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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날짜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전날까지 애슐리에게서 특훈을 받았으나 간신히 일어서는 걸 마스터했을 뿐인 코이는 내심 긴장해서 치어리딩 팀을 찾아갔다.
실내 체육관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부원들이 그를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재빨리 소곤거리는 누군가의 말에 뒤돌아 있던 여학생이 몸을 돌렸다. 에리얼이었다.
“시간 잘 맞춰서 왔네.”
휴대 전화의 시계를 확인한 에리얼이 말했다.
“늦으면 바로 탈락시켰을 거야. 시간 약속을 지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말이야.”
끈을 입에 물고 머리칼을 대충 묶은 뒤 그녀는 짝짝, 두 번 박수를 쳤다. 부원들의 주의를 끈 그녀는 코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시즌만 뛰기로 자원한 신입이야. 모두 얘기는 들었지? 오늘 기본 동작 테스트를 하기로 했으니까 보고 투표에 참여해 줘.”
말을 마친 에리얼이 코이를 향해 섰다.
“자, 시작해 봐. 굳이 음악은 없어도 되지?”
“어, 응.”
고개를 끄덕인 코이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여자애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남자 혼자인 것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몸까지 움직여야 한다니, 과거의 그가 알았다면 일찌감치 자살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죽기엔 늦었다. 그리고 코이는 치어리딩 팀에 꼭 들어가야만 했다. 그는 떨리는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시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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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 전화의 시계가 6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기다리던 애슐리는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휴대 전화를 제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코이의 치어리딩 팀 입부를 위한 첫 번째 테스트 날이었다. 물론 이번에 통과한다고 해도 두 번째와 세 번째까지 있기 때문에 안심하긴 일렀다. 그래도 일단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마침 아이스하키 팀이 훈련을 쉬는 날이라 그는 가까운 벤치에 앉아 코이가 테스트를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치어리딩 팀이 연습을 하는 곳은 운동장 아니면 체육관이다. 아이스링크는 대부분 아이스하키 팀이 쓰기 때문에 필요할 때는 미리 시간을 정해서 번갈아 사용하곤 했다.
오늘처럼 꼭 필요한 명분이 있을 때는 치어리딩 팀에겐 절호의 기회라 이럴 땐 항상 아이스링크를 도맡아 썼다. 하지만 아마 테스트가 끝나면 곧 치어리딩 팀은 장소를 옮기려 할 것이다.
잘못하면 에리얼과 마주칠 확률이 크겠지만…….
애슐리는 차 안에서 기다릴까도 생각했으나 곧 그만뒀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수도 없었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다. 물론 애슐리는 피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데다, 이 학교에서 아이스하키 팀과 치어리딩 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나 마찬가지라 그러지 못한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하아…….”
문득 눈 안쪽이 시려 와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삼켰다. 얼마 전부터 이렇게 눈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안과에 가 봐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원인은 아마 스트레스나 과로일 거라는 진단만 받고 그냥 허무하게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진이 아닐까. 요즘 애슐리는 인생에서 최고로 즐거웠다. 스트레스라니, 말도 안 된다. 매일같이 학교에서 코이를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집까지 함께 돌아간다. 거기다 단둘이서 2시간 남짓한 특훈까지 하는데 스트레스가 쌓인다니 말이 되는가. 더해서 여긴 아버지도, 그의 오메가도 없지 않은가.
남은 건 과로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 그의 운동량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새벽까지 과제를 하는 건 그와 비슷한 수준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다. 이제 와서 과로 때문에 갑자기 눈이 아프다는 말도 웃기는 소리였다.
결국 원인은 찾지 못했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니 다행이긴 한데 이따금 이렇게 통증을 느끼는 것도 달갑지는 않았다. 경기 도중이나 운전하는 도중에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역시 12학년이 되면 아이스하키는 그만둬야겠어.
