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16)

21화

*

애슐리의 차가 시험 장소인 학교에 도착한 건 정해진 시간보다 15분이나 이른 때였다. 조수석에 앉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코이는 애슐리가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마주친 다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도착했어.”

“어? 어어.”

뒤늦게 눈을 깜박인 코이가 황급히 말했다.

“고, 고마워. 정말 시간 안에 왔구나…….”

감탄하는 한편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괜찮은 거야? 그게, 저.”

자신 때문에 무리를 한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러웠다. 코이의 마음속을 꿰뚫어 본 듯 애슐리가 농담을 했다.

“내 몸이? 차가?”

“둘 다.”

진지하게 대답한 코이에게 애슐리는 글쎄, 하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딱지를 몇 장 뗄지도 모르지.”

“몸은? 아직 감기가 다 안 나았을 텐데.”

이마를 짚어 보려는 손을 슬쩍 피한 애슐리가 말했다.

“일단 들어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기다린다고?”

“그래.”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난 신경 쓰지 마,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을 테니까.”

“응…….”

코이는 머뭇거리다 차에서 내렸다. 휴대 전화는 애슐리에게 맡긴 채였다.

“저기, 이따가 여기서 만나?”

“그래. 끝나고 보자.”

“응.”

애슐리의 대답을 들은 뒤 코이는 황급히 몸을 돌려 시험장을 향해 달려갔다. 곧이어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울리고, 애슐리가 차를 출발시켰다.

……또 열이 오르나 본데.

혼자 남게 되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이가 준 약을 먹은 지 벌써 12시간이 넘은 것이다. 그는 느리게 차를 운전하며 근처의 약국을 찾았다. 약을 먹고 눈을 좀 붙여야겠다.

거기까지 생각했던 애슐리는 곧 깨달았다. 자신이 아직 파자마 차림이라는 것을.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그는 차의 목적지를 바꿨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옷부터 갈아입자.

차를 달리는 동안 하나씩 할 일이 늘어났다. 먼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뭔가를 좀 먹고, 집에 상비약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할 일이 많아질수록 몸도 마음도 더 무거워졌다. 이럴 때만이라도 곁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에게 뭘 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냥 같이 있어 주기만 하면.

문득 코이의 얼굴이 떠올라, 그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그저 전날 코이가 그를 간병해 준 것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는 핸들을 돌리며 자신에게 다짐했다.

절대로.

*

망했다.

코이는 머릿속이 텅 빈 채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도대체 자신이 본 게 뭐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험 시간 내내 머릿속에는 애슐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몸은 괜찮을까? 뺨이 상기되어 있었는데. 아직 열이 남았던 거겠지? 그러고 보면 초점도 좀 흐렸던 것 같아. 그냥 가서 쉬라고 할걸. 난 끝나고 나서 걸어가도 되는데.

아, 정신 차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냐. 집중해야지. 애슐리가 아픈 걸 참고 여기까지 바래다준 건데 시험을 망치면 어떻게 되겠어. 정신 차려!

……혹시 지금도 밖에 있는 건 아니겠지?

정신 차려, 코너 나일즈!

설마 쓰러지거나 한 건 아닐까?

코너 나일즈, 시험부터 보라니까!

애슐리, 그냥 집에 가서 쉬어.

코너 나일즈!

하루 종일 둘로 나뉜 자신이 서로 머리를 뜯고 싸우다 시험이 끝나 버렸다. 코이는 완전히 재가 되어 버린 기분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바깥에는 차가 가득히 서 있었다. 시험을 마친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코이는 그들을 지나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코이는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기분으로 줄지어 서 있는 차들을 둘러보며 걸어갔다.

애슐리는 없는 걸까?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가도.

몸도 안 좋은데 쉬고 있는 게 낫지.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었다가도.

괜찮아, 항상 혼자였잖아.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가도.

집에 가면 애쉬가 기다리고 있겠지?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가도.

