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너 요즘에 이상해졌어.”
방과 후 훈련까지 모두 마친 애슐리와 아이스하키 팀 무리들은 각자의 여자 친구와 함께 그린 벨에 모였다.
운동을 끝내고 짐승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남자 친구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한바탕 먹어 치우고 난 뒤, 어느 정도 이성을 찾았을 때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가 찌푸린 얼굴로 한 말에 애슐리가 의아해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래.”
모여 있던 다른 녀석들도 흥미롭게 그들을 응시했다. 에리얼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상한 찌질이랑 어울려 다니잖아, 전에는 그런 애들 거들떠도 안 보더니.”
“누구?”
“코이 말하는 거 아냐?”
미간을 찌푸린 애슐리에게 지켜보던 녀석 중 한 명이 말했다. 그제야 애슐리는 아아, 하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얼은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애들 취급도 안 했었잖아? 갑자기 왜 그래? 설마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내가?”
애슐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함께 모여 있던 아이스하키 팀 주전 녀석들도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에리얼은 뺨을 붉혔으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하긴 그래, 우리도 궁금하긴 했어.”
같이 몰려다니는 무리 중 하나인 빌이 말을 받았다.
“점심시간마다 그 녀석을 끼워 주잖아. 왜 그러는 거야? 약점을 잡힌 건 아닐 텐데.”
일부러 뒷말을 덧붙인 빌이 에리얼을 향해 히죽 웃었다. 에리얼이 눈썹을 찡그리는데, 한 입 크게 물었던 햄버거를 삼킨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별거 없어. 그냥, 불쌍해서.”
“불쌍해?”
에리얼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애슐리 대신 다른 녀석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녀석 질 나쁜 녀석들한테 꽤 괴롭힘당했던 것 같던데.”
그 말에 또 다른 녀석이 동조했다.
“맞아, 처음 봤을 때도 아마 두들겨 맞고 있었지?”
“맞고 있진 않았어. 맞기 직전이긴 했지만.”
“그게 그거잖아.”
“다른데? 전혀 다른데?”
쓸데없는 농담으로 흘러가는 대화를 잠시 내버려 뒀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너희들도 그냥 대충 잘해 줘. 불쌍한 녀석이잖아.”
모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알았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인사 정도만 받아 주면 되지, 안 그래?”
빌이 한 말에 애슐리는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하고 감자튀김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까지 불쾌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에리얼이 말했다.
“그런 애하고 괜히 어울리지 마. 너까지 덜떨어져 보이니까.”
그녀는 콜라를 입으로 가져가며 새침하게 덧붙였다.
“우린 그런 애들하곤 다르잖아.”
애슐리는 그녀의 콜라 컵에 담긴 얼음을 무심코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다르지, 물론.”
탄산에 얼음을 넣지 않는 건 그 녀석뿐이니까.
속으로 떠올렸던 그는 이내 피식 웃고 생각을 접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우리랑 같은 수업 듣더라.”
빌이 이제 기억났다는 듯이 말하자 다른 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도 몇 개 들어. 애쉬랑은 거의 겹치지? AP 수업은 다 듣나 봐.”
휙, 짧은 휘파람을 분 녀석에게 그의 여자 친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 일 없으면 공부라도 해야지 뭐. 걘 친구도 없지?”
“누가 그런 찌질이랑 놀겠니?”
에리얼이 핀잔을 주고, 모두가 웃었다. 애슐리 또한 웃으며 가슴 한구석에 이는 작은 죄책감을 모른 척했다.
왜 하필 지금 그 자식의 웃는 얼굴이 생각날까.
일부러 컵에 든 얼음을 입에 물고 와그작, 소리가 나도록 씹어 깨뜨린 그는 이내 머릿속을 비우고 다른 녀석들과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
“안녕, 코이.”
“안녕, 빌.”
사물함 앞에서 마주친 아이스하키 팀 주전 중 한 명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코이 또한 반갑게 인사를 되돌리자 그는 씩 웃더니 곧 자신의 사물함으로 향했다.
