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악마 얘기를 하면 악마가 나타난다더니 바로 그랬다. 코이는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애슐리의 여자 친구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두어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서더니 의미심장하게 코이의 전신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애쉬.”
이내 남자 친구에게 향한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발돋움을 해 키스를 한 에리얼이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잠깐 할 얘기 있는데, 괜찮아?”
“수업 있는데.”
애슐리가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로 말했다. 머리 위로 턱을 괴고 있던 건 그만뒀으나 여전히 그의 두 팔은 코이의 어깨에 걸쳐진 채였다. 에리얼은 슬쩍 그 팔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애슐리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점심 같이 먹어, 어때?”
“뭐, 좋아.”
애슐리가 대답하자 그제야 에리얼은 환하게 웃더니 다시 그의 입술에 키스한 뒤 돌아섰다.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코이가 고개를 들자 여전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애슐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애쉬?”
코이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시선을 내린 애슐리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수업 늦겠어.”
“아.”
애슐리는 그제야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는 코이의 어깨에 걸쳤던 팔을 풀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코이는 황급히 뒤를 따라갔다.
흘긋 올려다본 애슐리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딘지 심각했다.
*
점심시간이 되어 한자리에 모인 아이스하키 팀은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들은 한쪽 방향을 흘긋거리며 작게 소곤거렸다.
“무슨 얘길 하는 거 같아?”
“가만있어 봐, 내가 입술을 읽어 볼게.”
“설마 헤어지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헤어지긴 갑자기 왜 헤어져.”
“갑자기가 아니라니까.”
한 녀석이 한층 소리를 낮춰 말했다.
“애쉬가 앨한테 식은 거 같아.”
“뭐? 왜?”
“말도 안 돼, 우리 학교 퀸이잖아.”
여기저기서 숨죽인 비명을 질러 대는데, 녀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들었는데, 애쉬랑 앨이 안 만난 지 꽤 됐다는 거야.”
“뭐? 전에 다 같이 놀았을 때 봤잖아, 그 뒤로 안 만났다고?”
“몰라, 그런데 자주는 안 봤다는 건가. 아무튼 앨이 그거 때문에 화가 많이 났대.”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애슐리와 에리얼의 눈치를 살피며 수군대던 녀석들이 새로운 정보원을 찾았다.
“코이, 넌 뭐 아는 거 없어?”
당연하게 그 자리의 멤버가 된 코이에게 빌이 물었고,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그들의 얘기에 귀만 기울이고 있던 코이는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황해 급히 눈을 깜박거렸다.
“어, 저기, 그게…… 나도 잘 몰라.”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들이 모여서 논 게 언젠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만약에 애슐리가 파티가 있다며 코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 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데이트를 한 지는 꽤 오래됐을 것이다.
남은 방학 내내 애슐리는 코이와 시간을 보냈으니까.
코이와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대부분 저녁에 만났으니 낮에는 에리얼과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다만, 자신과 노느라 그간 에리얼과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그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연하지, 애쉬가 여자 친구 대신 나를 선택했다는 걸 어떻게 믿겠어.
코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슐리와 에리얼을 훔쳐보았다. 단둘이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뭔가 말을 나누고 있었다.
*
“그래서,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빴던 거야?”
소란한 식당 한편. 앞에 있는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채 에리얼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가슴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는 얼굴은 ‘어디 핑계를 대려면 대 봐라, 모두 박살을 내 줄 테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애슐리는 핑계 따위를 댈 생각은 없었다.
“할 일이 많았어.”
대강 말을 얼버무리자 에리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전화는 할 수 있었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애슐리는 사이를 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어.”
순순히 나온 사과에 에리얼은 의심스러운 시선을 향하더니 그동안 참았던 물음을 내뱉었다.
“너 혹시 바람났니?”
“뭐?”
애슐리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에리얼은 새침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아니면 됐고.”
“당연히 아니지.”
애슐리는 눈에 띄게 이를 갈았다. 그런 의심을 받았다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이 볼품없는 야채를 포크로 아무렇게나 찍어 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에리얼이 으흠,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알았어, 믿을게. 하지만 앞으로는 메시지에 바로바로 답해 줘야 돼, 알았지?”
