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16)

38화

“다 됐어.”

“……응.”

코이는 제 목소리가 떨릴까 봐 급히 헛기침을 했다.

“고마워.”

“그래.”

간단히 응답한 애슐리가 이번엔 자신의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코이의 끈을 신중하게 묶었던 것과는 달리 작업을 빠르게 끝내 버리는 것을 보면서 코이가 물었다.

“넌 언제부터 스케이트를 탔어?”

애슐리가 먼저 링크로 나가며 대답했다.

“글쎄, 4살?”

“뭐?”

깜짝 놀란 음성이 흘러나갔을 때는, 애슐리가 이미 벌써 저만큼 가 버린 다음이었다. 코이는 벤치에 앉은 채 자유롭게 얼음 위를 지치고 있는 애슐리를 지켜보았다. 시험 삼아 넓은 링크를 한 바퀴 돈 그는 이내 원위치로 돌아와 다시 코이 앞에 섰다.

“자, 너도 타 보자.”

애슐리가 손을 내밀었다. 코이는 크게 숨을 들이켠 뒤 용기를 내어 일어섰다. 순간 허우적거린 팔을 애슐리가 재빨리 붙잡아 줬다.

“고, 고마워.”

“천만에.”

가볍게 말을 넘긴 애슐리는 코이의 양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이끎에 따라 코이는 천천히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두 다리로 얼음 위에 섰을 때였다.

“으아악!”

“코이!”

비명과 함께 코이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이 찰싹 빙판 위에 붙어 버렸지만 다행히 두 손은 무사했다. 애슐리가 꼭 잡고 있어 준 덕분이었다.

“코이, 괜찮아. 자,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천천히…….”

애슐리가 허리를 숙여 그를 부축해 조금씩 몸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코이는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 했으나 도무지 생각대로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발을 링크 위에 디디려고 할 때마다 날이 미끄러져 다리가 쭈욱 내려가고, 어쩌다 겨우 세운 스케이트 날은 옆으로 엎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두어 번을 반복하고 나자 코이는 완전히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체 이런 걸 신고 어떻게 춤을 추라는 거야.

이대로 치어리딩 팀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그렇게 되면 내 특별 활동 점수는? 점수를 채우지 못하면 대입도 물 건너가게 된다. 아무리 돈이 없다 어쩐다 하더라도 가난하고 힘들어서 좌절되는 것과 제 능력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이대로 대학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는 걸까?

애슐리의 도움이 있어도 빙판 위에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계속 넘어지기만 하는 자신을 보면 전부 다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눈앞이 막막해지면서 그의 표정이 점차로 굳어 갔다. 그때였다.

“코이, 코이, 코이.”

애슐리가 연달아 이름을 불렀다. 마치 정신 차리라는 듯이. 순식간에 패닉에 빠져 버린 코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아, 안심해. 내가 도와줄 거야, 할 수 있어.”

애슐리가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해 주었지만 코이는 금세 울상이 되어 고개를 흔들었다.

“못 해…….”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에 좌절감이 들어 저절로 눈물까지 나왔다. 다정한 애슐리를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더 감정이 빠르게 차오르는 듯했다. 괜히 지난날의 일들까지 전부 다 생각이 나면서 입에서 억울함이 가득 담긴 말들이 흘러나왔다.

“난 정말 운동을 못한단 말이야. 어째서 이런 걸 내신에 넣어서 점수를 매겨야 하는 거야?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있듯이 못하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 난 사람들을 사귀는 것도 못 하고 몸을 움직이는 건 더 못 한단 말이야. 이건 너무 잔인하다고. 나 같은 사람은 대학도 가지 말라는 거야? 정말 너무하잖아…….”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해서 그만 펑펑 울어 버렸다.

그냥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내 나름대로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죽을 만큼 버티고 있는데 모두가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들 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끝까지 해내야 한다고,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봐, 남들이 다 타는 스케이트를 나는 일어서는 것조차 못 하잖아. 이게 뭐야, 끝났어. 난 완전히 망했다고.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코이가 엉엉 우는 동안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코이의 울음이 잦아들기만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에야 겨우 우는 것에도 지쳐 버려 코만 훌쩍이고 있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후련해졌어?”

