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16)

* 본 소설에는 극적인 재미를 위하여 현실과 다르게 설정한 부분이 있으며, 등장하는 이야기 및 기관·인물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는 허구임을 알려 드립니다.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네가 날 버렸다는 걸.

1화

*

학교로 향하는 도로에는 언제나처럼 차들이 빼곡하게 줄을 서 있었다. 수업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학부모들의 차량이었다.

코이는 항상 그렇듯이 힘껏 페달을 밟아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차들을 지나쳐 재빨리 길을 건넜다. 저 멀리서 오던 차가 코이의 자전거를 보고 슬그머니 속도를 늦춘다. 코이는 더 세게 다리를 움직여 곧바로 학교 부지에 들어섰다. 같은 시간 등교하는 애들이 차에서 내려 서로 알은체를 했다.

“사라, 여기!”

“어제 이터너티 봤어? 나 그 장면에서 정말 울었잖아. 어떻게 그러고 끝나?”

“아빠가 또 캠핑을 가재. 완전 구려.”

자전거를 지정된 구역에 세워 두고 사방에서 수다를 떠는 아이들을 지나쳐 사물함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떨어 댔지만 코이에게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사물함을 열어 교과서를 꺼냈다. 오전 수업에 쓸 교재만 팔에 안고 다시 사물함 문을 닫는데, 갑자기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번진 들뜬 분위기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코이는 곧 납득했다. 저쪽에서 아이스하키 팀 주전 6인방이 떠들어 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단번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주로 몰려다니는 여섯 명의 사내 녀석들은 하나같이 또래들보다 체격이 월등하게 큰 것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준수했다.

그 사이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였다. 당연한 듯이 중앙에 서서 걷고 있는 그는 동급생들의 그런 시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친구들과 농담을 하며 떠들어 댔다. 하지만 정작 주변을 향한 그의 반응과 반대로 모두는 그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코이 또한 그중 하나였다.

웃으니까 더 잘생겼어.

코이는 잠시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아이스하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평소 코이는 그의 별명이 아주 유치하고 소름 돋는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빙상 위의 왕자님.

우웨에에엑.

코이는 목을 쥐고 토하는 시늉을 할 뻔했다. 자신이 잠시나마 그 말에 공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아침 해를 받아 은근한 빛을 내는 화려한 실버블론드는 물론이고 살짝 찌푸린 눈썹조차 그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은청색의 눈동자를 감싼 깊은 눈매와 두껍고 넓은 입술, 한 번도 부러진 적이 없는 것 같은, 날이 선 콧대에 각이 진 턱선까지. 음영이 뚜렷한 얼굴은 석고상 대신 그의 얼굴을 갖다 놓아도 될 정도로 선이 명확했다.

거기다 저 다부진 몸은 어떤가. 190센티미터 가까이 되는 키에 유니폼 대신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실히 드러나는 넓은 어깨와 부풀어 오른 가슴·단단한 허벅지는 물론 보기 좋게 올라간 엉덩이까지 그는 완벽했다.

당연하지, 저 녀석은 한 번도 우승을 놓쳐 본 적이 없는 버팔로 하이스쿨 아이스하키 팀의 주장이니까.

몸에 근육이라고는 고작해야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양 정도밖에 갖고 있지 않은 코이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동경하는 것조차 양심에 찔릴 정도로 완벽한 그를 보자면 그냥 잠자코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마침 고개를 돌렸던 애슐리가 코이를 발견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슬그머니 한쪽으로 몸을 피하려던 코이는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져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 나?

반신반의하며 두 번째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리키자 애슐리가 두 눈 가득히 웃음을 머금으며 더 크게 미소 지었다.

애슐리 밀러가 날 알고 있어?

사실 그들은 대부분의 AP 수업을 같이 듣고 있었다. 물론 애슐리는 대개 친구들과 함께였고 코이는 혼자서 항상 구석 자리에 앉아 먼지처럼 흐릿한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데 저 아이스하키 스타가 코이를 알고 있다니. 거기다 먼저 알은체를 하기까지.