수시로 오락가락하는 감정이 마치 롤러코스터 같았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일시에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소함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빼곡하게 들어찬 차들 사이에서 낯익은 카이엔을 발견한 순간 코이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올랐다.

아.

시험을 망쳤다는 우울함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머릿속에는 오직 애슐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애쉬, 애쉬, 애쉬.

입 안에서 연달아 그의 이름을 되뇌며 급히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점차 빨라져 이내 달리기로 변했다. 애슐리를 볼 생각에 가슴은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설레는 심장이 그를 멈출 수 없게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조바심이 나 견딜 수 없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차에 도착한 코이는 정작 차문을 열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혹시 다른 차면 어떡하지?

괜한 걱정에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럽게 차창으로 얼굴을 들이댄 코이가 멈칫했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차는 애슐리의 것이 맞았다. 다만 그 애슐리는 운전석에 앉아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코이는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을 때였다. 애슐리가 움칠하는가 싶더니 눈을 떴다. 피곤한 듯 목뒤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차창 너머에서 보고 있던 코이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동안 둘은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애슐리는 멍하니 코이를 응시했다. 그가 현실을 깨달은 것은 몇 초 뒤였다.

“아.”

순간 감탄사를 내뱉은 애슐리가 팔을 뻗어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역시나 정신이 든 코이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오래 기다렸어?”

타자마자 묻자 애슐리는 조금, 하고 대답했다. 그는 편안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코이가 웃으며 물었다.

“집에 다녀왔어?”

애슐리는 시동을 걸어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며 대답했다.

“내가 잠옷을 입고 왔더라고.”

“괜찮아, 그래도 넌 멋있으니까.”

코이가 진심으로 말하자 애슐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코이는 부끄러워졌지만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실 애슐리는 언제나 멋있지만 이렇게 단순한 티셔츠에 청바지뿐인데도 너무나 근사했다. 아픈 탓인지 평소에 왁스를 발라 완벽하게 넘기는 머리카락도 덥수룩하게 내려와 아무렇게나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지만, 코이는 어느 쪽이든 다 좋았다.

“시험은 어땠어? 잘 봤어?”

도로에 나와 차를 달리며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뭐, 그냥저냥…….”

그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보다 몸은 좀 어때? 열은 내렸어?”

“뭐, 그냥저냥.”

애슐리가 코이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언젠가도 이랬던 기억이 떠올라 코이는 웃고 말았다.

“왜 자꾸 따라 해?”

“내가?”

“그래.”

코이의 웃음소리에 애슐리 또한 웃었다. 여전히 그의 뺨은 상기되어 있었지만 전날보다는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다행이다. 코이는 생각했다.

어느새 차는 컨트리에 도착했다. 혼자 왔다면 무수한 차들 사이에서 코이만 자전거에 올라타 한참을 기다렸다가 간신히 애슐리와 통화를 해 방문객임을 확인한 후 겨우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애슐리의 차를 타고 함께 오자 출입은 허무할 정도로 쉽고 간단했다.

옆에 줄지어 서 있는 차들을 지나쳐 곧바로 거주민 전용 게이트를 통해 빠르게 부지로 들어간 것에 코이는 우와, 하고 감탄했다.

“이렇게 빨리 끝나?”

“여기서 사니까.”

애슐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건성으로 말하고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지난번 산을 돌아 올라올 때는 물론이고 아침에도 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어 미처 자세히 볼 여유가 없었는데, 애슐리의 차를 타고 느린 속도로 부지를 달려가며 풍경을 보니 띄엄띄엄 서 있는 저택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이 가득하고 웅장했다. 하도 저택들이 커서 가끔 조금 작은 걸 보면 적당히 아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가장 큰 건 역시 애슐리가 사는 저택이었다. 혼자 지내는데 이렇게 거대한 집을 구입하다니, 애슐리의 부모는 애슐리를 무척 아끼는 게 분명하다고 코이는 생각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