그날 이후 애슐리와 함께 다니던 녀석들은 종종 코이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래 봤자 간단한 인사 정도가 다였지만 코이에게는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지금까진 학교에서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고작 한마디 인사말이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쁨을 주는지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코이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거나 뒤에서 수군거리던 것들이 사라지고 간단히 인사를 건네거나 한발 더 나아가 가벼운 잡담까지 나누게 됐다.
처음 같은 수업을 듣는 동급생이 아무렇지 않게 전날 봤던 TV 프로그램의 얘기를 했을 때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코이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도 곧 자리를 떠나 버렸지만 이것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날 코이는 종일 휴대 전화로 동급생이 말했던 프로그램을 검색해 내용을 확인하고 유튜브에 올라온 무료 화면을 보는 것에 흠뻑 빠져 지냈다.
가장 좋은 건 넬슨 패거리들의 괴롭힘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조롱당하거나 얻어맞지 않고 그런 두려움조차 없이 하루를 보낸다는 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일인가. 코이는 그 일상을 처음으로 누리며 더없이 만족스러운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게 다 애슐리 밀러 덕분이었다.
어떻게 그런 애가 다 있을까.
코이는 새삼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고,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데 머리도 좋고, 거기다 인성까지 갖췄어! 이렇게 완벽한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만약 애슐리 밀러라는 종교가 생긴다면 코이는 가장 먼저 신도가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애슐리는 그에게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애슐리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코이의 절망뿐이었던 인생을 이토록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으로 바꿔 준 것이다. 애슐리에게는 평생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 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 애슐리 밀러가 고작 코너 나일즈 따위를 필요로 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학기가 끝나 그들은 방학을 맞이했다.
*
♪♪♪♬♬♩♪…….
아침 일찍부터 울린 벨 소리에 애슐리는 잠에서 깼다.
“으으윽…….”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긴 팔을 뻗은 그는 사이드 테이블 위를 더듬거려 휴대 전화를 찾았다. 벨 소리는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 애쉬?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새된 음성에 애슐리는 잠깐 반응을 하지 못했다.
“……앨?”
아직 잠긴 목소리로 부르자 건너편에서 에리얼이 대답했다.
- 애쉬, 뭐 해? 아직도 자?
“……몇 신데?”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휴대 전화의 시계를 확인한 그는 하마터면 욕설을 뱉을 뻔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거칠게 나온 음성에 에리얼이 사이를 뒀다가 말했다.
- 그냥, 오늘은 못 만날 거 같아서. 아빠가 다 같이 저녁 먹자고 하잖아.
미간을 찌푸렸던 애슐리는 곧 깨달았다.
“……7월 4일이구나.”
한숨처럼 나온 중얼거림에 에리얼이 응, 하고 말을 이었다.
- 미안해, 넌 혹시 부모님이 오시거나 하진 않니?
애슐리의 부모가 동부에 있고, 그만 이곳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는 건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었다. 애슐리는 별다른 감정 없이 대답했다.
“됐어, 독립기념일엔 가족이 함께 지내야지. 알았어.”
- 전화할게, 애쉬.
휴대 전화에 키스 소리를 남긴 에리얼이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잠시 바라봤던 애슐리는 그것을 침대 위에 내던지고 후, 한숨과 함께 돌아누웠다.
“그렇지. 휴일엔 가족과 함께 보내야지.”
자신이 했던 말을 되풀이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주변은 한없이 고요했다.
*
저 멀리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커다란 굉음이 터졌다.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계산대 안에 서 있던 코이는 무심코 밖을 보았다. 유리문 너머의 하늘에는 사그라지는 불꽃의 꼬리만이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재밌겠다.
코이는 멍하니 생각했다. 독립기념일은 1년 중 손에 꼽을 만한 큰 휴일이고 어딜 가도 북새통이다. 레스토랑은 특별히 가격이 오르기 일쑤고, 가족들은 당연히 그 값을 지불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특히 가족과의 시간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런 날은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다음 달에 칠 대입 시험이다. 준비는 다 끝났다. 남은 건 성적뿐.
전날 다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다시 붙잡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들린 종소리에 코이는 정신이 들었다.
“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뜻밖의 사람을 보고 그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선뜻 안으로 들어왔던 남자 또한 계산대 안에 서 있는 코이를 보고 멈칫했다.
“애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