애슐리는 생각했다. 그의 진로는 어차피 정해져 있다. 프로가 될 것도 아닌데 바쁜 12학년에 굳이 시합을 하느라 대입을 망쳐서는 안 됐다.
다만 아쉬움은 남았다. 빌은 프로팀에 갈 예정이라 앞으로도 팀에 남을 것이다. 아마 애슐리가 빠지면 그가 주장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애슐리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는 바빠질 일밖에 없다. 그나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건 11학년까지다. 이번 시즌 경기는 꼭 이길 것이다. 그리고 화려하게 은퇴해야지.
코이는 테스트를 통과했을까?
문득 떠올렸을 때, 체육관의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애슐리가 자세를 바로 했다. 이어서 우르르 나오는 여자애들 틈에서 코이를 찾아 고개를 쭉 내밀었지만 원하던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그의 업보가 불시에 튀어나왔다.
“어머.”
누군가 감탄사를 내뱉고, 뒤이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쪽도 애슐리를 알아봤다. 에리얼이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한껏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본 애슐리는 어색하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안녕, 에리얼.”
에리얼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
애슐리는 잔뜩 화가 난 전 여자 친구의 얼굴을 테이블 건너편에 둔 채 카페테리아의 야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 다시 에리얼과 대화를 나눠야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날이 최대한 늦춰지기만 바랐는데 이렇게 불시에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 앞에 죽치고 앉아 있었으면서 뭘 몰랐다는 거야.
애슐리는 눈에 이어 머리까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런다고 에리얼의 표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으흠.”
애슐리가 먼저 헛기침을 했다. 언제까지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이왕 벌어진 일 빨리 끝내 버리자.
“잘 있었어, 앨?”
예전처럼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에리얼이 기가 찬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네가 지금 날 보고 웃으면 내가 그 잘난 얼굴 보고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애슐리가 민망해하며 웃었다.
“아닌가?”
순간적으로 에리얼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다섯 대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참았다. 후, 심호흡을 한 에리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언젠가 너와 진솔한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녀는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물었다.
“왜 그런 거야?”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는 팔짱을 끼고 매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꽤 잘해 가고 있지 않았어? 너도 나한테 불만이 있었던 것 같진 않은데, 대체 왜 그랬어? 난데없이 한밤중에 찾아와서 헤어지자고 했잖아.”
에리얼은 차분하면서도 명확하게 하고 싶은 말을 나열했다. 아마 머릿속으로 수차례 지금 이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돌려 봤을지 모른다. 애슐리는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솔직한 대답이 최선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넌 잘못한 거 없어.”
“당연하지.”
에리얼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애슐리는 웃고 말았으나 그 웃음도 오래가진 않았다. 곧이어 씁쓸함이 번진 얼굴로 그는 말했다.
“내가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인정할 수가 없었어.”
에리얼이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애슐리가 다시 사과했다.
“미안해, 에리얼.”
에리얼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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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급하게 짐을 챙겨 마지막으로 체육관에서 나온 코이는 막혔던 숨을 일시에 뱉어 냈다.
자신이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에 숨이 막혀 머릿속은 텅 비고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온몸의 세포를 쥐어짜듯 기계적으로 그저 움직이기만 했다. 수없이 연습했던 동작을 몸이 저절로 따라 주길 바라며.
마침내 모든 게 끝났을 때, 코이는 잔뜩 긴장한 채 결과를 기다렸다. 모여 있던 부원들은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수상한 눈짓과 묘한 침묵에 코이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때, 에리얼이 말했다.
〈투표를 시작할게.〉
어디론가 들어가서 O 또는 X를 표시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간단했다. 단순하게 손을 들어 찬성과 반대를 표하고 숫자를 세는 게 전부였다. 나중에 임시 회원을 들이는 데 그렇게 거창한 절차는 필요 없다는 말을 들었다. 코이는 잔뜩 긴장해서 올라갔다 내려가는 손을 지켜보았다. 결과적으로 단 한 표 차로 그는 아슬아슬하게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했다.