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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216)

16화

“이거, 코끼리였어?”

“어…… 몰랐어?”

오히려 코이가 놀란 듯 되물었다.

“봐, 여기 이렇게 코가 길잖아. 꼬리도 이렇게 있고.”

코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지만 여전히 애슐리는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저 형이상학적인 생김새에서 코와 꼬리를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하지만 코이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애슐리는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고 대신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만 들어가.”

애슐리의 말에 코이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가게로 돌아가면서도 아쉬운지 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잘 가, 또 와, 안녕.”

연거푸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드는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준 뒤 애슐리는 운전석에 앉았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코이 또한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애슐리는 주저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가게를 향해 걸으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코이의 모습이 룸미러를 통해 시야에 들어왔다. 애슐리는 주차장을 벗어나자마자 안도감과 허전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진 적 있어?”

갑작스러운 얘기에 휴대 전화 너머에서 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 갑자기 무슨 얘기야?

애슐리는 잠시 사이를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아무것도.”

대답을 기다리던 빌은 거친 말투로 핀잔을 주며 말을 이었다.

- 뭐냐, 난데없이. 그보다 어때? 새 학기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더 가도 되지?”

지난번 모두 애슐리의 집에 모여서 논 것이 아주 좋았던 모양이다. 친구들은 또 한 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예전 같으면 기꺼이 그들의 바람을 들어줬을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큰 저택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그쪽이 낫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애슐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바빠.”

- 뭐? 갑자기 무슨 말이야?

빌이 황당해하며 떠들어 댔지만 애슐리는 귀찮아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한동안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던 그는 짧게 숨을 뱉어 낸 뒤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여름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

“어서 와!”

애슐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코이는 반갑게 소리쳤다. 언제나 격하게 온몸으로 환영해 주는 그를 볼 때마다 애슐리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번에도 역시 묘한 기분을 느끼며 가게에 발을 들여놓은 애슐리가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애슐리의 인사에 또다시 같은 인사를 되돌린 코이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본 애슐리는 항상 그렇듯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넌 날 만날 때마다 웃고 있네. 그렇게 반가워?”

대충 아무거나 집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며 애슐리가 물었다. 이렇게 물으면 펄쩍 뛰면서 “아냐!”라고 부정하거나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이는 안 그래도 벌어진 입을 더 크게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응, 물론이지. 난 네가 너무너무 좋은걸.”

뜻밖의 대답에 오히려 애슐리가 민망해지고 말았다. 눈을 둥그렇게 뜬 애슐리를 보며 코이가 말했다.

“당연하잖아. 애슐리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까르르 웃는 소리에 애슐리는 흔치 않게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드물게도 그의 뺨이 다소 달아올랐다. 코이는 그런 그의 모습에는 아랑곳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계산을 하더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선물.”

“또야?”

멈칫한 애슐리에게 코이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한정이라고.”

못생긴 코끼리―라고 주장하는―인형을 준 뒤로 코이는 때마다 이렇게 애슐리에게 선물을 챙겨 주었다.

코이가 뭐든 애슐리에게 주고 싶어서 열심이라는 것은 애슐리도 뻔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럼 거절하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웃으면서 싫다는 말을 잘도 했으면서 코이에게는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원인은 저 코이의 웃는 얼굴이었다.

“자, 이건 개미핥기야.”

또다시 형체를 알 수 없는 인형을 내밀며 코이가 활짝 웃었다. 애슐리에게 선물을 한다는 사실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눈에 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과 빛나는 눈, 벌어진 입은 물론이고 연신 까딱거리는 귀가 그의 감정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애슐리도 두 번째로 인형을 받았을 때는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얗게 질린 코이의 얼굴을 본 순간 자신의 말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애슐리의 차 뒷좌석에는 못생긴 인형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냥 여길 안 오면 되잖아.

썩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괴상하게 생긴 인형을 받아 든 애슐리가 생각했다. 그러면 이런 고민도 안 해도 되는데.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벌써 애슐리는 이 가게에 와서 코이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쓸데없는 물건을 사들이면서까지.

“양상추 씨앗은 왜? 마당에 심으려고?”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으며 묻는 말에 그제야 애슐리가 자신이 대충 잡은 물건의 정체를 알게 됐다. 코이는 해맑게 웃으며 조잘거렸다.

“직접 농사를 지어 먹는 것도 좋지. 난 가끔 종이컵에 흙을 담아서 거기 씨를 심는데, 새싹이 나오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종이컵이라고?”

애슐리가 묻자 코이는 응,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한 줄로 세워 놔.”

보란 듯이 계산대 위에 손으로 쭉 선을 그어 보인 코이의 얼굴은 뿌듯하게 빛났다. 자신을 바라보는 애슐리의 표정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차.

뒤늦게 자신이 너무 들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당황한 코이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사라지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심하다가 또 실수를 저질렀다. 애슐리는 코이의 이 궁상맞은 취미에 질려 버린 게 분명했다.

그동안 최대한 그런 자신을 감추려 노력했는데,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버리다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저기…….”

자신감 없이 사그라드는 음성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코이를 보고 애슐리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런, 코이가 기가 죽었잖아.

“너도 양상추를 심어?”

애슐리는 급히 머리를 굴려 화제를 꺼냈다. 코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반신반의하는 그의 표정에 애슐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그래 왔으니까.

역시나 코이의 얼굴이 대번 밝아지며 다시 홍조가 떠올랐다.

“응, 전에 한 번 심었었는데 종이컵에서는 잘 자라지 않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민들레를 키우고 있어.”

“……민들레?”

애슐리는 길에 아무렇게나 터를 잡고 있는 잡초를 떠올렸다. 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무 흙에서나 잘 자라잖아.”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민들레를 키울 생각은 아무도 안 할걸.

애슐리는 생각했으나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코이가 민들레를 키우기로 결심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애써 씨를 샀는데 죽어 버리면 아깝기 때문이다. 돈도 아끼면서 꽃도 키울 수 있으니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라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뭘 키워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애슐리의 물음에 코이는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그냥…….”

풀이 죽은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애슐리는 머리를 숙이고 우물쭈물하는 코이의 말을 기다렸다.

“뭔가 살아 있는 게 보고 싶었어.”

애슐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집에 정원이 없나?

아파트에 사는 녀석들도 많다. 코이도 그렇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애슐리는 궁금했으나 묻는 것은 그만뒀다. 그들은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최소한 애슐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을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코이는 처음에 나한테 엄청나게 물어봤었지.

애슐리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모두가 알고 있는 별거 아닌 질문들뿐이라 별생각이 없었지만 그것조차도 너무나 기뻐하며 귀담아듣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했다. 아마 그 얼굴 때문에 터무니없이 경계를 풀고 선뜻 대답해 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코이도 내가 물으면 뭐든 다 대답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시험해 보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다시 눌러 버렸다. 그리고 그는 방금 했던 생각을 곱씹었다.

우린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냐.

그렇게 했다가 애슐리에게 질문이 돌아올 수도 있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이상으로 자신에 대한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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