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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74화 (251/256)

174화

여기 있어 봤자 특별히 안전하지도 않다. 사방이 사막이라 엄폐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텔레포터 에스퍼가 있어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투기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최신형을 가져와도 GPS 없이 방사능과 강력한 전자파를 내포한 게이트 폭풍 권역을 날아다니다가 제풀에 추락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육중한 외피를 자랑하던 수송기 회로도 금방 타 버리지 않았나. 빠른 비행을 위해 외피를 최대한 얇게 유지하는 전투기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비행 시간에 따른 연료 수급 문제도 있고.

군용차는 상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수단이긴 해도 속도가 느리다. 개미가 코끼리를 상대로 전속력으로 달려 봐야 거기서 거기다.

전투복만 하나 달랑 걸친 윤조가 믿을 구석이라고는 멀어져 가는 저 에스퍼뿐이었다. 그도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홀로 G형에게 맞서지 않나.

둘 다 생존 확률은 지극히 낮다. 알고 하는 배웅이었다.

태풍에 맞서는 반딧불 커플 신세이면서도, 혹여나 윤조가 소닉붐의 영향을 받을까 봐서 서서히 일정 거리를 벌리는 선까지 거리를 벌리는 모습에 입매가 저절로 빙그레 늘어졌다. 섬세한 배려가 귀엽달까.

가속을 위해 자세를 잡던 수혁이 뭔가 문득 떠올렸다.

“깜빡한 게 있는데.”

말소리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다. 동조로 인해 의식이 충분히 전달되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굳이 육성을 내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대각선 아래로 옮겼다. 오팔빛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반대로 윤조를 바라보는 같은 색 눈동자는 무척 부드러웠다.

“어?”

상대의 의식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깨달은 순간 윤조는 반대로 얼어붙었다.

“……예?

“맞아.”

“그게 무슨…… 아.”

테스트하기 전에 수혁은 윤조에게 전달하려고 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실패했다. 하와이에 있을 때도 한번 얘기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제대로 얘기했어야 했는데.

“저게 왜 소령님을 원하는데요?”

서울 사건은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희생자와 유가족뿐 아니라, G형을 직접 처리한 당사자에게도.

의식을 공유하고 있어도 순간 동조할 뿐이지 오래된 기억까지 다 털어 보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의식 깊은 곳에 꽁꽁 뭉쳐 놓은 검고 딱딱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본인이 일부러 펼쳐 놓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묵은 암세포 같은 트라우마가 같은 G형의 출현으로 활성화에 들어갔다. 두려움과 괴로움, 역겨움과 분노가 마구잡이로 휘몰아치는 중에도 수혁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을 유지했다. 툭 치면 뭉그러지는 연두부 한 모가 가져온 따뜻한 불길이 진흙 같은 제 영혼을 단단한 세라믹으로 구워 버렸기 때문이다.

“저건 날 따라와. 그러니까 너는 안전해.”

“소령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당황한 가이드가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다급하게 뻗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를 데려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혼자는 못 보냅니다!”

김윤조가 냅다 달렸다. 기를 쓰고 쫓아오는 모습이 우습고 귀여웠다. 능력을 사용해 그를 뒤로 쭉 밀었다. 보이지 않은 힘에도 기어이 대가리에 힘을 주고 한발 한발 내딛으려고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성난 시골 강아지였다. 저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머리부터 들이민 윤조는 두 팔을 휘저었다. 닿지 않는 걸 알면서도 성질을 부리더니 이내 포기하고 바로 섰다. 포기했나 싶었다. 하지만 성질이 가득 난 가이드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철렁했다. 페널티다.

저도 모르게 살짝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페널티 전조 증상인 찌릿함도 없었다. 당황한 건 이쪽뿐만이 아니었다.

“왜 안 되지?”

김윤조가 다시 미간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어떤 두통도 발생하지 않았다.

“AI 없이는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최근 들어 페널티를 사용한 적이 없어서 AI 없이 안 되는 것인 줄 몰랐다. 김윤조도 모르던 모양이었다.

“안 되는 일에 괜히 힘 빼지 말고.”

“소령님! 안 됩니다!”

소령의 명령을 깡그리 무시하고 쫓아오는 건방진 준위를 제재할 수단이라곤 역시 능력 사용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팔을 휘둘렀다.

“억.”

상체에 힘을 받은 김윤조가 전방으로 ㄷ자로 접힌 채로 먼 후방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가 공군 기지 본부 인근에 낙하한 걸 확인한 후에 수혁은 즉시 G형을 돌아봤다.

“오랜만이다. 이번에는 끝장을 내자.”

화답하듯 게이트가 불룩 솟아올랐다. 시커멓고 징그러운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이익― 휘우우우웅― 피에에에엑!

음치 고래 수백 마리가 발산하는 저주파가 터졌다. 뇌가 징징 울렸다. 강력한 파동이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게이트를 흩뜨렸다. 주변에 있던 구멍들이 화들짝 놀란 말미잘처럼 입구를 오므렸다. 그러는 사이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괴물 다리가 아래로 쑥 내려왔다.

방사능을 품은 자갈과 먼지가 훅 피어올라 수혁을 덮쳤다. 활성 상태이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구형 방어막 표면에 자갈 먼지가 휘돌았다. 자욱한 모래 폭풍으로 인해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망할 괴물의 표면을 자세히 관찰하여 잘라낼 부분은 특정해야 했으나 싶지만 쉽지 않았다. 대기를 찢는 폭풍이 수혁을 자꾸 바깥으로 밀어냈다. 출력의 상당 비율을 방어에 쏟고 있으나, 회전하는 진공 칼날로 만들어낸 방어막은 먼지와 바람을 막을 뿐, 방사능과 전파엔 무용지물이었다.

