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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216)

17화

질문을 하는 대신 코이가 챙겨 준 비닐봉지를 집어 든 애슐리는 문득 눈에 들어온 교재에 무심코 입을 열었다.

“대입 시험 봐?”

“아, 응. 다음 주에.”

코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넌 봤어?”

이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다. 모두가 아는 거니까.

“응.”

“그렇구나. 좋겠다. 난 너무 떨려.”

후아, 깊은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를 보고 애슐리가 말했다.

“성적 안 나와도 다시 보면 되잖아.”

그럼 돈을 또 내야 되잖아.

코이는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넌 성적 잘 나왔지?”

“뭐, 그냥.”

대충 얼버무리는 그에게 코이가 물었다.

“점수 물어봐도 돼?”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흔한 점수야.”

“그래서 몇 점인데?”

코이는 집요하게 물었다. 딱히 그의 점수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슐리는 목뒤를 문지르더니 말했다.

“만점.”

“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인 코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이 쏟아질 것 같아 애슐리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실수라도 하지 않는 한 많이 나와.”

“그건, 그렇지만.”

같은 AP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겐 드물지 않은 일이긴 했다. 그래도 시험을 눈앞에 둔 코이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굉장한 일이었다.

“부럽다. 나도 잘 나와야 될 텐데.”

“넌 더 잘 볼 거야.”

애슐리가 그를 위로했다. 코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만점에서 어떻게 더 잘 봐?”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피식 웃고 말았을 텐데 애슐리가 말하니 정말 뭔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애슐리도 그와 같은 나이의 고등학생일 뿐이라 특별하게 다른 건 없었다. 애슐리는 답을 알려 주는 대신 회피했다.

“그럼, 갈게.”

“아, 잠깐만! 애쉬!”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운 코이가 허겁지겁 계산대를 돌아 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기다리는데, 환한 얼굴로 내미는 것은 아까의 못생긴 인형이었다.

“이거 가져가야지.”

애슐리가 일부러 들고나오지 않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애슐리는 인형과 코이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응!”

코이는 너무나 기뻐했다. 그의 귀가 쉴 새 없이 까딱거리는 것을 보고 애슐리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럼, 갈게. 열심히 해.”

“응, 잘 가. 또 보자.”

애슐리가 다시 인사하자 코이는 계산대 안에 서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지난번 주인이 계산대 앞을 비우지 말라고 혼을 낸 바람에 이후 그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애슐리를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상체를 계산대 너머까지 내밀고 힘껏 팔을 흔들어 대는 코이를 뒤로하고 애슐리는 가게 문을 열었다.

“쿨럭, 쿨럭.”

갑자기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했던 애슐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는 코이에게 괜찮다는 표시로 한 손을 들어 보인 뒤 주차해 둔 차로 향했다.

코이가 물건을 담아 준 비닐봉지를 아무렇게나 조수석에 내던진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애슐리는 다시 걸음을 옮겨 차의 뒷문을 열고 기어이 불어나고 만 못생긴 인형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뒷좌석에 앉혀 놓았다. 다른 못생긴 인형들과 함께 안전벨트를 채워서.

*

코이는 가게 안에서, 떠나는 카이엔을 지켜보았다. 애슐리가 다녀가면 언제나 뿌듯한 행복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지만 오늘 느낀 감정은 좀 달랐다.

몸이 안 좋은가……?

팀 과제를 맡았을 때 애슐리가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았던 게 생각났다. 애슐리는 보기보다 몸이 약한 건지도 모른다. 유독 감기에 잘 걸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오늘따라 뺨이 상기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코이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

“쿨럭, 쿨럭.”

감기다. 애슐리는 열에 들떠 기침을 하면서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건강하다고 항상 자부해 왔는데, 감기만은 예외였다. 어릴 때부터 자주 앓았던 호흡기 질환은 걸리는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이지 그냥 지나가는 해가 없었다. 게다가 올해는 이렇게 독한 감기가 벌써 두 번째였다.

하아, 하아.

그는 거친 호흡과 함께 사이드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포트에서 물을 따라 들이켰지만 인후통 때문에 삼키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입만 겨우 축인 채 다시 컵을 내려놓은 뒤 고치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며칠 있으면 낫는다. 약을 먹으면 더 빨리 낫겠지만 약을 찾으러 갈 힘도 없었다. 집안일을 할 고용인은 하필이면 휴가를 떠났다. 며칠간 먹을 음식을 준비해 두고 갔지만 그건 이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지금 그는 침을 삼키기도 힘드니까.

