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더는 못 참아.
코이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번득이며 이를 갈았다. 다른 과제 탓이었지만 밤을 새운 탓에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생각을 이성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애슐리 밀러는 며칠째 그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그렇게 산뜻한 얼굴로 내게 사기를 치다니.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애슐리 밀러는 대역죄인이었다. 당장 나타나 과제를 내놓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도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에게 따지기는커녕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메일은 물론이고 기껏 보낸 메시지까지 무시당하자 코이는 화가 치밀었지만 거기까지가 다였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수업에 들어가기 전 로커 앞에 서서 항상 몰려다니던 패거리를 기다렸다. 그 녀석들이라면 대체 애슐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고 있겠지.
그리고 막상 기회가 왔을 때, 패거리에게서 들은 얘기는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애슐리가 아프다고?”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높아진 음성에 패거리 중 한 명이 그래, 하고 말했다.
“뭐, 감기라나. 좀 쉬다 보면 낫겠지. 무슨 일인데?”
“어…… 아냐, 아무것도. ……고마워.”
더듬거리며 달아나듯 자리를 떠난 코이는 자신이 혼자 펄펄 뛰며 화를 냈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혹시 나한테 재킷을 벗어 줬던 것 때문에…….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애슐리는 바로 다음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감기라니, 너무나 확실한 증거였다.
“많이 아프대?”
걱정스럽게 묻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글쎄, 하고 어깨를 으쓱하는 것뿐이었다.
“나으면 오겠지. 왜? 뭐 볼일 있어?”
“어…….”
생각지 못한 질문에 코이는 말을 더듬거렸다. 애슐리가 감기에 걸린 이유를 말하려니 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신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다가 앓아누웠다는 사실을 퍼뜨리면 어떻게 될까? 확실한 건 아무도 애슐리를 칭찬하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녀석들이 더 늘어날지도 모르지.
뒤따라온 섬뜩한 상상에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별거 아냐. 그럼 안녕, 고마워, 잘 가.”
빠르게 말을 쏟아 낸 그는 달아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열심히 달려가며 흘긋 돌아보니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며 걸어가고 있었다. 코이의 수상한 태도를 의심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는 듯했다.
“후우.”
간신히 벽 뒤로 돌아가 몸을 기댄 그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눈을 감았다. 거봐, 이렇게 먼지처럼 아무 존재감 없는 인생이 최고라니까. 저 녀석들은 벌써 내 얼굴 따위는 잊어버렸을 거야. 코이는 확신을 가지고 숨을 가라앉혔다.
아무튼 좋다. 애슐리가 감기에 걸린 건 안됐지만 당장 그에겐 과제가 먼저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까. 다음 수업을 위해 걸음을 옮기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다. 순탄히 진행될 거라고 자만했던 과제는 그러나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이런 일이 그에겐 아주 익숙했다.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한 번도 순순히 일이 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작 과제일 뿐인데.
이것까지 이렇게 꼬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한테든 거친 욕설을 한바탕 쏟아 버리고 싶었지만 제대로 아는 욕이 없어 더 화가 났다. 난 왜 욕하는 것조차 못 할까.
잠깐 자학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 이렇게 우울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아픈 건 안됐지만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 봐 달라고 말해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은 기간에 혼자 과제를 끝내는 건 무리였다. 코이에게는 다른 과목의 과제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리자 행동은 빨랐다. 그는 바로 휴대 전화를 들고 애슐리 밀러의 번호를 찾았다. 그나마 저장된 번호라고는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의 번호를 포함해 열 개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기다 A로 시작하는 철자 덕에 애슐리의 번호는 제일 앞에 있었다.
코이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먼저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 그는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고 건너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애슐리 밀러였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친 듯이 두근대던 심장이 일시에 멈춘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이어 두 배의 속도로 뛰어 대기 시작했고, 코이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애슐리가 말했다.
- ……여보세요? 누구야?
피곤이 가득한 음성은 누가 들어도 병색이 완연했다. 코이는 약간의 죄책감과 과제에 대한 걱정으로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운을 뗐다.
“어, 저기, 안녕. 같이 스페인어 수업 듣는 코너 나일즈인데, 이번 과제 같은 팀이잖아. 우리 그린 벨에서 같이 회의도 했었는데, 기억나?”
더듬거리며 장황하게 설명을 했으나 애슐리는 잠시 동안 대답이 없었다.
- 아…….
한숨인지 알겠다는 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숨소리에 코이는 휴대 전화를 귀에서 뗐다가 다시 갖다 대고 말을 꺼냈다.
“저기, 메일도 보내고 메시지도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 아프다는 얘긴 들었는데, 괜찮아?”
- ……괜찮은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냐?
잔뜩 쉰 목소리로 애슐리가 빈정거렸다. 물론 코이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고 서운해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병자 특유의 짜증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둘은 서로 걱정해 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거기다 이미 학교 제일의 인기 스타인 예쁜 여자 친구한테서 넘치도록 위로를 받았을 테니 코이는 할 말만 하면 됐다. 는 으흠, 헛기침을 한 뒤 말을 계속했다.
“저기, 지난번엔 개인적인 걸 너무 많이 물어봐서 미안해. 다신 안 그럴 테니까 같이 과제를 마무리하면 안 될까?”
대답을 기다렸다가 이어서 다음 말을 쏟아 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애슐리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으로 어, 하고 되물었다.
- 과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맥 빠지는 반응이었다. 애슐리가 자신만큼 과제에 열렬하게 매달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무심할 거라고는 또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이는 순간 당황했다.
“어, 저기, 지난번에 얘기 끝냈잖아? 아르헨티나 음식 문화에 대해서 조사하자고. 난 커피, 넌 샌드위치. 저기, 조사는 한 거지……?”
스스로의 귀에도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잔뜩 기가 죽은 게 분명한 목소리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는 애슐리 밀러가 아니었다. 이게 자신의 모습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탓에 달라질 수도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눈치를 보는데, 짜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던 애슐리가 말했다.
- 글쎄, 잘 모르겠는데.
“뭐?”
코이는 당황했지만 애슐리는 벌써 흥미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기운 없는 음성으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 꼭 해야 하는 과제도 아니잖아. 그냥 대충 하면 어때?
“아니, 아니지. 잠깐만 기다려, 애쉬!”
그대로 끊어 버릴 기세인 애슐리를 코이는 황급히 붙잡았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깊은 한숨 소리에 코이는 순간적으로 기가 죽었으나 버텨야 했다. 가지고 있는 용기를 전부 끌어모아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자료 조사는 내가 할게. 그다음의 챕터 몇 개만 맡아 줘. 저기, 개요랑 주제랑 이런 거 다 내가 정리할게, 어때?”
애슐리가 다시 맥 빠지는 소리를 하기 전에 코이는 먼저 내뱉었다.
“난 이 점수 꼭 받아야 한다고.”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제발! 기도하고 싶은 심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애슐리가 말했다.
- 나랑 상관없어.
“애…….”
다급하게 그를 불렀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버린 다음이었다. 코이는 멍하니 휴대 전화의 빈 화면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내 버린다고?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이미 전화는 끊겨 버렸고, 다시 걸어 봤지만 이번에는 아예 받지도 않았다. 절망스럽지만 인정해야 했다. 애슐리는 과제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