주르륵.

어느새 코에서 피가 흘렀다. 수혁은 손등으로 찝찝한 인중을 쓸었다. 재생력이 피폭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안압이 올라가면서 시야가 흐릿해지고, 치솟는 뇌압 덕분에 머리가 어질했다. 코피 덕분에 살짝 주춤했던 혈압은 다시 상승 중이었다.

G형의 영향력이 미치는 사막은 더 이상 생명이 넘치는 푸른 별의 표면이 아니었다. 차라리 목성의 대적점과 유사했다. 어떤 특수 코팅을 입힌 장치도 이 안에서는 즉시 망가질 것이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강력한 방공호나 마찬가지인 우주선을 타고서도 살아나가지 못할 영역이기에 전투복으로는 1분도 버티지 못한다. 헬멧을 쓰나 안 쓰나 차이가 없단 소리였다. 그래서 윤조를 두고 왔다. 저기도 위험하지만.

‘빨리 좀 들어와라, 좆같은 개새끼야. 어디서 뜸을 들이고 있어.’

다시 흐르는 코피를 훔치면서 수혁은 어금니를 갈았다.

딱 두 대.

저 환장할 미친 괴물 새끼의 다리를 딱 두 대만 잘라 핵탄두를 쏟아부어 터트릴 것이다. 아파트 철근으로 얼기설기 만들어 낸 창으로 찍어 버렸을 때 화들짝 놀라 근 9년 가까이 달아난 걸 보면, 다리 두 갤 끊어내면 앞으로 50년쯤은 안 나타날 것이다.

50년 사이에 저 같은 황당한 트리플 S급 개새끼가 두엇은 더 생기겠지. 그럼 제대하고 남은 세월은 김윤조랑 알콩달콩 놀면서―.

쿠쿵.

착지로 인해 발생한 국소 지진이 사막을 뒤흔들었다.

첫 번째 다리가 착지한 직후 두 번째 다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첫 다리가 사막에 마른강을 파며 움직이는 동안 두 번째 다리가 착지했다. 이제 됐다.

수혁은 방어막에 할애하던 출력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전기 톱날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모래가 전신을 마구 긁어 댔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고 콧등과 광대에 큰 홈이 파였다. 귀는 반쯤 날아가고 두피에서도 피가 흘렀다. 전투복도 삭아서 곳곳에 피부가 드러났다. 경동맥에 연거푸 박힌 총알도 해내지 못한 짓을, G형의 폭풍이 해내고 있었다.

끔찍하게 아프다. 아파서 발버둥 치고 싶었다. 그래도 정신은 아직 또렷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척추에 달린 장치 덕분이었다. 자살 방지용 구속 장치가 신경과 뇌를 단단히 보호했다. 하지만 척추 장치도 지구인의 창조물인 이상 영원하진 않다.

턱을 꽉 깨물었다. 잇몸이 무너지면서 핏물이 튀었다. 막 길어지는 창을 든 손등뼈가 드러났다가 막 생성된 붉은 피막에 가려지길 반복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단숨에 두 개의 표면을 갈라야 한다.

창이 최장 길이에 이른 순간이었다. 눈을 홉뜬 수혁이 빛의 창을 휘둘렀다.

휘우웅― 우우웅.

태산 같은 다리 표면이 반달 모양으로 서걱 썰렸다.

키에에에엥!

G형의 비명이 하늘을 찢고 수혁의 고막도 찢었다. 코, 귀, 입에서 핏물이 퍽 튀었다.

순간 출력이 반으로 떨어졌다. 신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덕분에 창이 반토막 났고 다른 다리까지 잘라낼 여력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혁은 두 번째 다리에 남은 창을 던졌다.

키아아아아아―!

끔찍한 파동이 너덜너덜한 전신을 후려 팼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후퇴를 외쳤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성난 G형이 빨랐다.

쿵!

표면이 잘려 나간 다리가 수혁을 가로막았다. 방향을 틀자 다른 다리가 쫓아와 거대한 벽을 드리웠다.

‘도망가지 않아?’

핵탄두를 터트리진 않았으나 충분히 타격을 주었다. 그런데도 G형은 도리리 수혁을 쫓아왔다. 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더군다나 간신히 잘라낸 표면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재생 중이었다.

당장 핵탄두를 터트려 다리를 잘라야 한다.

핏물이 흐르는 이마를 닦으며 수혁은 낙하했다. 표면에 자욱한 흙바람 속에 몸을 숨기고 핵탄두를 가져올 생각이었다. 공격에 당한 두 다리를 간신히 젖히고 핵탄두 위치를 가늠할 때였다.

쿵.

난데없이 다리 하나가 수혁의 옆에 내리꽂혔다. 기존 두 개보다는 현저하게 얇으나 그래도 무지막지만 굵기를 자랑하는 세 번째 다리는 속도가 배는 더 빨랐다. 제 비행 속도를 초월하여 뻗어가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한 수혁은 깊은 낭패감을 느꼈다.

더 가속해야 함에도 속도는 도리어 느려졌다. 비행 고도도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출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재생된 피가 신체에 흡수되지 못하고 마른 모래바람을 붙들려 날아갔다. 시야가 까맣게 흐려졌다.

끝이다.

치직치직.

거친 전파가 팅팅 부은 대뇌를 두드렸다.

강수혁!

흐릿한 정신을 뚫고 선명한 목소리가 불렀다.

멋대로 죽지 마!

김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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