하긴 같이 듣는 수업이 몇 갠데.

코이는 그럴듯한 추측을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코이에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백금발의 아이스하키 팀 주장은 같은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잠시 그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학교 제일의 인기인이 자신을 먼저 알은체한다는 사실이 더욱 코이를 들뜨게 했다.

“안…….”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손을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휭 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코이의 옆을 스쳐 갔다. 곧이어 코이 쪽을 보던 애슐리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옮겨 갔다.

“안녕, 애쉬.”

다정하게 웃으며 키스를 하는 여학생은 애슐리의 여자 친구로, 당연한 얘기지만 치어리딩 팀의 주장이었다. 어느 학교나 있는 스포츠 스타와 치어리더장 커플의 모습을 보며 코이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 친구를 보고 웃었던 거구나.

순간 무안해져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평소 그는 자신의 존재감이 저 구석의 먼지만도 못하다고 자학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것에 너무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모두가 그를 비웃고 있었을 테니까.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무리 중에 한 녀석이 코이를 지나치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비켜, 멍청아.”

본의 아니게 길을 막은 그를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밀쳐 버렸다. 그만 사물함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지만 아무도 그런 코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모두의 시선은 코이를 지나쳐 멀어지는 패거리들에게 몰려 있었으니까. 코이는 부딪친 팔을 문지르며 민망함에 시선을 내렸다.

애슐리 밀러는 날 모르는구나.

당연하다. 코이는 그에게 있어 수많은 평범한 동급생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생각할수록 멋쩍어져 그는 머리를 벅벅 긁고 말았다. 뒤늦게 사물함의 문을 잠그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그의 머리를 난폭하게 후려쳤다.

“아!”

순간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이 코이가 들고 있던 책을 냅다 쳐 버렸다. 코이는 급히 받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책은 손끝을 스쳤을 뿐 부질없이 바닥에 우르르 떨어지고 말았다.

“찐따 새끼.”

“정신 차려, 병신 새끼야.”넬슨과 패거리들이 와하하 웃으며 가 버렸다. 코이는 바닥에 떨어진 책들만 멀거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 급히 짐을 챙겼다.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서둘러 복도를 달려가 교실에 도착해 보니 벌써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다. 교실의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건 당연히 애슐리와 그 친구들이었다. 항상 같이 몰려다니는 멤버는 보통 여섯인데 세 명은 아마 다른 수업을 듣는 모양인지 지금은 애슐리를 포함한 세 명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은 여전한 그들을 흘긋 본 코이는 항상 그렇듯 구석 자리로 향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새로 누굴 채워서 넣을 수 있는 건가?”

“안무를 바꿀 것 같지는 않던데. 누구 괜찮은 애가 없는지 알아본다고 들었어.”

“넌 들은 거 없어, 애쉬?”

친구의 물음에 애슐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나한테도 물어보긴 했는데 갑자기 응원단에 들어와서 함께 시즌을 뛸 만한 멤버를 구하기가 쉽겠어? 안무를 바꾸는 게 낫지.”

“그런데? 에리얼이 싫대?”

“그 안무가 꼭 필요하대.”

“뭐 얼마나 대단한 안무길래?”

다른 친구의 물음에 애슐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몰라, 나도. 어쨌든 상황이 안 되면 에리얼도 포기하겠지.”

거기까지 말한 그가 고개를 돌리다가 코이 쪽을 보았다. 마침 그들을 지나치던 코이 역시 순간적으로 반응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친 게 전부인 듯 애슐리는 판에 박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럼 그렇지.

내심 실망스러워져 걸음을 옮겨 구석 자리에 앉는 동안 애슐리를 포함한 녀석들은 계속해서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전날 봤던 경기 결과라거나, 집에서 동생과 다툰 일 등등 시시콜콜한 소리들을 나열하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코이는 수업 준비를 했다.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로 들어왔다. 이내 교실 안이 조용해지고, 그녀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수업을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