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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71화 (248/256)

171화

17. 최종장

가이드 전용 전투복이 착용자의 상태를 신속하게 점검하여 근육에 대한 물리적 자극과 함께 각성 성분이 든 약물을 주사했다. 어지러움이 빠르게 가시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허어, 소령님.”

“언제는 고막 썩은 개쌍놈이라며?”

성인 남자를 가벼운 봉제 인형처럼 한쪽 팔로 안아 든 에스퍼가 심통을 부렸다.

“개쌍놈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고막 얘기도 한 적 없고요.”

“했거든.”

“전투복 기록 확인할까요?”

열과 성을 다해 드디어 만났는데 살가운 말 한마디 없다니 사이가 뭐 이래? 싶지만 어쩐지 툭툭대는 사이 갖은 걱정과 두려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거구의 에스퍼는 삐진 대장 고릴라처럼 이쪽을 한껏 의식하면서도 한사코 먼 시선을 유지했다.

“동조 기록은 있어도 내용까지 세세하게 남진 않잖아. 네가 진심으로 욕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그건……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저 좀 보시죠?”

순순하게 인정하자 그제야 휘황찬란한 오팔빛 링을 두른 홍채 한 쌍이 이쪽을 향했다. 전투복의 응급 처치에 힘입어 회복한 기력은 방사능이 응축된 열기에 그을린 자국이 남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싸기에 사용했다.

“회복이 느리네요.”

“아무래도 방사능 농축도가 다르니까. 안에 피폭도 장난 아니야. 지금 서 있는 게 기적이라고.”

서 있는 게 기적인 사람이 방금 까지도 게이트를 찢어발기고 있었나? 투정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료해야겠네요.”

“응. 응급 치료 필요…….”

문장을 끝마치기 전에 윤조는 상대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을 댔다. 따뜻한 입술이 느껴져야 하는데 어쩐지 툭? 하는 소리만 났다.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아.”

헬멧.

“너, 뭐 하냐?”

헬멧 쉴드 덕에 뭉그러진 입이 움직였다.

“실수입니다.”

얼른 헬멧을 벗어 던졌다. 그러곤 제대로 입술을 겹쳤다. 윤조는 혀를 내밀어 상대의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파고들었다. 안에 든 혀는 언제나처럼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하지만 연인의 타액은 평소와 달리 달콤하지 않고 매웠다. 아까 들은 대로 전신이 내부까지 방사능에 절여진 덕분이었다.

깊은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수혁의 타액 덕분에 윤조의 구강 내도 오염도가 올라갔다. 전투복이 맹렬하게 제염(除染)을 시작했다. 타액조차 응급 모드로 대응할 수준이란 얘기다. B급 에스퍼라면 회복 속도가 피폭 속도를 이기지 못해 벌써 죽었거나 A, S급이라도 응급 센터 신세를 졌을 거다.

키스를 먼저 끊은 건 윤조의 전투복이 난리인 걸 눈치챈 수혁이었다. 그는 타액을 갈무리하며 입술을 뗐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듯 이마를 윤조의 미간에 비볐다. 우뚝 솟은 코끝이 칼부림처럼 맞닿았다. 그런 수혁을, 윤조는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늦었냐? 난동 한참 부렸는데.”

“이래 봬도 에스퍼가 아니라서요. 누구 없이는 단독 비행 불가능하거든요.”

“지상에 있을 걸 그랬나?”

“아닙니다. 소령님 덕택에 각국 군대들이 여유를 벌었습니다. 큰 도움 되었을 겁니다.”

“도움이 안 될 텐데.”

“소형과 소형 이하의 마이크로 게이트는 각 군이 대응할 겁니다. 우리는 큰 것부터 제거하면 됩니다.”

로아무아와 이동하는 중간에 대략적인 전술을 정했다. 그가 타국 함대에 기본 전술 방안을 전달할 거다. 물리력을 동반한 미사일 공격은 소형 이하 게이트를 상대로 효율성이 극대화된다. 전 세계 모든 군대가 가이드의 체계적인 지휘 아래 동시 공격을 감행하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로아무아와 윤조가 일치된 결론을 도출했다. 물론 강수혁이 중형 이상 게이트를 전담한다는 전제하에.

“그 전제가 틀렸어.”

“왜요? 휴식이 필요하십니까? 식사가 필요하시면 인근에 공군 기지가 있습니다. 식사 중에 제염 작업이 가능합니다.”

윤조가 빠르게 기지 위치를 전달했다.

“배 안 고파. 너 안고 있으니 회복 속도 빨라서 목욕 안 해도 되겠어.”

“그럼…… 여기서 할까요?”

피로 회복에 딱히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기 진작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막 한가운데서 할 만큼 급하지…… 야.”

손을 내려 중요 부위를 가늠했다. 특수 탄소 소재로 만들어 딱딱한 에스퍼 전투복 위로 굴곡이 졌다.

“되게 급한 것 같으신데요?”

“급해. 그런데 여기서 했다가는 네가 못 견뎌. 헬멧 얼른 써.”

벗어 던진 헬멧이 두둥실 떠올라 제자리에 앉더니 잠겨 버렸다.

“그리고 그럴 여유 없어.”

“왜요?”

“저것들은 선발대야.”

“선발대요?”