하아아…….

열에 들떠 몽롱해진 의식에 스르르 눈꺼풀을 내렸을 때였다.

♪♪♬♩♩♪…….

희미하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휴대 전화의 벨 소리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뒤의 일이었다.

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애슐리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휴대 전화가 있는 사이드 테이블을 올려다봤다.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너무 시끄러웠다. 어쩔 수 없이 포근한 이불에서 팔을 빼 휴대 전화를 붙잡았다.

“……네.”

잔뜩 잠긴 음성으로 겨우 대답하자 건너편에서 놀란 듯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 애쉬, 어디 안 좋아?

빠르게 묻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애슐리는 반쯤 뜬 눈을 깜박이며 속삭였다.

“……코이?”

- 응, 나야! 애슐리, 목소리가 왜 그래? 또 감기야? 많이 아파?

코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그에 반해 애슐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멍해 떠오르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한참 만에 겨우 그 한 마디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곧이어 터져 나온 거친 기침 소리 때문에 별로 신뢰를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시나 휴대 전화 건너편에서 코이가 불안이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 정말이야? 이렇게 기침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아픈 거지? 많이 아프지? 어떡해? 약은 먹었어? 식사는?

질문은 많았지만 이번에도 애슐리는 한 마디만 겨우 했다.

“곧 나아.”

- 그때까지는 아프잖아!

득달같이 대꾸한 코이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쌕쌕 들려오는 숨소리가 왠지 애슐리에게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눈을 감고 다시 잠으로 빠져들려는데, 갑자기 코이가 말했다.

- 혹시 애쉬, 너네 집에 잠깐 가도 돼? 네 상태가 어떤지만 볼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멍하니 듣고 있는데, 코이가 말을 이었다.

- 너, 혼자 산다고 했잖아. 약이랑 식사랑, 아무것도 못 한 거 아냐? ……아니면 혹시, 지금 옆에 누구 있어?

뒷말은 자신감 없이 조심스럽게 뒤따라왔다. 애슐리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뒷말에만 반응했다.

“아니, 나 혼자야.”

- 그럼 갈게.

코이가 흔치 않게 단호한 말투로 선언했다. 그 단호함에 애슐리는 조금 머리가 깨었다.

“……뭐?”

여전히 들뜬 호흡 사이로 묻자 코이가 대답했다.

- 아플 때 혼자 있으면 더 힘들잖아. 폐 끼치지 않게 약만 주고 금방 올게. ……가도 될까?

코이는 이번에도 사이를 두고 뒷말을 덧붙였다. 무슨 생각을 떠올리기엔 머릿속이 너무 멍해서, 애슐리는 간신히 중얼거리기만 했다.

“맘대로 해.”

- 그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코이가 소리쳤다. 곧바로 전화를 끊을 기세에 애슐리가 뒤늦게 잠깐, 하고 붙잡았다.

“어차피 못 들어와.”

부지 내로 들어오려면 경비원의 신원 조회나 방문하려는 저택 주인의 확인 등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애슐리는 도저히 그런 걸 해 줄 컨디션이 되질 못했다. 애슐리의 생각을 눈치챈 듯 코이가 힘주어 말했다.

- 괜찮아, 갈 수 있어. 네가 저번에 가르쳐 준 집이 맞는다면.

애슐리는 이번에도 뒷말에만 반응했다.

“맞아.”

- 알았어. 저기, 그럼 가도 되는 거지?

코이가 한 번 더 물었다. 하지만 벌써 애슐리는 기절하듯 잠이 든 다음이었다.

*

역시 감기였어.

코이는 끊어진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애슐리가 며칠째 가게에 오지 않는 게 왠지 불길해서 전화를 해 본 것이었는데, 그의 예상이 맞았다.

더 심해지면 어떡하지.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건 코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아플 때 얼마나 외로워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일은 대입 시험이 있는 날이야.

코이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지만 그렇다고 애슐리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에게 뭐든 도움이 되고 싶었고, 이번이 기회인지도 모른다. 약이랑 먹을 것만 좀 챙겨 주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시간도 얼마 안 걸릴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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