체는 무중력 상태 즉, 지상을 향해 자유낙하 중이란 얘기였다.

-엔진 2기 추력 상실! 다른 4기가 있지만 아니 3기가 있지만, 터뷸런스가 너무 강해서 버티기 힘듭니다! 우린 지금 추락하고 있어요!

“압니다!”

-이 기체로는 더는 버티지 못해요! 비상 낙하산은 그쪽에 있습니다!

윤조는 화물용 그물에 묶인 낙하산을 찾았다. 제트 분사기가 달린 최신식이었다. 처음부터 이 기체가 추락할 걸 예상한 누군가가 가져다 둔 것 같았다. 윤조는 낙하산을 급하게 착용하고 아까부터 팔에 걸고 있던 헬멧을 장착했다.

-준비되면 비상구 탈출 버튼을 누르십시오! 문이 떨어져 나갈 겁니다!

“그쪽은요?”

-저는 기장입니다! 기장은 승객부터 내리고 내리는 겁니다!

“아니 잠깐만!”

그때 기체가 크게 아래로 휘청 내려앉았다. 낙하산을 입느라 안전띠를 푼 윤조는 천장에 텅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추락 후에 다시 떠올랐다. 당혹감이고 뭐가 신경질이 퍽 터졌다. 관자놀이와 뒷골 신경이 바싹 당겼다. 단전에서부터 치민 분노가 으르렁대는 대기처럼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아, 시발…… 강수혁…… 뒤진다아?”

그때였다.

쿵!

뭔가가 기체를 타격했다.

-으아아악!

조종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고개를 들자 저쪽 윈드실드 앞에 시커먼 인영이 나타났다. 그것은 다중 게이트가 터진 최악의 대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체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검은 인영 뒤로 흰 번개가 번쩍 내리쳤다. 번개를 등진 거구의 실루엣과 두 눈이 동시에 귀기 어린 오로라로 물들었다.

“소령님!”

-안녕하십니까, 강.

어색한 인사를 하는 조종사와 윤조를 번갈아 본 수혁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안 돼…… 억!”

말리기도 전에 윈드실드가 파괴되어 뜯겨 나갔다. 기압 차로 터뷸런스보다 더한 바람이 몰아쳤다. 윤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상실된 윈드실드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빙글빙글 도는 사이 정찰기가 저 멀리 까마득하게 멀어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낙하 자세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폭풍에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하늘과 땅이 세탁조처럼 휙휙 돌았다. 시각도 청각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게이트와 트리플 S급 에스퍼가 벌이는 전면전 사이에 휘말려 낙엽처럼 부유할 뿐이었다.

원심분리기처럼 돌아가는 덕분에 뇌압이 제멋대로였다. 확 올랐다가 훅 꺼지는 통에 전투복도 소용이 없었다. 의식이 흐려졌다. 낙하하는지 부유하는지 분간이 안 되기 시작했다.

줄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흐느적거리는 가이드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그와 동시에 회전도 멈췄다. 하염없던 추락도 끝이었다. 대신 번쩍이는 번개에 휩싸인 채로 게이트 지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형광 도가니탕이 멀어지고 폭풍이 잦아들었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를 간신히 가누자 그렇게 목놓아 찾던 얼굴이 보였다.

찰싹.

힘없는 손목 스냅으로 상대의 딱딱하게 굳은 뺨을 토닥인 윤조는 곧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발끝이 닿지 않았다.

쿵.

멀리 추락한 정찰기가 폭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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