소형과 마이크로는 선발대일 수 있다. 하지만 중형, 대형, 그리고 초대형이 선발대라고? 무엇을 위한?

“안 들려? 돼지 멱따는 합창 아래 재수 없는 기척이 숨어 있잖아.”

“예?”

반문하면서 윤조는 동조율을 올렸다. 통상 모드를 넘어서 전투 모드에 접어들자 수혁이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윤조에게 전달되었다. 분노와 역겨움, 짜증이 뒤섞인 뇌파의 기저에는 초조함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윤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코즈믹 호러급 다중 게이트였다. 그래도 강수혁이라면, 업그레이드 이후로, 성장을 거듭하여 일격에 초대형 M형 게이트를 박살 내는 인류 최강의 에스퍼라면 힘겨워도 아예 상대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더구나 한 때 너무 호전적인 성향 덕분에 불안정한 프로토타입 가이드를 제일 먼저 배정받은 완전 전투형 에스퍼가 아닌가.

전담 가이드인 윤조가 파악한 바로 강수혁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이 있긴 했다. 첫째, 연인과의 결별. 둘째, 인류 탈락. 둘 다 지금은 해결된 문제다. 그렇다면 마지막이 남는다.

동조율을 최대치로 올렸다. 뇌가 울리면서 강수혁과의 일체감이 생성되었다. 그러자 전투 모드에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게이트는 나타날 때마다 방사능과 함께 특유의 전파를 내뿜는다. 전파 분석을 통해 얼마나 크게 발달할지, 혹은 M형인지, F형인지 미리 파악할 수 있다. 가청 음역대로 전환하면 아레나 콘서트 10개가 동시에 열리는 수준에 이르는 무수한 전파 사이로 유달리 툭 불거진 파장이 있었다.

단 하나. 상대적으로 가늘고 높은 주파수와 완전히 다른 클래스를 보유한 전파가.

다른 게이트의 주파수가 모세혈관으로 만든 피리나, 거미줄을 걸친 바이올린을 극세사 활로 비비는 수준이라면, 그것은 직경 10cm가 넘어가는 구리줄을 전봇대로 긁는 수준으로 육중했다.

“이……건?”

눈을 홉뜬 윤조의 시야에 딱딱하게 굳은 옆모습이 들어왔다. 수혁의 시선은 게이트를 향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눈앞에 있는 다중 게이트 무리가 아니었다.

“내려다보고 있어. 시선이 느껴져.”

진한 소름이 윤조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벌어진 입속에 마른 먼지바람이 들어왔다. 꺼끌꺼끌한 목구멍에서 옅은 신음이 샜다.

“같은 놈이야.”

“하지만 그것은 소령님이…….”

“없앤 적 없어. 그저 쫓아냈을 뿐이지.”

겉으로는 담담해도 뇌파는 초조함으로 엉망이었다. 그건 윤조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놈이란다.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에 나타나 수십만에 이르는 실종자와 수백만에 이르는 유가족, 이재민을 생성해 낸 최악의 괴물. 가족의 원수이자 윤조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흉.

서울 사건의 주범, 바로 그 G형이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 징그럽게도 많은 수하를 앞세워서.

갑자기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위성 AI와의 연결이 여전히 불통이기에 전신을 뒤흔드는 강렬한 감각이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지 못했다. 손끝이 어릿하고 뒷덜미가 뻐근했다. 시야가 아찔하게 꺼졌다가 전투복의 자극으로 인해 다시 확 밝아졌다. 바짝 선 머리털이 사막의 먼지바람에 떨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뉴런을 따라 전기신호가 맥동했다. 소름이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 전율로 변했다.

“야, 쫄지 마.”

동조율이 최고치기에 이쪽의 감각 또한 수혁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안 쪼는데요?”

“아니긴. 떨고 있잖아.”

“쫄아서 떠는 게 아닙니다. 이건…….”

윤조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양자컴퓨터인 AI는 없으나, 보통 인간보다는 훨씬 강화된 뇌가 무수한 단어를 검색하여 가장 그럴싸한 표현을 떠올렸다.

“이건 반가움…… 같은데요.”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은 광대와 어우러져 씰룩댔다.

반가움!

명명하는 순간 모호한 감각이 뚜렷한 실체로 변했다. 입꼬리가 빙그레 호를 그렸다.

“드디어 만났네요. 드디어.”

시선을 내린 수혁은 옆구리에 낀 제 가이드를 빤히 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쪼는 게 낫겠다.”

쿠르르릉.

절대 테라(Terra)의 색이라고 볼 수 없는 색이 퍼질러진 하늘엔 불길함이 자욱했다. 부글부글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게이트 뒤로 막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막 성숙하여 열리려던 중형 게이트가 그림자에 덥석 삼켜졌다. 뒤이어 마이크로 게이트도 한 움큼 사라졌다. 게이트가 사라진 자리엔 검붉은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생각했던 건데 말이야.”

검붉은 소용돌이를 보며 수혁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저거 이쪽이 불러들인 거 같다.”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타이밍이 공교롭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으니 말이다.

“테스트 때문입니까?”

“그래. 정확하게는 네가 발산한 신호 때문에.”

그러면서 수혁은 윤조를 돌아봤다.

“뭐라고 했길래 저 새끼가 다 출동해?”

“글쎄요.”

물어봤자 솔직히 윤조 자신도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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