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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216)

29화

“앞으로는 좀 잘 봐.”

“아…… 응.”

코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휴지통에 들어가 버린 빵에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다.

아깝다, 곰팡이 핀 부분만 떼면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벌써 늦었다. 곧 코이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괜찮아? 배 많이 고플 텐데.”

그 말 그대로였다. 애슐리는 창자가 오그라들 정도로 허기가 졌으나 아직 그에겐 볼일이 남아 있었다.

“그보다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 시간에.”

빨리 티켓이나 사서 나가야 했는데 입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키는 애슐리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채 코이가 선뜻 대답했다.

“학기 초라 많이 바빠. 특별 활동이나 봉사 활동 시간도 모자라고 해서…….”

뒷말은 부끄러운 듯 사그라들었다. 애슐리는 그렇구나, 하고 슬쩍 넘어갔다. 이런 시간에 학교에서 코이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보니 그는 당황했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즉각적으로 떠오르질 않았다. 허기 진 탓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신경은 예민해지긴커녕 점점 누그러지기만 했다. 더욱이 저절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억지로 입가에 힘을 주어 내리누르며, 애슐리는 자꾸만 멈춰 버리는 머리를 안간힘을 써서 움직였다.

빨리 티켓을 사서 나가자. 그게 최선이었다.

“티켓 두 장.”

“어?”

코이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애슐리는 천천히 음절을 하나하나를 끊어서 다시 말했다.

“티켓, 달라고. 홈, 커밍, 파티.”

“아, 아아.”

그제야 알아들은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냉큼 계산대로 달려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코이는 우물쭈물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저기…… 미안한데, 다 떨어졌거든.”

“뭐?”

이번에는 애슐리가 말을 못 알아들었다. 코이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은 뒤 조금 더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다 팔렸어. 그래서 지금은 남은 게 없어.”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꼼짝도 않고 서서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 그를 보고 코이는 내심 걱정스러워졌다.

“없다고? 티켓이?”

몇 초 뒤에야 비로소 애슐리가 거친 음성으로 내질렀다. 마치 울분을 억눌렀다 터뜨리는 것처럼 일시에 나온 외침에 코이는 움칠 놀랐다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마지막 두 장이 아까 팔렸어. 저기, 30분 전에…….”

코이는 더듬거리며 쓸데없이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10학년인 거 같던데, 처음 생긴 여자 친구랑 같이 갈 거라면서 사 가더라고. 다 팔렸다고 저기 써 붙였어야 했는데, 이 시간에 올 사람도 없을 테고 해서 일단 정리를 먼저 하고 문 닫기 전에만 붙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미안해, 네가 올 줄 알았으면 내가 그걸 안 팔고 놔두는 거였는데……. 설마 네가 아직도 안 샀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미안해.”

그는 거듭 사과하고 있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필요한 건 사과가 아니라 티켓이었다. 애슐리를 일상으로 되돌려 놓을 티켓.

하지만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코이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부터 시작해 티켓 구매까지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 미치도록 배가 고팠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애슐리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한 손으로 눈을 덮고 고개를 젖혔다. 고작 홈커밍 파티가 뭐라고 내가 이런 좌절을 맛봐야 한단 말인가.

“……하아.”

몇 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야에 비로소 애슐리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진실은 단순했다. 그는 좆 됐다.

애슐리는 손을 떨어뜨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고쳐 들었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학교를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안녕, 코이.”

맥없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을 때였다.

“자, 잠깐만, 애쉬!”

그때까지 눈치를 보며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코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이번에는 상한 우유라도 내놓을 건가,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자 코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내밀었다.

“저기, 이거.”

“……뭔데.”

시큰둥하게 말하자 코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것을 들이밀었다.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든 애슐리는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는 종이를 한 단계씩 폈다. 제일 먼저 파티라는 글자가 보이고, 다음으로는 날짜가 보이고, 다음엔 홈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하나씩 접힌 자리를 펼 때마다 애슐리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코이는 그 표정의 변화를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마침내 티켓을 전부 폈을 때, 애슐리가 놀란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애슐리의 물음에 코이는 뿌듯해하는 얼굴로 웃기만 했다.

“다 팔렸다고 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날 놀린 거야?”

애슐리가 짜증을 참고 묻자 코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선물받았어.”

“선물?”

응, 하고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컨 선생님이 자기 대신 매점 도우미를 해 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주셨어.”

“너한테 준 거잖아.”

“그렇긴 한데.”

애슐리의 지적에 코이는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난 여자 친구도 없고, 입고 갈 옷도 없어.”

솔직히 고백한 그는 한껏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갖는 게 훨씬 의미 있을 거야.”

“아니, 잠깐, 잠깐만.”

애슐리는 혼란스러워져 한 손을 내밀고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지금 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네가 선물받은 걸 나한테 주겠다는 거야? 아무 대가도 없이?”

“응, 물론이지.”

코이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주는 거라면 난 하나도 안 아까워.”

“…….”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진 침묵에 당황한 코이는 멋쩍음에 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저기, 빵이 상했던 건 정말 몰랐어. 미안해.”

“그건, 됐어.”

애슐리가 중얼거렸다. 성대를 쥐어짜듯 겨우 말했으나 더 이상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물론 코이가 고의로 자신에게 그걸 권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애슐리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 대가도 없이.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넌 나한테 뭘 해 주는 게 그렇게 좋아?”

“그럼, 당연하지.”

한참 만에 나온 질문에 코이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왜?”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코이의 대답은 이번에도 단숨에 흘러나왔다. 하지만 애슐리는 그 순간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밝게 빛나는 눈동자, 얼굴 가득 번지는 함박 미소, 기쁨으로 빨갛게 물든 두 뺨과 함께 코이가 말했다.

“네가 좋으니까.”

애슐리는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다시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뒤이어 맥박은 미친 듯이 뛰어 대고, 얼굴은 달아오르고, 귓가에서는 연신 폭죽이 터지고, 떨림이 손가락 끝까지 전해졌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발이 허공에 뜬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

그는 깨달았다.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녀석을 좋아하고 있구나.

분명히 시작은 동정이었는데. 그런데 그 감정이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애슐리는 생각했다.

아직도 난 이 녀석을 동정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애슐리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동정심으로 이렇게 가슴이 뛰지는 않을 테니까.

문득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한동안 코이를 멀리하겠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거야.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졌다. 코이가 같은 남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이렇게 뛰는 심장이, 들뜨는 숨결이, 떨리는 시선이 전부 다 너만을 향하고 있는데.

“……코이.”

한참 만에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는 곧바로 반응했다.

“응?”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바짝 곤두세우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애슐리의 입가가 저절로 허물어졌다.

“같이 갈래? 홈커밍 파티.”

“뭐, 뭐?”

순간 코이가 놀라 소리쳤다. 애슐리가 사실은 자신이 연쇄 살인범이라고 고백했어도 저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코이가 펄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나더니, 도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홈커밍 파티를 가자고? 나랑?”

“그래.”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 사람이 따로 있다면…….”

“아냐, 없어. 있을 리가 없잖아, 나한테! 난 코너 나일즈라고!”

“알고 있어.”

애슐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코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도 꿋꿋하게 할 말을 했다.

“애슐리 밀러라면 모를까 코너 나일즈에겐 그런 상대라곤 평생 없어.”

“잘됐네.”

“뭐?”

코이는 무심코 되물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애슐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평생 나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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