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니, 난 최선을 다하고 싶어.”
정색을 하고 말하자 애슐리는 작전을 바꿔 퉁명스럽게 물었다.
“넌 체육 활동 같은 거 없어?”
“있어.”
굳이 마라톤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함께 운동장에서 체력 훈련을 하고 있는데 전혀 그걸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굳이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자니 티끌만 한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래도 불만 가득한 표정만큼은 감추지 않고 노려봤으나 정작 애슐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아, 하고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애슐리가 드디어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두 손 다 들었다는 듯이 두 손바닥을 코이의 앞에 펼쳐 보였던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준비했던 얘기를 꺼냈다. 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어떤 식으로 과제를 진행할 건지를 얘기하고 우선 만날 약속을 잡으려 했다.
“난 일주일 내내 훈련이 있어.”
애슐리가 팔짱을 끼고 코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물론 코이는 대답을 준비해 뒀다.
“6시면 끝나잖아. 샤워하고 7시면 충분하지 않아?”
순간 애슐리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집념이 저렇게 치를 떨 정도인가 하고 코이가 내심 생각했을 때, 애슐리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너, 내 스토커인 건 아니지?”
“뭐…… 절대 아냐!”
기겁을 한 코이에게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농담이야.”
이 나르시시스트!
코이는 울컥 화가 치밀어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 아니라고. 나도 체육 활동을 하니까 알게 된 것뿐이야.”
이래서 잘난 인간들은 싫다니까. 코이는 한껏 부은 얼굴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널 좋아하리라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그래, 정말 다행이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휴, 한숨까지 내쉬는 모습을 보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코이는 너무나 잘난 애슐리 밀러의 얼굴을 노려보며 빠르게 덧붙였다.
“오늘 7시면 나도 시간이 되니까 바로 시작하자. 빨리 끝내는 게 너도 좋겠지?”
“알았어.”
모든 현실을 받아들인 듯 선뜻 말한 애슐리에게 카페테리아에서 보자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럼 7시에 그린 벨에서 보자.”
“뭐?”
순간 화들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린 벨이라니, 그런 비싼 곳에서? 말도 안 돼!
“잠깐, 애슐리, 아니, 애쉬, 기다려 봐!”
돌아서서 가 버리려던 애슐리는 또다시 그를 붙잡은 코이를 짜증스럽게 내려다봤다. 하지만 코이에게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저기, 굳이 식당까지 갈 필요 있어? 그냥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얘기하면…….”
“저녁 7시에?”
애슐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다짜고짜 그를 붙잡았던 코이도 그 지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연하다. 카페테리아는 5시가 되면 문을 닫으니까.
말문이 막혀 버린 코이를 내려다보던 애슐리를 그의 친구가 불렀다. 애슐리는 자연스럽게 코이의 손을 떼어 낸 후 확인이라도 하듯 물었다.
“오늘 7시 그린 벨, 됐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코이가 갈 수 있는 가게는 그 시간엔 하지 않거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자 애슐리는 곧 친구들에게 가 버렸다. 혼자 남은 코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
애슐리가 그린 벨에 나타난 시간은 7시 정각이었다. 마라톤부는 대부분 아이스하키 팀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끝나기 때문에 코이는 애슐리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올 수 있었다. 그래 봤자 10분 차이였지만.
당연하지. 난 자전거로 왔고 저 녀석은 그 잘난 카이엔을 몰고 왔을 테니까.
괜히 입을 삐죽거렸던 코이는 입구에 서서 안을 둘러보던 애슐리와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그에게 걸어온 애슐리는 코이의 건너편에 앉자마자 휴, 하고 숨을 뱉어 냈다.
“일찍 왔네.”
말을 하면서 코이 앞에 아무것도 없는 모습을 확인한 애슐리에게 코이가 말했다.
“아직 주문 안 했어.”
“그래?”