“……응.”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울컥 치솟아 버린 감정이 가라앉고 나자 점차 객관화가 되면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애슐리도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 이렇게 시간을 내 준 것인데 자신이 짜증을 내고 울어 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했다.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 애쉬…….”

작은 소리로 사과하자 애슐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누구나 좌절할 때가 있는 거니까.”

“누구나?”

코이가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코끝을 보고 애슐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누구나.”

거기에 애슐리 밀러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코이는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푸념을 더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울며 히스테리를 부릴 때가 아닌 것이다.

“미안해, 애쉬. 이제 괜찮아.”

심호흡을 한 뒤 코이가 말했다.

“다시 해 볼게.”

“좋아, 그 전에 먼저…….”

애슐리가 코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그대로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똑바로 선 코이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애슐리가 갑자기 코이를 안아 들었다.

“뭐, 뭐야?”

“잠깐. 버둥거리지 마, 위험해.”

자신도 모르게 허우적거렸던 코이는 애슐리의 경고에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애슐리는 능숙하게 얼음 위를 미끄러져 가 처음 출발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자.”

코이를 벤치에 앉힌 애슐리가 페트병에 든 물을 가져왔다. 코이는 이번에도 고마워, 하고 인사를 한 뒤 물을 받아 입에 넣었다. 한참 운 탓인지 목이 말랐다. 실컷 마시고 병을 내려놓자 애슐리가 말했다.

“숨이 좀 진정되면 다시 시작하자.”

“……응, 고마워.”

“그래, 네가 나한테 고마워한다는 건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그 말은 그만해도 돼. 알았지?”

마지막 말을 덧붙인 뒤 애슐리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할 때라는 듯.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의 휴대 전화에서는 아까와 다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슐리는 음악을 꺼 버리고 휴대 전화를 대충 다른 곳에 던져두었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직 흐느낌이 남은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코이가 말문을 열었다.

“스케이트는 어쩌다 배우게 됐어? 그렇게 어릴 때.”

“그냥, 시시한 이유야.”

애슐리가 말했다.

“아버지가 시켜서.”

“아아…….”

코이는 교육열에 불타는 동부의 유능하지만 악마 같은 변호사인 그의 아버지를 상상해 보려 애썼다. 애슐리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처음엔 피겨로 시작했었거든.”

“뭐? 피겨? 네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코이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애슐리가 웃었다.

“그래. 왜? 나랑 안 어울려?”

“아, 아니.”

코이는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그만뒀어?”

뭐, 하고 애슐리가 이번에도 무심하게 대답했다.

“몸이 자꾸 커져서.”

꽤 그럴듯한 이유였다. 왠지 납득이 가 코이는 화제를 전환했다.

“아이스하키는 언제부터 했는데?”

“4학년. 좀 늦었지.”

“스케이트는 원래부터 탈 줄 알았으니까 좀 나았지?”

코이의 물음에 뜻밖에도 애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종목에 따라 스케이트 날이 달라서 다시 배워야 돼. 그래서 좀 고생했지.”

“그, 그래?”

당황한 코이가 자신이 신고 있는 스케이트화를 내려다보자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애슐리가 답을 주었다.

“네가 신고 있는 게 피겨야. 내가 신는 건 이거고.”

애슐리가 보란 듯이 자신의 스케이트를 들어 보였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눈에 들어온 스케이트는 날이 확연하게 달랐다.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날을 살펴보는 코이를 보고 애슐리가 말했다.

“이제 좀 나아졌지?”

“어? 어.”

그 말에 정신이 들고 보니 어느새 흐느낌이 멎어 있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그래, 그럼 일어서.”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실컷 울었으니까 이제 운 만큼 만회해야지.”

우와.

코이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운동 팀은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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