“알았어.”
“좋아.”
애슐리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에리얼은 표정을 풀었다. 가득 담은 샐러드를 먹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고 애슐리가 물었다.
“별일은 없었지?”
에리얼은 야채 위로 요거트를 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있었어. 그래서 너랑 얼마나 얘기하고 싶었는데.”
“뭔데?”
애슐리가 물었다. 에리얼은 빈 요거트 병을 내려놓고 그를 마주 보았다.
“치어리딩 팀에 공백이 생겼어.”
“공백이라니 무슨 소리야, 인원이 모자란다고?”
찌푸린 얼굴로 물은 애슐리에게 에리얼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니까. 저번에 한 명 빠져서 겨우 채워놨더니.”
방학 전에 부상을 입어 그만둔 치어리딩 팀원 대신에 다른 부원이 들어왔다는 얘긴 들었다. 그런데 또 결원이 생겼다는 소리다. 에리얼은 눈을 흘기며 그를 비난했다.
“내가 얼마나 속이 탔는지 알아? 그런데 넌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보내고.”
애슐리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의 그런 모습을 슬쩍 본 에리얼이 물었다.
“파티는 갈 거지?”
“뭐?”
애슐리가 고개를 들자 에리얼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홈커밍 파티 말이야, 기억 안 나?”
“아…….”
그제야 생각이 난 애슐리가 말끝을 흐렸다. 에리얼이 집요하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마지못해 애슐리가 대답했다.
“맞아, 가야지.”
그제야 에리얼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빈약한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며 애슐리는 생각했다.
티켓을 사야겠군.
*
“애쉬!”
에리얼을 교실에 바래다주고 돌아가던 애슐리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코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저절로 얼굴이 풀어지고 미소가 떠올랐다. 애슐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코이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앨이랑 얘기 잘 끝났어?”
열심히 달려와 애슐리와 마주 선 코이가 물었다. 애슐리는 먼저 걸음을 떼며 말했다.
“뭐, 대충.”
“그렇구나. 잘됐네.”
나란히 걸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코이의 머리를 위에서 내려다본 애슐리는 또 그를 뒤에서 덮쳐 가마에 턱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애써 그런 스스로의 마음을 모르는 척 정면을 바라보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치어리딩 팀에 사람이 모자란대.”
“뭐? 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던 코이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어, 전에 들었거든. 누가 다쳐서 결원이 생겼다고.”
방학 전에 너네가 교실에서 떠들었잖아.
코이는 내심 생각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무심코 내뱉은 말에 애슐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선뜻 대답했다.
“그랬었지. 그걸 어떻게 메꿨는데 또 나갔나 봐.”
“그렇구나…….”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코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큰일 난 거 아냐? 곧 시즌이잖아.”
여름방학 전에 멤버를 구하려고 하는 건 그동안 연습을 끝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새로운 멤버와 호흡을 맞추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애슐리 역시 동의했다.
“그래서 지금 고민이 많다는 거야. 나한테 푸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당연하다. 이럴 때 가장 의지할 사람은 역시 남자 친구일 테니까.
고개를 끄덕였던 코이는 생각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애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별로 없을 수도…….
문득 쓸쓸한 기분을 느꼈던 코이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 친구가 1순위인 건 너무 당연하잖아. 여름방학 동안 나랑 놀아 준 것도 너무 고맙지 뭐.
“하아.”
갑자기 머리 위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코이의 시야에 심각한 표정의 애슐리가 들어왔다. ‘어?’ 하고 의아해하는데,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애슐리가 말했다.
“앨이 코치와 상담을 해 보겠다고 하던데, 글쎄, 차라리 안무를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으응…….”
코이는 잘 모르는 분야라 그냥 애매하게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말끝을 흐리자 갑자기 애슐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아무 생각도 없지?”
“어? 어…….”
코이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애슐리가 그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아, 아야, 아프다니까! 아파!”
사실 전혀 괴롭지 않았지만 코이는 파닥거리며 엄살을 부렸다. 머리 위에서 애슐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코이는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그때까지도 코이는 그 일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