애슐리가 고개를 돌리자 마침 그쪽을 본 직원이 선뜻 다가왔다. 각자의 앞에 놓인 메뉴 북을 집어 든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조용히 메뉴 북을 덮었지만 애슐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페이지를 계속해서 뒤적거렸다. 코이는 그가 메뉴를 결정할 때까지 애먼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시간을 때웠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든 애슐리가 손을 들고, 직원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냈다. 그녀가 적을 준비를 끝낸 것을 확인한 애슐리가 주문을 시작했다.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 더블 패티 버거. 양파는 다 빼고 치즈는 두 장씩. 또 팬케이크하고 사이드는 바나나로, 베이컨은 바짝 익혀서, 계란은 두 개 다 삶아 주고요. 메이플 시럽하고…… 아, 더블 패티 버거 두 개로요. 그리고 또…….”
“자, 잠깐만, 잠깐만.”
계속해서 주문을 하려는 그의 모습에 코이가 기겁을 해 브레이크를 걸었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애슐리에게 코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 너무 많지 않아? 아무리 둘이 먹는 거라도.”
“둘이 먹다니?”
조심스럽게 지적하자 애슐리가 눈을 깜박였다. 어? 이게 아닌가? 당황해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나 혼자 먹을 건데?”
“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코이를 앞에 두고 애슐리가 주문을 계속했다.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인 거대한 스테이크까지 추가한 그는 마지막으로 탄산수를 주문한 뒤 메뉴 북을 덮었다.
“네 차례야.”
싱긋 웃는 상큼한 얼굴에 넋을 잃고 있던 코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메뉴 북을 찾았지만 그가 주문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콜라요. 얼음 없이.”
“그게 다야?”
직원보다 먼저 애슐리가 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묻는 말에 코이는 쓰린 위를 안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난 저녁 먹고 왔어.”
“아, 그래?”
고맙게도 애슐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끝냈다. 자신이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메뉴는 고작 콜라 한 잔이 전부라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직원이 돌아서서 가 버리자 코이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이번 과제 말이야, 내가 대충 생각을 해 봤는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노트를 꺼내 펼쳤다.
“우리 과제가 라틴 국가 중에서 하나 선택해서 문화를 조사하는 거잖아. 특별히 하고 싶은 나라 있어?”
“아니.”
너무나 빠르고 간단히 나온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실망한 표정을 본 애슐리가 멋쩍은 듯 말했다.
“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어?
변명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한 말에 코이는 무심코 눈을 깜박거렸다. 때마침 크게 하품을 했던 애슐리가 피곤이 가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계속해, 듣고 있으니까.”
많이 지치긴 했나 보네.
코이는 조금 찔리는 마음으로 흘긋거리며 화제를 이어 갔다.
“일단 여러 개 뽑아 놓긴 했는데, 볼래? 아니면 내가 이 중에서 하나를 정할까?”
“네가 정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
코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의 이런 태도는 이 과제가 그에게 별로 의미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좀 더 일을 하는 걸 각오했었기 때문에, 코이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라는 아르헨티나로 하고, 먹는 게 제일 만만하니까 음식으로, 커피랑 샌드위치 어때? 역사라든지 만드는 방법이라든지…….”
“좋아.”
애슐리는 이번에도 간단히 답했고, 예상했던 반응이라 코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그럼 이제 자료 조사를 하고 그거에 맞춰서 목차랑 챕터를 어떻게 배분할지 결정하자.”
“그런 것보다 넌 커피, 난 샌드위치 이런 식으로 나누는 게 낫지 않아? 뭐 조사하다가 겹치는 부분이 나오면 그건 따로 정리해서 비교해 보고.”
“아, 좋아. 그렇게 하자.”
모처럼 애슐리가 낸 의견에 코이는 반색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뭔가 예감이 좋다. 그걸 시작으로 둘은 모처럼 대화를 나눴다. 애슐리는 주로 듣는 쪽이었지만 이따금 의견을 내거나 반대하기도 했고, 코이는 적극적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뜻밖에도 애슐리는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아니면 그저 코이가 들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애슐리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은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고작 30분 남짓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도 코이는 그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몇 마디 하지 않고도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매력이라니, 그가 자신과 동급생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을 때면 같은 남자라는 사실도 잊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러니 다들 난리지.
내심 공감하며 코이는 열심히 메모를 했다. 휴대 전화로 자료를 대충 훑으며 얘기를 짜 맞추는데,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